규모가 대단히 큰 객잔임에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 듯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의 대부분은 얼마 전에 벌어졌던 요와 금의 전쟁이었다.
객잔의 2층 한구석에 있는 탁자에서는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 셋이서 근심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금이 버틸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걸세. 전에는 겨우 3만이 침공했으니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 세 배가 넘는 10만이라고 하지 않나? 요 황제도 이번에는 금을 확실히 박살 내려는 모양이야.”
그들 중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10만이라는 말에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10만이나! 금이 잘 버텨 내야 할 텐데 걱정이군.”
처음에 말을 꺼낸 사내는 답답한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글쎄 말일세. 지금이야 오랑캐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요가 만약 금을 멸한 뒤 이곳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군.”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황실에서는 요 황제에게 해마다 막대한 재물을 가져다가 바친다는 소문이 있네. 아마도 이곳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을 게야.”
“허허, 이 사람 보게나. 그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 놈들을 믿는다는 말인가? 금을 멸하고 더욱 힘이 강성해지면 쳐들어올 게 뻔해. 아, 이건 내가 소문으로 들은 건데 말일세…….”
그러면서 사내는 주위를 한 번 슬쩍 둘러본 후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디선가 떠도는 유언비어 한 토막을 주워들은 모양이다.
모두들 금과 요의 전쟁에 관심을 쏟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요와 금의 전쟁은 먼 산의 불구경이 아닌 것이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삶에도 어떤 형식이든 간에 영향이 미칠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옆 자리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남녀는 남들이 뭐라 떠들건 신경도 안 쓰고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바로 옥대진과 능비화였다. 이 객잔은 능비화의 사문인 화산이 멀지 않았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2층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 출입문이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았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아는 사람들이 객잔에 들어오면 빠르게 대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과 함께 강호 유람을 시작했던 초미는 지금 제령문에 있었다. 초씨세가의 가주 초우가 마교 교주에게 당한 부상이 매우 심각했기에 그 근처 의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데다, 당시 옆에 있었던 패력검제가 제령문이 가까우니 한동안 몸을 추스르고 돌아가시라는 청을 하는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초미는 부상당한 아버지와 함께 패력검제를 따라 제령문으로 가 버렸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청춘 남녀는 단 둘만의 유람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쳐 버릴 옥대진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능비화를 꼬시기 시작한 옥대진의 노력이 그 빛을 발한 것인지, 유람이 끝난 이 시점에서 그들은 꽤나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있었다.
매화검 옥대진의 사문은 무림맹주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도 지금 무림맹의 장로가 아닌가. 그런 명문의 자제가, 그것도 7룡에 끼였을 정도로 뛰어난 후기지수인 그가 능비화를 유혹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옥대진은 그윽한 눈길로 능비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와 함께한 강호 유람도 오늘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하기 그지없구려.”
옥대진의 말이 싫지 않은 듯 능비화는 곱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이번이 소저와 함께한 첫 유람이 아니겠소?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번 강호행을 잊지 못할 것 같구려.”
“소녀도 그렇답니다.”
옥대진은 살며시 손을 뻗어 능비화의 손을 감싸 쥐며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대와 단 둘이 있고 싶구려.”
능비화와 함께 화산파로 돌아가면 이 유람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면 장래를 약속한 사이든 아니든 그녀를 화산파까지 바래다준 이상 옥대진은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늑대 같은 옥대진의 마음이야 그녀를 데리고 어디 으슥한 곳으로 향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대는 화산파의 영역이었다. 화산의 수많은 속가제자들이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곳인 것이다. 그들의 눈에 띄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망신을 당하겠는가. 그렇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30대 중반 정도의 장년(壯年)이 들어왔다. 계속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능비화였기에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장문…….”
이때, 옥대진이 능비화의 손을 감싸쥐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으시오. 우리가 워낙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기에 가만히 있으면 저분께서도 잘 모르실 것이오. 이제 그대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소. 괜히 다른 사람의 방해로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가가의 말씀이 맞아요.”
