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당한 화산 장문인
무림맹의 행동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을 구축하고 있는 구심점들 중의 하나인 화산파의 장문인이 변절을 한 것이다. 어지간한 인물이 변절을 했다면 이토록 소란을 떨 이유가 없겠지만, 화경의 고수이자 화산파 장문인이 그 대상이다 보니 얼마나 많은 변절자가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무림맹이 동원한 고수들의 수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은 혹시 그것이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에 대비하여 화산파와 연합한 일종의 훈련을 한다는 명목 하에 출동 명령을 내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화산을 포위한 마교도들이 공격을 가해 온다는 가정 하에 각 장로들이 고수들을 거느리고 중요 지점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일단 포진이 완료되고 나서 살짝 방향만 돌리면 화산파에 대한 완벽한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이다.
“매화문검 장로님, 모든 장로님이 목표 지점에 도착하여 포진을 완료하셨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옥진호 장로는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모든 장로 중에서 옥진호 장로가 맡은 임무가 가장 중요했다. 그가 직접 화산에 올라 장문인의 변심 여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하여 화산파 전체가 변절했다 여겨지면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부터 무림맹은 화산파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옥진호 장로는 호위 무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였기에 산길을 오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멈추거라!”
화산의 문도들이 몇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곳에서 침입자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는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옥진호 장로는 품속에서 무림맹을 표시하는 신물을 꺼내어 보이며 외쳤다.
“무림맹에서 왔다네. 장로님들을 뵙고 의논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지. 기별을 넣어 주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명이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경공을 전개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무림맹에서 누군가가 찾아왔음을 통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산 위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려 와서 정중히 인사한 후 입을 열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무림맹에서 지체 높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수하의 보고를 받은 화산파의 장로들은 정문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은 무림맹에서 파견된 사람이 옥진호 장로 같은 거물이라는 것에 다소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단 저마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허어, 무림맹에서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하길래 누군가 했더니 매화문검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멀리까지 왕림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로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백화(白和) 장로가 권했지만, 옥진호 장로는 정중히 사양했다.
“장문인은 나중에 뵙기로 하지요. 노부는 일곱 분 장로님과 비밀리에 의논을 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으시겠소?”
그 말에 백화 장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무림맹은 정파의 으뜸이다. 그렇기에 무림맹 장로의 말은 대단한 권위와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허, 결례이기는 하지만 매화문검 장로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화 장로는 옥진호 장로를 사위가 활짝 트인 정자로 안내했다. 장로들이 가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성된 이곳은 일반 제자들이 감히 얼씬할 생각도 하지 못해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백화 장로는 밀담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옥진호 장로는 주위를 세심히 훑어보며 혹여 엿듣는 자가 없는지 살펴본 후,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소상하게 화산파의 장로들에게 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산파의 장로들은 옥진호 장로의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란 말인가. 모두들 옥진호 장로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때 장로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낮은 석진(石瑨) 장로가 뭔가 짚이는 일이 있는지 옥진호 장로에게 급히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게 9일 전 저녁 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옥진호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맞소이다. 본맹의 매화검과 귀파의 능비화 소저가 그날 저녁 객잔에서 마교 교주와 화산 장문인이 밀담을 나누기 위해 만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자파의 능비화도 봤다는 말에 화산파 장로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명을 썼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제일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셋째인 공천(孔闡) 장로였다.
“사형들, 기억하실 테죠. 9일 전이라면 의문의 침입자가 들어온 바로 그날입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흠, 그러고 보니 그날 장문인의 거처가 완전히 박살이 났었지. 그런데 장문인이 그 침입자와 함께 어딘가로 외출을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그자가 바로 마교 교주라는 말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사형. 저는 장문인이 자신의 거처가 박살 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그냥 묻어 버리려 했던 그 태도가 뭔가 미심쩍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가 흘러나왔을 때, 백화 장로가 손을 들어 더 이상의 말들을 끊었다. 지금은 자파의 인물들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흠, 그 얘기는 나중에 우리들끼리 따로 하세나.”
그 말에 모든 장로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일은 문외의 인물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주제로 삼을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화산 장문인이 마교와 결탁했다는 전무후무한 추문이 외부에 퍼질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 일을 알려 주시려고 이렇게 친히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화문검 장로님.”
“무슨 말씀을. 그런데 일이 고약하게 됐소이다. 덮어 놓고 대 화산파의 장문인을 조사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조사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서 노부는 그것을 화산파에게 맡기기 위해 찾아뵌 것이외다.”
