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동은 화산의 중턱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문규를 어지럽힌 제자가 있다면 이곳에서 며칠 혹은 몇 달 홀로 참회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곤 했다. 물론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문도는 거의 없었기에 참회동은 언제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지금 참회동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이곳으로 참회하러 온 문도들이 그랬듯 동굴 밖으로 슬그머니 나와 검법 수련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냥 동굴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참회동은 얕은 동굴이었기에 낮이라면 조금 어둡기는 해도 앞을 보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약한 빛에 의지해 현천검제는 손목의 힘줄이 잘려 쓸모없이 덜렁거리는 살덩어리로 변한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쿨럭! 이것이 내 손이란 말인가?”
게다가 발은 또 어떤가. 발목의 힘줄을 잘라 버려 아예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다.
“아아, 너무나도 허무하구나. 소위 명문 정파라고 말하는 것들이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렇게 악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혹 철천지원수라도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는 못할 텐데 말이야. 후∼, 그때 그냥 도망을 쳤으면…….”
거기까지 말한 현천검제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화산의 장문인이었던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들이 악독하게 굴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몇몇 짐승 같은 놈들이 한 짓이지 화산파가 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오는지 한참 동안 현천검제는 격렬하게 기침을 해 댔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손에는 시커멓게 죽은피가 한 움큼이나 뱉어져 있었다. 단전이 파괴될 때 입은 내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꼴을 하고 더 이상 살면 무엇 하리.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사부님들을 욕보이지 않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시커먼 핏물 사이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패기가 넘치는 사내. 그리 잘생긴 얼굴이 아님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진정한 사내란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던 사내. 어느덧 현천검제의 두 눈가에는 축축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현천검제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허허헛, 그러고 보니 사형이 보고 싶구나. 서로가 가는 길이 달랐음에도 그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진심이었지.”
물론이었다. 현천검제가 생각해도 묵향 사형의 행동에는 가식이 없었다. 사실 그처럼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고, 또 막강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만약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이 있다면 그냥 목을 따 버리든지, 그것도 귀찮으면 안 보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삶 전체가 허무한 것은 아니로군. 훌륭하신 두 분의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멋진 사형이 있으니 말이야.”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현천검제의 모습을 한동안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로 공천 장로였다. 공천 장로는 자신이 어제 가져다 놓은 밥덩이의 표면이 바짝 말라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자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흥! 죽고 싶은 모양이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도와줄 수 있겠지만 대사형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니 말이야. 제길,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잘라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지. 뭐, 좋아. 네놈이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한껏 비비 꼬여 있는 상대의 말투에 울컥한 현천검제는 분노를 터뜨렸다.
“공천 장로! 노부가 그대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었거늘, 나한테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뭣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없이 많은 동문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준 것을 네놈은 벌써 잊었단 말이냐?”
“노부가 언제 그대를 망신 줬다는 말이냐?”
“크흐흐흣,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도 아닌 놈이 직계 제자를 능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되고도 남음이 있다. 사부님의 제자들 중에서 노부가 가장 실력이 뛰어났어. 대사형이 있었지만, 무공만은 내가 제일 나았기에 장문인직도 꿈이 아니었지. 그런데 버러지 같은 네놈이…, 네놈이 내 꿈을 모두 망쳐놓았단 말이닷!”
공천 장로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노기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의 생신 때 있었던 검술 시합에서 당한 치욕적인 패배를 내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네놈의 실력이 그 정도쯤 되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을 거다. 하지만 네놈은 내가 너를 봐준다고 살살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서 급습을 가해 왔지. 결과는 강한 상대를 깔보다가 오히려 손도 못 써 보고 패배한 것으로 사부님께선 이해하셨지. 젠장, 그때부터 나는 사부님의 눈 밖에 나 버렸단 말이다. 그게 다 너 때문이야. 알아?”
“승패(勝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느니, 고작 비무에 한 번 패했다고 노부에게 악심을 품었다는 말인가?”
현천검제의 말에 공천은 입에 거품을 물 듯 악을 써 댔다.