능비화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뒤 현천검제의 동태를 감시했다. 저쪽에서 이쪽을 알아본다면 그때 가서 아는 척을 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현천검제가 슬쩍 객잔 안을 둘러보자 그를 알아본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역시 그가 자주 찾는 곳이라 그런지 점소이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3층에 빈방이 하나 남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손님이 나가신 다음이라 아직 정리가 안 됐는뎁쇼.”
“괜찮다. 그곳을 쓰지.”
현천검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객잔 문을 통해 또 한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 사내는 바로 묵향이었다.
“자, 방으로 안내하거라.”
“예,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나으리.”
둘은 점소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능비화와 옥대진은 경악감에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저?”
능비화에게 속삭이는 옥대진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화산파의 장문인이 저 극악무도한 마교 교주와 함께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능비화라고 그걸 알 도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옥대진의 얼굴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장문인의 행동을 자신의 연인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꽉 차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를 떠납시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시오. 혹여, 누군가 이곳을 감시하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오.”
옥대진과 능비화는 서둘러 객점에서 나온 후 자신들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추격자를 따돌렸다. 갑작스럽게 경공을 전개하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슬쩍 으슥한 곳에 숨어 혹시나 미행하는 자가 있는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기도 했다. 거의 한 시진 동안 그 짓을 하고서야 옥대진은 한시름 놓은 듯 능비화에게 속삭였다.
“아무도 미행은 없는 듯하오.”
“예,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옥대진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일을 세상에 밝혀야만 하오.”
순간 옥대진의 머릿속에는 정파의 영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교의 음모를 밝혀내어 정도 무림을 구한 영웅. 자신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옥대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능비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빨리 화산으로 올라가 장로님들께 보고를 올리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능비화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옥대진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소저의 말이 최선의 길이겠지요. 화산파 내에서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사실 이런 사실이 밖에 새 나간다면 그만큼 큰 치욕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옥대진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능비화를 마주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크오.”
“예? 미행도 없었으니…….”
“미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장문인이 포섭되었을 정도라면 장로님들 중에서도 포섭된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오. 얼마나 많은 인물이 마교에 포섭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화산으로 가는 것은 죽으려고 가는 것과 진배가 없소이다. 조용히 일을 무마시키려는 소저의 뜻은 이해하겠으나, 저들에게 헛되이 목숨을 잃는다면 저승에 올라가서도 통탄할 일이 되지 않겠소?”
사실, 아직 화산파 장로들이 포섭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옥대진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화산파에 이 사실을 고한다면, 그들은 최대한 쉬쉬하며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음모를 알린 자신의 공적은 그냥 묻혀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옥대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와 함께 무림맹으로 갑시다.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될 수 있으면 조용하게 이번 일이 마무리되도록 하리다.”
“너, 너무 고마워요, 가가.”
옥대진의 속셈을 모르는 능비화는 상대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대진은 최대한 빨리 무림맹 호북분타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에게 전후 사정을 기록한 전서구를 날린다면, 모든 일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 뒷일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묵향의 유희
어쩌다 보니 제령문에 오게 된 진팔은 매일매일 열심히 도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가 도법 수련을 하고 있는 곳은 후원에 마련되어 있는 연무장. 말이 연무장이지 그냥 넓은 공터일 뿐이었지만, 진팔에게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제령문에 온 후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시작한 무공수련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욱 열심히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저 두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화경에 든 초절정의 고수가 자신의 무공을 무슨 이유로 살펴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누가 아는가? 뭔가 미비한 점에 대해 조언이라도 해 줄지 말이다. 진팔은 은근슬쩍 그런 기대를 가지며 오늘도 도를 잡고 연무장에 선 것이다.
먼저, 허공에 가상의 적을 눈앞에 그린다. 이때 진팔이 만들어 낸 가상의 적은 일전에 큰 위협을 줬던 남궁세가의 창궁18수였다. 진팔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서히 도를 들어 올리고는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라. 네가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도는 더 이상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도의 뜻을 꺾으려고 하지 말고, 도가 이끄는 대로 초식을 흘리거라. 그렇게 하면 또 다른 경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진팔이 신도합일(身刀合一)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 삼사저(三師姐)가 들려준 조언이었다. 그가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며, 또 가장 좋아하는 삼사저는 천지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리고 진팔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진팔의 도가 가상의 적들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짙은 도기를 뿌려 대며 흐르던 도는 어느샌가 진팔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빗살처럼 허공을 가르던 도는 크게 원을 그리듯 목표인 가상의 적들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챙!