“그렇게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물론, 이 일에 대해 본맹이 이해할 만한 확답을 장로들께서 내주시지 못하시면 어쩔 수 없이 본맹이 나설 수밖에 없소이다. 노부는 그걸 전하려고 왔지요.”
그 말에 장로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림맹이 나서다니요?”
“상대는 화경의 고수가 아니겠소이까? 지금 본맹의 최정예 무사 2천이 화산파 전체를 포위하고 있소이다. 물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을 거느리고 온 것이기는 하지만, 될 수 있다면 그들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소. 지금은 본맹의 장로급 이상만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을 동원한다면 비밀을 유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외다.”
그 말에 장로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맹이 정예 무사 2천을 동원할 정도라면 최악의 경우 화산파 전체와도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백화 장로는 표정을 굳히며 대꾸했다.
“마, 말미를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들이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물론이오. 노부도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부의 입장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사실, 각본대로라면 옥진호 장로가 현천검제를 직접 만나 문책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만약 그러다가 그가 진짜 마교의 간세라면? 옥진호 장로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그가 현천검제를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화산파 장문인들을 슬쩍 불러내어 알아서 처리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로 인해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고…….
현천검제는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그런 만큼 문의 대소사는 전부 그의 귀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번처럼 무림맹에서 거물급 인사가 찾아왔다면 당연히 그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현천검제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즐기다가 장로들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는 이미 문도들을 통해 무림맹에서 옥진호 장로가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장문인을 만나기에 앞서 화산의 장로들과 뭔가 회담할 것이 있다고 하여 조용한 장소로 안내되었다는 것 또한 이미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명상을 즐기며 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천검제는 마당을 쓸고 있던 동자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장로님들이 오시니 차를 준비하거라.”
“예.”
동자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들 오시오. 그래, 매화문검 장로는 만나 보셨소?”
“물론입니다, 장문인.”
맏이인 백화 장로는 한동안 난처한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냥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부들이 장문인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해 보구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곤란했다. 이번 일의 경우 화산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철저한 비밀이 요구되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는 곤란하고, 잠시 조용한 곳으로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지요.”
현천검제는 차를 준비하고 있는 동자에게 말했다.
“내 밖에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너는 방을 잘 치워 놓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예.”
“자, 가십시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백화 장로는 이곳까지 와서도 뭔가 말하기가 곤란한 듯 한참을 망설인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본문에서 난동을 부린 자가 마교의 교주라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백화 장로의 물음에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현천검제의 가슴은 충격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옆에서 또 다른 장로도 거들었다.
“장문인, 이건 화산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꼭 답을 들려주셔야겠습니다.”
현천검제는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진 것.
“그가 마교의 교주인 것은 맞소.”
장로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놈이 뭣 때문에 장문인을 찾아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장로들이 알기 전에 미리 말을 꺼냈으면 좋았을걸, 하며 후회를 하는 현천검제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무림맹에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현천검제였다.
“얼마 전에 사로잡은 사파의 무리를 석방하고, 그들이 그곳에 장원을 건설하는 것을 묵인해 달라는 것이었소. 사실 그곳은 본문의 세력권이라고는 하나 아주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자리한 곳이니 노부도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소.”
“정말이십니까?”
“왜 노부가 여러 장로 분들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이때 셋째인 공천 장로가 화가 난 어조로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전대 장문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인덕이 뛰어난 사람이 대사형인 백화라면, 가장 검술이 뛰어난 사람이 바로 공천이었다. 뛰어난 자질과 무공을 인정받고 있었던 그는 당연히 다음 대 장문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 대 장문인을 지목하는 자리에서 장문인이 의외의 인물을 지목한 것이다. 백화 대사형도 아니고, 자신도 아닌 의외의 인물을 말이다. 만약 장문인으로 백화 대사형이 지목되었다면 공천도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의 직계도 아니었던 현천검제가 지목되었으니 공천으로서는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그의 가슴에는 전 장문인이 뭔가에 홀려 후임자를 잘못 지목했을 거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온 것이다. 현천검제를 뭉개 버릴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공천은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사형들, 저건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마교 교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립니다!”
“셋째는 가만히 있게나. 이보시오, 장문인. 정말 그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물론 몇 가지 더 있었소.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것까지 장로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공천 장로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그건 다른 장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화 장로는 대화를 나누기가 너무 시끄러워지자 손을 휘둘러 장로들을 조용히 시킨 후, 현천검제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장문인께서는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장문인이 하신 그 말이 그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그것 외에 교주와 무슨 말을 주고받으셨습니까?”
