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1화 (427/930)

패력검제의 비급

“허허, 오늘도 수련한다고 수고가 많구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건 무림인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죠. 혹시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이 있으십니까, 어르신?”

진팔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하는데도 영 기분이 찝찝한 패력검제였다. 저런 괴이한 성격을 지닌 무인을 처음 대하다 보니 좀 적응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감정이었다.

“뭐, 딱히 자네가 도와줄 것은 없고, 자네하고 얘기나 좀 나눌까 해서 이리로 왔네.”

“좋습니다. 제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시원한 저쪽으로…….”

“저곳이 좋겠구먼.”

후원을 가로질러 걸어간 패력검제는 연못 위에 세워 둔 작은 정자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온 진팔은 예법에 맞게 도를 정자 밑에 세워 놓고 올라와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자네, 도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엄친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화경의 반열에 오르신 어르신께서 보시기에는 영 미흡하시겠죠? 헤헤, 원래가 강호에서도 2류 정도에 놓이는 도법이라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아부를 해 대는 것 때문에 패력검제는 진팔의 인간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느꼈었다. 그 때문에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무려 2개월간이나 관찰해야만 했던 것이다. 무술 수련을 할 때는 공공연히, 그 외에 그가 사생활을 즐길 때는 아주 비밀리에. 끊임없이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마지막 한 가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호오, 자네 제법 주제 파악을 하고 있었군. 그런데 어찌 그따위 도법으로 낙양에서 그렇게 큰 문파를 세울 수 있었을꼬?”

패력검제가 진팔의 사문을 은근히 비하했으니 화가 날 법도 하련만 진팔의 안색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괜히 따져 봐야 맞을 텐데, 미쳤다고 따지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현실을 상당히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진팔이었다.

“그럴 리가요. 저를 보고 엄친의 실력을 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엄친께서는 그래도 낙양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리고 계시거든요.”

‘흠, 역시 자신보다 고수 앞에서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놈이로군. 좋아, 조금 더 강도를 높여 볼까?’

“그래, 자네 사문에 내려오는 도법이 뭔가?”

“예,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선풍도법(僊風刀法)입니다. 제가 언제나 수련하는 도법이죠. 이름만 근사하지 어르신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큼 그렇게 대단한 무공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주에게만 전수되는 회류도법(回流刀法)이 있습니다만, 저는 배우지를 못했기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름으로 봤을 때는 서로 어느 정도 유사함을 지닌 무공처럼 느껴지는군. 안 그런가?”

“아무래도 좀 그렇겠죠? 헤헤, 하지만 저도 보지를 못해서 정확한 답을 해 드리기는…….”

“흠, 선풍도법이 겨우 2류 정도라면, 회류도법은 잘해 봤자 1류 정도겠군. 진양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라는 소문은 내 들어 본 적 있네만, 도법이 저 정도라면 익혀 봤자 뻔한 것이지. 그의 무공이 소문만 못한 모양이군.”

이번에는 조금 효과가 있었다. 진팔의 호흡이 조금 불안정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억양이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화경의 경지를 개척하신 어르신께서 보시기에는 형편없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엄친께서는 낙양에서 꽤나 알려진 고수십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에게 도법은 누가 가르친 것인가?”

“여러 어르신께 배웠습니다. 아무래도 사문에 소속되어 있다 보면 꼭 한 사람에게서 배울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좋아, 내 질문을 바꿈세. 선풍도법의 진수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군가?”

진양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후에 진양을 물고 늘어져 진팔의 성질을 한번 폭발시켜 보려던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팔의 대답은 패력검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삼사저이십니다.”

“삼사저라고? 그녀의 이름이 뭐지?”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텐데…….”

진팔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소연(蘇衍) 사저십니다.”

“소연이라고?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로군. 아하, 자네 도법이 왜 그 모양인가 했더니 부친이 자네를 가르치기 귀찮아 그녀에게 팔밀이를 해서 그런 것이었군. 어쩐지…….”

그 순간 진팔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따지듯 외쳤다.

“뭐라고요? 제 실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지, 왜 삼사저를 욕하시는 겁니까?”

‘어쭈? 이번에는 제법 반응이 있는데?’