흐르는 물처럼 적들의 몸을 통과하던 도가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의 손에 튕겨져 나왔다. 진팔은 급히 도를 회수한 뒤 사내를 향해 있는 힘껏 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엄청난 도기가 허공에 뿌려지며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허어, 저런 2류도법이나 휘두르는 놈이 어떻게 저 나이에 신도합일을 깨달을 수가 있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물론 저놈이 한 20년 정도 나이를 더 먹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지. 하지만, 저놈 나이는 량이하고 비슷하지 않은가.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태어난 량이에게 좀 더 무공을 쉽게 익히라고 어렸을 때 노부가 직접 벌모세수까지 해 줬지. 그리고 뛰어난 심법을 익히게 했으며, 최상승검법까지 노부가 직접 가르쳤어. 그런데 어떻게 저놈이 량이와 비슷한 수준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대성하기가 그렇게도 힘들다는 태허무령심법을 익힌 놈이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불신 어린 시선으로 한참 동안 진팔의 수련을 지켜보던 패력검제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뭔가 있어. 그가 저 녀석에게 주목한 뭔가가 말이야. 심법만 가르쳐 줘도 저 정도까지 대성할 수 있는 1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재목인 줄 한눈에 알아보고…….”
그러나 곧 말도 안 된다는 듯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더 말이 안 돼. 아무리 무림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저놈이 배운 것은 태허무령심법. 다른 심법은 익힐 수도 없고, 오로지 그 심법만으로 대성을 해야 해. 물론 일정량 이상의 내공을 쌓기만 하면 엄청난 능력을 뿜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술에도 걸리지 않는 현문 최고의 심법이긴 하지. 하지만 이 심법이 지닌 최대의 단점은 연성 초기에 공력을 쌓기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야. 그 때문에 결국 현문에서조차 그 누구도 익히지 않아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고개를 흔들던 패력검제는 다시 수련을 하고 있는 진팔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태허무령심법을 익혔다고 해도 대성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야. 뭔가가 있어, 뭔가가……. 도대체 그게 뭘까?”
진팔의 기대와는 달리 패력검제가 그의 무공을 관찰하고 있는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옥대진과 능비화가 있지도 않은 미행자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숨으며 무림맹 호북분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묵향은 홀로 야경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천검제는 벌써 자신의 문파로 돌아간 후였다. 아마도 그는 돌아가는 대로 장로들을 소집해 이번에 사로잡은 포로를 놔 줄 것인지 어쩔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놔 주지 않는다면 마교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이다.
“화산에 오르기 전에 방은 잡아 놨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더 좋겠군. 이곳 음식이 썩 마음에 든단 말이야. 푹 쉰 다음 내일 출발하면 되겠군.”
타고 온 말은 사천분타에 그냥 놔두고 왔고, 이전에 잡아 놨던 방에 놔두고 온 물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그냥 묵는다 해도 걸리적거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묵향은 방 옆에 드리워져 있는 붉은 줄을 살짝 당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들어오며 싹싹한 어조로 물었다.
“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손님?”
“빈방이 있느냐?”
“예, 손님. 그런데 어떤 방을 원하십니까? 저희 객잔에는 모두 여섯 종류의 방이 있습니다.”
묵향은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말했다.
“가장 좋은 방을 다오.”
그 말에 점소이는 환하게 웃으며 더욱 비굴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옛, 지금 방으로 드시겠습니까?”
묵향이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점소이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손님. 묵으실 모란채는 후원에 있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어 손님의 마음에 쏘옥 드실 겁니다.”
그곳은 하룻밤 자는 데 무려 은자 넉 냥이나 하는 방이다. 이런 돈 많은 손님에게는 최대한의 친절로 모셔야만 뭔가 떨어지는 것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묵향을 안내하는 점소이의 어조에는 애교가 담뿍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