백화 장로가 장문인을 의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교 교주가 왜 화산파에 은밀히 와 장문인을 만난단 말인가. 아무리 그가 무서운 고수라고 해도 장문인이 거처하고 있는 곳은 화산파 내에서도 최고 중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을 혼자 말이다.
더군다나 뭔가 다른 일들이 있는 듯한데 말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현천검제의 모습에서 백화 장로의 의심은 점점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오히려 현천검제였다. 아니, 답답하기보다 오히려 섭섭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여태껏 수십 년을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의심으로 가득 찬 신문을 받아야만 하다니…….
현천검제는 자신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교와 내통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은 자랑스런 대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분명 야심한 밤에 마교 교주가 자신을 찾아와 잠시 얘기를 나누기는 했기에 이러는 것이라는 건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추궁을 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현천검제가 객잔에서 교주와 주고받은 대화는 거의가 사형제로서의 대화였다. 자신이 깨달은 무공의 심득(心得)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주로 주고받은 것은 대부분 사부와의 추억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마교와의 내통하고는 한참 먼 얘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 현천검제였다.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데, 만약 교주와 자신이 사형제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잠시 복잡한 심기를 억누르던 현천검제는 매서운 눈초리로 장로들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그의 심사를 말해 주듯 그의 말투는 당연히 차갑고도 거칠었다.
“지금 노부를 신문하고 있는 것이오?”
현천검제가 정공법으로 나오자, 장로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오. 수십 년 동안 오직 대 화산파의 중흥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노부요. 그런데 겨우 마교 교주와 한 번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노부를 이렇듯 핍박하실 수 있단 말이오? 더군다나 마교와 내통했다는 말씀까지 하시다니요.”
두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현천검제의 말투는 마치 피를 토하듯 비통하기만 했다. 백화 장로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변명하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저희들이 장문인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장문인께서 혐의를 벗을 수 있도록 저희들을 도와 달라고 말입니다. 마교 교주가 겨우 그런 부탁을 하러 이곳까지 직접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진짜로 그와 주고받은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알려 주시면 저희들도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허허,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그가 한 얘기는 그것이 전부였소. 더 이상은 말할 것이 없으니 노부는 이만 가 보겠소.”
현천검제가 가 버린 후, 장로들은 그 자리에 남아 뒷일의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백화 장로는 좀 전의 비통에 찬 장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의 말에 거짓은 없는 듯하니, 이걸로 사건을 일단락 짓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자 무슨 말이냐는 듯 공천 장로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얼마나 흥분했는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사형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들도 그 말을 납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무림맹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주위에 무림맹 무사들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그 말에 동조하듯 백화 장로를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은 회의 어린 시선으로 장문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공천 장로는 더욱 힘이 나는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만약 장문인이 말한 대로라면 왜 두 사람이 객잔까지 가서 술을 마시며 담소를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까짓 사파의 조무래기들을 구하기 위해 마교 교주가 혼자 본문에 찾아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설혹 그렇다 치더라도 두 사람이 객잔까지 찾아가 술을 마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허긴 제자를 불러 접대를 하면 그만인 일이거늘…….”
장로 중 한 명이 자신의 말에 호응을 하자 공천은 지금까지 장문인에게 품고 있던 의심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사형들께서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들은 모두 화산파 내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들로 전대 장문인께 직접 검을 사사했습니다. 그런 저희들보다 그의 무공이 높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사실, 건식 사숙께서 가르치신 제자들이 모두 다 무공이 높다면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공천 장로의 말에 모든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로서도 지금까지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지금의 현천검제가 다음 대 장문인으로 지목되었을 때, 화산파는 발칵 뒤집혔었다. 장문인의 직계가 아닌 제자가 다음 대 장문인으로 지목받은 적은 화산파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장로와 수뇌부가 반대를 했지만 전대 장문인의 뜻은 완고했다.
무엇보다 현천검제가 장문인직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들보다 월등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갑작스럽게 무공이 급증한 현천검제를 두고 수많은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장로들은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공천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쓰는 독특한 검술, 소제는 그게 마교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마교의 무공에 깊이 있는 본문의 내공 심법과 검술이 만나 그의 경지가 그토록 높아졌다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어디서 그토록 강한 검술을 배웠겠습니까?”
공천 장로의 말에 몇몇 장로가 동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소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문인의 독문검법은 정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무조건 상대를 격살하기 위한 마도에 가까운 검법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모두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공천 장로는 쐐기를 박듯 현 화산파의 상황을 들고 나왔다.
“저희들은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의를 위해 싸워 왔던 대 화산파의 역사에 일대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천 장로의 말에 백화 장로는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문제로군. 화산파의 선령들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지혜를 주셨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