“고작 그거라고? 네놈은 나를 어쩌다가 한 번 패했다고 상대를 질투하는 그런 한심한 놈인 줄 아느냐? 겨우 한두 번의 패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상대보다 더욱 열심히 검을 갈고닦으면 언젠가는 상대를 초월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어. 왜냐구? 그건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같은 조건이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너만 어디서 엄청난 검술을 배웠지 않느냐. 나도 그 검술을 배웠다면 네놈한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 내가 장문인이 되었다면 너보다도 더 화산파를 잘 이끌어 나갈 능력도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왜 네놈이 그 모든 것을 다 차지했느냔 말이다.”
한동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공천 장로는 이윽고 냉정을 회복했는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좋다, 앞으로 네놈에게는 물만 주겠다. 밥을 얻어먹고 싶다면 네가 배운 그 검술을 나한테 가르쳐 줘야 할 거다. 크흐흐흣, 만약 그걸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물만 처먹다가 뒈지게 될 테니 말이야.”
공천 장로는 물병을 새것으로 갈아 준 다음, 밥덩이는 현천검제에게 주지 않고 약이라도 올리듯 천천히 발로 짓이겼다.
두 덩이의 밥을 모두 짓이겨 버린 공천 장로는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현천검제를 노려보더니 돌아가 버렸다.
공천 장로가 돌아간 후, 현천검제는 천천히 기어서 지금까지 먹지 않아 바짝 말라비틀어진 밥덩이 네 개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발목의 힘줄이 잘려나간 그의 몸으로는 도저히 걸어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누가 오래 버티는지 두고 보자.”
현천검제는 밥덩이 하나를 쓸모없어진 손으로 간신히 집어 올린 후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게 섯거라!”
묵향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속세를 저버린 것 같은 아름다운 용모. 저쪽에 머리띠와 목도리로 자신의 용모를 숨기고 있는 놈이 저 꼴이 되기 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노부를 불렀는가?”
“지금 여기에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확실히 인적이 드문 곳이라 이곳에는 묵향과 묵향을 뒤쫓아 온 패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 그래? 그렇다면 노부를 찾은 이유는?”
“물론…….”
네놈과 비무를 하기 위해서, 아니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리 봐도 뭔가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미서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무방비 상태인 듯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일격을 가하기에 마땅한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허∼참! 저런 놈을 향해서 검을 뽑아 들었다고? 안 죽이고 저 정도로 그친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이 봐준 거였군.’
“자네가 노부의 못난 제자 놈을 손봐 주었는가?”
묵향은 피식 미소 지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워낙 대가리가 단단한 놈이라 아집에서 좀 헤어 나오라고 손 좀 봐 줬지.”
미서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집에서 헤어 나오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검의 소리 운운하기에 그 다음 단계를 일러 줬을 뿐이야. 물론 씨알도 안 먹히기에 화가 나서 그만…, 조금 손 좀 봐 준다고 했던 게 저 모양이 되어 버렸지만.”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묵향을 세워 놓고는 냉파천에게로 다가가 전후 사정과 상대가 격투 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물어봤다. 과연 제자 놈의 말을 들으니 상대가 한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쫓아올 이유가 없었지 않았느냐?”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한 제자 놈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며 분노를 희석한 그는 다시 묵향에게로 돌아왔다.
‘꽤 괜찮은 놈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향을 바라보고 있던 미서생은 문득 입을 열었다.
“나하고 술이나 한잔하겠나?”
갑자기 웬 술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묵향은 쪼잔하게 그런 거 따질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술이라면 환장하는 그였기에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이유가 없었다.
“술? 거 좋지.”
갑자기 술 얘기가 나오자 미서생을 따라온 제자들은 도무지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 입을 헤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빨리 돗자리를 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그제야 제자들은 사부의 의도를 짐작한 듯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당인 사부를 위해 언제나 술 몇 병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그들이었기에 술자리는 금방 마련이 되었다.
안주는 없었지만 술만은 최고급이었다. 마개를 따자 향긋한 주향이 묵향이 앉아 있는 곳까지 전해져 왔다.
“좋은 술이로군.”
“물론이지. 나는 언제나 가장 좋은 술만을 마신다네. 자 한잔 들게나.”
커다란 찻잔 가득 술을 따라 주는 미서생. 묵향은 서슴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혹시라도 술 안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미서생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호오, 화통하게도 마시는구먼. 간뎅이가 작은 놈들은 이런 술을 마실 자격이 없지만, 자네는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는군. 자, 한 잔 더 하게.”