“원래 도의 장점은 무거움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파괴력에 있음을 자네는 모르는가? 여자하고 도법은 처음부터 맞지가 않아.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도 가벼운 도를 이용하여 슬그머니 겉핥기를 한 것이 분명한데, 그걸 배웠으니 자네 도법이 그 모양이지.”

이 순간, 진팔에게 있어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혹 상대에게 칼 맞아 죽는다고 해도, 그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던 것이다.

“크악! 물론 삼사저께서 가벼운 도를 쓰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의 가볍고 무거움이 중요한 것입니까? 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좀 더 깊은 경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도의 음성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조언을 해 준 삼사저라는 여인은 최소한 신도합일을 구현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문파에서는 장로급이 아닌가. 패력검제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밝힐 필요는 없었다. 지금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더욱 비비 꼬인 어조로 응대했다.

“도가 하는 말? 헛, 이런 답답한 녀석을 봤나. 쇳덩어리가 무슨 입이 붙어 있다고 말을 해. 그게 다 자기 마음속에서 조금씩 형상화되는 깨달음의 발현인 것을. 그딴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정말 헛배운 게 틀림없구먼.”

“뭣이라고요?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뭘 헛배웠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대로 하니까 잘만 되던데.”

두 사람의 설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마도 패력검제가 자신보다 동급이거나 아니면 조금 윗줄 정도만 되었어도 진팔은 상대를 그냥 안 놔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 아무리 진팔이 꼭지가 돌았다고 하지만 마지막 이성은 남아 있었기에 도를 뽑아 들고 달려드는 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진팔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사라지고 난 후, 패력검제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리 감추고 감춰도 본성은 드러나는 법이지. 저놈에게도 약점이라는 게 있긴 있었군, 그래. 하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자신을 숨기는 놈이라면 결코 저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뜻밖이야. 목숨까지 내걸고 나한테 따진 걸 보면, 저놈은 삼사저를 사랑했단 말인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놈은 결코 속셈을 감추고 연극을 할 수 없지.”

패력검제는 천천히 일어서서 연못 안을 노니는 잉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연이라, 그런 숨은 여고수가 있었을 줄이야……. 확실히 무림은 와호잠룡(臥虎潛龍)의 세상이로다.”

잠시 잉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패력검제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외쳤다.

“이크! 그러고 보니 저놈이 떠나기 전에 어서 가서 붙잡아야겠군. 그놈의 성격으로 봤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니 여기에 붙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빌어먹을! 내가 더러워서라도 떠난다, 떠나!”

진팔은 욕설을 내뱉으며 조령의 숙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짐이야 처음부터 가져온 것도 없었으니 단출하게 곧바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기까지 함께 온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동료들에게 빨리 떠나자고 말하려고 달려가던 진팔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게 아니잖아. 왜 그 녀석을 데려간단 말이야? 오히려 짐 덩어리일 뿐인데. 그토록 무림을 경험하고 싶어 했으니 여기다 놔두고 가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서는 진팔의 발걸음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었다. 조령과 그동안 꽤 정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단은 빠를수록 좋은 법. 마음을 고쳐먹은 진팔은 최대한 경공술을 발휘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서 진팔의 옆에서 엄청난 기세로 접근해 오는 뭔가가 있었다.

“뭐…, 뭐지?”

진팔이 채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뒷덜미가 나무에라도 걸린 듯 우악스럽게 뒤로 끌어당겨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진팔은 팔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달리 할 게 없었다.

“으아아악!”

패력검제가 진팔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확 끌어당겨 내던져버린 것이다. 진팔은 그야말로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이 되고야 말았다. 몇 바퀴 구르다가 쭉 뻗은 진팔은 끙끙거리기만 할 뿐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했다.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땅바닥에 처박혔으니 그 충격이 엄청났던 것이다.

“으으으윽! 아이구.”

진팔이 신음하는 데도 패력검제는 눈도 깜짝 안 했다.

“노부에게 인사도 않고 떠나려고 한 벌일세. 자, 그만 하고 일어서서 노부를 따라오게.”

갑자기 왜 패력검제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라면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힘없는 자의 설움이니 말이다. 만약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또다시 패대기쳐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진팔은 아픈 곳을 주무르며 절뚝절뚝 패력검제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패력검제가 진팔을 데려간 곳은 그의 서재였다. 그는 진팔에게 자리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가 서재로 돌아왔을 때, 진팔은 그의 손에 비단 보자기로 싼 물건이 들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비단 보자기에 싸여 있는 물건을 탁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놨다. 패력검제가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는 아주 튼튼해 보이는 작은 함이 나타났다.

“이게 뭔 줄 아는가?”

진팔이 점쟁이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알겠는가. 기분이 상한 진팔이 입을 꽉 다물고 있자 패력검제는 피식 웃으며 함의 뚜껑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부 때문에 기분이 좀 상했는가 보군.”

‘젠장, 나하고 비슷한 등급만 되었어도 뼈를 추려 놨을 텐데…….’

내심으로는 패력검제의 머리통을 몇 번이나 패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분노한 진팔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정도로 강호 경험이 일천한 진팔이 아니었다. 진팔은 공손히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주제에 감히 어떻게 화·경·의·고·수이신 제령문주님께 신경질을 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염려는 그만 두십시오. 지금까지 그러셨으니 마음껏 저를 놀리시면 될 거 아닙니까?”

“으하하핫, 노부가 자네를 좀 시험했다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군. 노부도 어쩔 수 없었다네. 과연 자네가 이것을 볼 자격이 있는지 알아 보려고 했을 뿐이니 그만 화를 풀게나. 자, 이것을 보게. 이것은 본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니 말이야.”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는 말에 진팔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함의 안쪽으로 돌아갔다.

패력검제는 함 안에서 기름종이로 꼭꼭 싸인 뭔가를 꺼냈다. 그런 다음 천천히 기름종이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두께라든지 크기로 미루어 보아 서책임에 분명했다.

‘설마, 이, 이것이 창룡검법(漲龍劍法)이란 말인가?’

창룡검법은 제령문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검법이다. 패력검제가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했으니 분명 그것은 창룡검법일 것이 확실했다.

패력검제가 기름종이를 풀어 나가자 과연 진팔의 짐작대로 낡은 비급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든 듯 허름했고, 또 제목조차 없었지만 일단 창룡검법이라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게만 느껴졌다.

“자, 한번 읽어 보게. 이것이 자네에게 더 높은 차원의 무공으로의 눈을 뜨게 해 줄 걸세.”

“그,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런 천고의 기회를 얻게 해 준 하느님과 부처님, 원시천존님과 패력검제에게 감사하며 진팔은 비급을 넙죽 받아 들었다. 예의상 한 번 정도 사양할 법도 하련만 진팔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사양했다가 “아, 그런가? 그렇다면 억지로 권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그럼 혼자 잘해 보게”하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자신만 손해 보는 게 아니겠는가.

워낙 낡은 비급이었기에 혹시나 찢어질세라 진팔은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손은 기대감에 넘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비급은 ‘갑(甲)’이라는 사람과 ‘을(乙)’이라는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 창룡검법의 무공 전수 방식은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군. 처음에 무공구결부터 나올 줄 알았더니, 과연 최고의 검법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읽는 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이런 대화체를 선택하다니 말이야.’

그런데 비급을 읽어 내려가는 진팔의 표정이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나오라는 무공구결은 나오지 않고 갑과 을의 쓰잘데기 없는 잡담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신변 잡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즐기는 취미 생활 얘기까지 대화 내용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정무공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모래밭에 물이 스며들 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분명 패력검제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판단한 진팔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보여 줄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자신을 속이다니. 분명 당황해하는 자신의 표정을 바라보며 내심 킥킥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빨마저 뿌드득 갈렸다.

하지만 진팔은 잽싸게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귀계와 음모가 넘치는 험악한 무림에서 살아나가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웃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급을 읽어가던 진팔의 두 눈이 일순 번쩍였다. 음악에 대한 토론이 끝나자 이번엔 무공의 원초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진팔의 얼굴은 다시 심드렁하게 변했다.

이야기가 또다시 뜬금없이 음식 얘기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 아마 이 비급은 갑과 을이 대화한 것을 거의 여과 없이 기록해 놓은 것인 모양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나이 처먹고 그렇게 할 짓이 없나? 어린 사람 붙잡아 놓고 놀리는 걸 즐기고 앉아 있게.’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판단한 진팔은 비급을 건성으로 휙휙 넘겼다. 무공의 극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어느 지방의 차 맛이 좋은지, 자기가 즐겨 마시는 게 어떤 술이라는 둥,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던 진팔의 손이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이, 이건!’

세상만사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갑자기 자신들이 얻은 검에 대한 심득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진팔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두 사람의 토론에 빠져 들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읽을수록 현기에 넘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공으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비급의 내용이 끝나자 진팔은 아쉬운 듯 눈을 감고 잠시 두 사람의 내용을 음미했다. 읽다 보니 뭔가 절정무공의 끝자락을 붙잡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라는 두 사람은 진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고수였던 것이다.

잠시 후, 눈을 뜬 진팔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패력검제를 바라보았다.

“이 비급은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이 갑과 을이라는 두 사람은 누구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패력검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만약 진팔의 무공 수준이 패력검제의 예상보다 떨어지는 것이었다면 결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과연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자네는 내 생각대로 상당한 경지까지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 자, 노부가 문제를 하나 내겠네. 여기 나오는 두 사람, 즉 갑과 을은 누구겠나?”

족히 수십 년은 된 듯한 아주 오래된 비급인 것을 보면, 그들 중에 패력검제가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이때, 진팔의 머릿속에 한때 무림을 뒤흔든 제령문의 절세고수 한 명이 떠올랐다.

“혹시 뇌전검황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패력검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제법이로군. 그렇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뇌전검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진팔의 머릿속으로 과거 무림에 명성을 떨쳤던 최강의 고수 여덟 명의 위명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뇌전검황, 무극검황, 만사불황, 옥화무제, 만통음제, 수라도제, 태극검제, 곤륜무제. 모두들 뇌전검황과 비슷한 연배의 고수들인 만큼 그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뇌전검황은 당연히 제외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옥화무제와 수라도제도 제외되었다. 뇌전검황과 담소를 나누기에는 그들의 연배가 아무래도 한 수 뒤쳐지기 때문이다.

또한 만통음제도 제외되었다. 음공의 고수인 그와 뇌전검황이 검법을 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사불황도 제외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림사가 낳은 최고의 무승이기는 했지만, 수련 중 주화입마에 빠져 처음에는 불계불황(不戒佛皇)에서 시작해서 만사불황(萬邪佛皇)으로까지 별호가 바뀔 정도로 미쳐 버린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미쳐 버리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진팔은 만사불황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무극검황, 만사불황, 태극검제, 곤륜무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왠지 비급을 읽다 보니 갑이라는 인물은 정통적인 도인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불가 쪽 고수도 아닌 듯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무극검황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패력검제는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호오,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가?”

진팔은 자신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갑이라는 분이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보면, 자신의 심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조금 도가적인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통적인 도사인 것 같지는 않거든요. 속가제자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무극검황 어르신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허허, 놀랍구먼.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당한 견문을 쌓지 않으면 힘든 일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은 아니시네. 갑은 노부의 사부님이시지.”

그 말에 진팔의 안색이 확 찌푸러 들었다. 처음부터 예상이 잘못된 것이다. 도가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고차원적인 심득을 제시하고 있는 인물인 을. 진팔은 그가 뇌전검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뇌전검황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워낙 파격적인 심득이라 정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파와의 중도적 색채마저도 느끼게 만든 그 인물은.

그때 문득 진팔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뭔가가 있었다. 도가 쪽으로도 무공의 한 뿌리가 닿아 있는 사파의 전설적인 고수 한 명이 생각난 것이다. 진팔의 입장에서는 잊고만 싶은 악몽 속의 인물.

“호, 혹시……?”

하지만 진팔은 채 말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악몽 속의 고수가 비록 사파의 인물치고는 조금은 파격적이다 싶은 무공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비급 속의 을과 같이 도가의 내용에 해박하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기지 않는다’가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다’가 보다 정확한 말일 것이다.

진팔이 본 비급 속의 을은 마치 신선과도 같이 고아하고 세상사에 달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진팔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그 인물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진팔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거칠게 가로 저었다.

“마, 말도 안 돼! 설마 그 악독하고 흉악한 놈이 어떻게 을과 같이 도교에 정통한 고아한 인물이 될 수 있겠어!”

그런 진팔의 모습에 패력검제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 걸세. 그는 지금 마교 교주니까 말일세.”

“뭐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경악으로 인해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한 진팔을 향해 패력검제는 아주 오래전 제령문을 휩쓸었던 혈겁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그렇다면 여기에 현경(玄境), 아니 탈마(脫魔)의 심득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호들갑스러운 진팔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휘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인물이 묵향이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닐세. 사부님을 꺾은 그였기에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부조차도 그가 현경과 동급인 탈마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노부가 이 비급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그 당시 그가 탈마가 아닌 극마(極魔)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말을 듣던 진팔이 약간 실망스러운 듯 물었다.

“에? 그렇다면 그가 이룬 경지가 세인들이 말하듯 탈마가 아닌 극마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현경급에 도달했다는 전설적 고수들 중 묵향의 심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던 진팔은 극마라는 패력검제의 말에 왠지 김이 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패력검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진팔을 노려보았다.

“허, 이런 광오한 놈이 있나! 감히 탈마의 심득이 아니라는 말에 그따위 표정을 짓다니!”

진팔은 패력검제의 반응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지금의 그자는 아직도 극마의 경지란 말씀이십니까?”

처참하게 깨졌던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패력검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닐세. 노부는 요 근래에 그와 직접 싸워 본 다음에야 깨달았다네. 그는 지금 탈마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말이야.”

말을 하던 패력검제는 허탈한 표정으로 비급을 바라보았다. 강호를 오시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왠지 몇십 년은 폭삭 늙어 버린 것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패력검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 보게나. 사부님께서 그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셨지만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패왕검이 반 토막이 되었다네. 나중에 살펴보니 날까지도 많이 상했더군. 물론, 그가 무기를 썼다면 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걸세. 그가 지닌 화룡도는 마교 교주의 신물이자 중원 10대 기병 중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신도(神刀)니 말이야. 하지만 그는 노부와 싸울 때 적수공권이었네.”

적수공권이라면 아무런 무기 없이 싸웠다는 말이 아닌가. 진팔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패력검제를 바라보았다.

“예? 그, 그럴 수가…….”

“그는 노부와 싸우면서 도를 뽑을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거겠지. 처음에는 노부의 실력이 사부님만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네. 그는 사부님과 대결했을 때까지만 해도 극마였지만 지금은 탈마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겠지. 그렇기에 이 비급이 보물이라는 걸세. 노부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직접 검을 겨뤄 본 패력검제였기에 묵향의 경지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팔은 패력검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느 정도는…….”

화경의 고수가 자신의 심득을 적어 놓은 비급은 무공을 익히는 무인으로서는 꿈에서라도 보기를 원할 정도로 귀한 보물이다. 몇몇 문파에 그런 비급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누가 자파의 보물을 아무에게나 보여 주겠는가. 당연히 문파 내 가장 깊숙한 곳에 비장해 두고, 그 문파의 장문인 정도가 보며 깨우침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팔이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력검제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쯧쯧, 표정을 보니 자네는 아직 이 비급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군.”

“예? 화경급 고수의 심득이 적힌 비급이라면서요. 저도 그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노부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닐세. 내가 왜 마교 교주를 언급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는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고 했네. 화경이라는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는 거지. 하나의 심득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연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 비급에는 화경에 이르는 심득이 두 가지나 기록되어 있단 말일세. 그것도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말이야.”

패력검제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는지 진팔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두 가지의 길이라구요?”

“그렇지. 예전에 사부님께서는 제자인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의 심득을 들려주셨거든. 바로 화경의 경지를 말이야. 하지만 그분께서 하신 말씀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네. 너무나도 깊은 도가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알아듣는 것조차 힘들었지. 하지만 비급에 쓰인 그의 심득은 완전히 달랐어.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깨우침을 얻으려 했던 노부에게는 완전히 충격적이었던 무리(武理)였지. 하지만 꾸준히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을 읽다 보니 ‘아하, 이 말이 바로 그런 것이구나’하고 알 수 있겠더군.”

패력검제는 오랜 세월 비급을 연구하여 겨우 화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화경급이라 생각해 묵향에게 과감히 검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생각과는 달리 허무하리만치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지만.

자신의 말을 열심히 듣는 진팔에게 패력검제가 물었다.

“이제 노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제야 진팔은 제령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이 비급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기야 패력검제의 말대로라면 이건 제령문이 아니라 무림 최고의 보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진팔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런 귀한 비급을 왜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보여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런데 어떻게 이런 보물을 저에게……?”

“왜냐하면, 자네가 노부의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자네는 이 비급에 나와 있는 교주와 인연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 노부는 마교 교주를 만난 뒤 많은 것을 깨달았네. 하여튼 노부는 자네가 이것을 읽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결정했다네.”

사실, 마교 교주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패력검제에게 묵향과의 싸움에서 패한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하다는 감정보다 또 다른 무(武)의 경지를 엿봤다는 놀라움이었다. 묵향과의 일전 이후, 그의 뇌리 속에는 좀 더 높은 무공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만이 가득했다. 문파를 키운다거나 사부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그에게 있어 이제 하찮은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다 과거 묵향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진팔을 만나자 패력검제는 왠지 반가웠다.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무의 극점을 향해 걸어가는 동료 무인으로서 묵향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동안 진팔의 성품이나 자질을 시험해 보니 성격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 무공에 대한 이해나 그의 자질은 가히 발군이었다. 그래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비급을 진팔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문파나 혈연 따위를 따지기보다 먼저 무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선배로서, 진팔에게 작으나마 화경이라는 무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그건 너무…, 마교 교주가 한때의 변덕으로 심법을 제게 전해 줬다고 그렇게 생각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자네는 그것을 한때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반론에 진팔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반론을 제기하기에는 패력검제의 말투가 너무나도 진중했기 때문이다.

“만약 심법 하나만 알려 줬었다면 노부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사실 태허무령심법이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해. 하지만 초기에 연성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최대의 약점을 안고 있네. 그 때문에 현문에서조차 아무도 익히지 않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그렇기에 인심 쓰는 척하면서 태허무령심법을 알려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한 번 익히기 시작하면 극악하리만큼 연성 속도가 느린 데다가 다른 심법을 쓰면 모든 게 허사가 되니,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다면 골탕 먹이기에 최적의 심법이 아니겠는가.”

“그, 그렇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군요.”

“하지만 자네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 벌써 대성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예에?”

진팔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허무령심법을 열심히 수련하고는 있지만 대성의 경지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허허, 아직 몰랐나 보군. 그렇기에 그가 장난삼아 자네에게 태허무령심법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세. 뭔가 그가 알고 있는 비장의 수법을 써서 심법을 대성할 수 있도록 손을 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게지.”

“비장의 수법이요? 그냥 지독한 고문만 당했을 뿐인데요.”

고문이라는 말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도에 강한 자극을 주어 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떠올려보던 패력검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태허무령심법의 경우는 그런 방법으로도 내력 증대의 효과가 아주 큰 모양이군. 잘 연구해서 다음에 손자가 태어나면 써먹어 봐야겠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패력검제의 모습을 보며 진팔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과거 묵향에게 당했던 그 혹독한 고문이 떠오른 탓이다.

“저…, 이런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아마 후회하실지도…….”

하지만 그걸 당해 본 적이 없는 패력검제에게 진팔의 조언이 먹혀들 리 없었다. 패력검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건 방법을 찾아낸 후에 결정할 일이고……. 어찌 되었건, 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보통 사람보다 최소한 두 배 정도 빨리 내력을 쌓았다고 봐야 할 걸세. 자네가 설사 하늘이 내린 무골이라도 이토록 빨리 쌓을 수는 없네. 왜냐하면 내공은 그런 것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노부는 그가 자네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였고, 또 은혜를 베풀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거라네. 알겠나?”

“그, 그런가요?”

패력검제의 말을 들은 진팔은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난을 그의 탓이라 여기며 살아왔거늘, 자신에게 엄청난 기연을 안겨 준 은인이라 말하니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패력검제의 말이 이해는 갔지만, 그렇다고 가슴 깊숙이 쌓아 두었던 묵향에 대한 원망을 한순간에 없앨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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