향은 아주 좋았지만 엄청나게 독한 술이었다. 그런데 둘은 그 독한 술을 대화도 없이 쉬지 않고 들이켜고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제자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사부의 속셈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술이 몇 병 단위로 비워지자 그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부는 놈을 취하게 하여 빈틈을 만들려고 하시는 모양이군. 확실히 능구렁이 영감이란 말씀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는지 미서생은 묵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자네 노부의 탄주(彈奏)를 한번 들어 볼 텐가? 술자리에 안주는 없어도 되지만, 음악이 없어서야 안 되지.”
미서생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지. 하지만 엉터리 탄주라면 사양하고 싶군. 괜히 이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미서생의 입에서 묵향을 만난 후 처음으로 활달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 물론 엉터리 탄주라면 자네에게 권하지도 않았을 걸세.”
미서생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퉁이를 주섬주섬 풀어 고색창연한 금(琴)을 꺼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제자들은 손에 땀을 쥐어야만 했다. 사부가 애용하는 저 금에는 혈영비(血影匕)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혈영비는 저 옛날 오왕 료를 암살하는 데 물고기의 뱃속에 숨겨 들어가 살해했다고 해서 어장검(魚腸劍)으로도 불리는 전설적인 비수였다. 손잡이의 길이 3촌을 합하여 모두 5촌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비수였지만,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최고의 기습 병기였다. 그렇기에 세인들은 그 짧은 비수를 10대 기병의 여덟 번째로 꼽고 있었다.
과연 언제 혈영비가 그 살인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애간장이 타 들어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서생의 탄주가 시작되었다.
미서생의 탄금 솜씨는 정말이지 뛰어났다. 탄주를 하기에 앞서 큰소리를 칠 만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치듯, 때로는 나비가 꽃을 희롱하듯 흘러나오는 그의 가락은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침내 한 곡이 끝나자 묵향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 탄주가 안주라면 술이 더 있어야겠소.”
이 말이 미서생을 매우 기쁘게 했는지, 그는 제자들에게 호령하여 숨겨 놓은 모든 술을 다 꺼내 놓게 하였다. 제자들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져 꺼내 놓은 술은 모두 다섯 병. 술병은 다시 빠른 속도로 비워지기 시작했다.
“내 탄주를 한번 들어 보겠소?”
묵향의 말에 미서생은 놀란 듯했다.
“호오, 놀랍군. 노부의 탄주를 들은 자들은 감히 내 앞에서 탄주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 역시 배포가 다르군. 좋아, 여기 있네.”
미서생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자신이 들고 있던 금을 묵향에게 넘겼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부는 지금 이곳에 뭐 하러 온 것인지 그 목적을 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사부가 애용하는 금은 뛰어난 장인이 만든 최고의 명기였다. 제자들에게조차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금을 저놈에게 그냥 선선히 넘겨 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부 외에 이토록 뛰어나게 금을 탄주할 수 있는 인물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음을 표현해 내는 세부적인 기교는 사부에게 떨어질지 몰라도, 그 힘이 넘치는 탄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힘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게 해 주었다.
탄주를 들은 후, 미서생의 말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묵향을 대하는 말투도 한 단계 격상되었다. 더불어 상대가 속한 단체도 ‘마교(魔敎)’가 아닌 ‘천마신교(天摩神敎)’로 격상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구려. 내 천마신교에 이토록 뛰어난 음의 대가가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소이다. 역시, 사람의 선입관이라는 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는구려.”
“과찬이오.”
“노부의 이름은 석량(席亮)이라고 하오. 강호의 동도들은 노부를 만통음제(萬通音帝)라고 부르지요.”
기껏 무게를 잡고 자신을 소개했건만, 상대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표정을 보면 말투와 달리 그렇게 크게 놀라는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호오, 귀하가 만통음제셨소?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금의 대가 앞에서 멋모르고 탄주를 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었구먼. 쩝, 어찌 되었건 탄주는 이미 해 버렸으니 어쩌겠소.”
만통음제라면 ‘음공(音攻)’의 고수였다. 그런 만통음제에게 상대가 금의 대가라고 칭한 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음공이라는 것은 그 기본 원리를 알고 있는 내공의 고수라면 누구나 시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전자의 무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살상력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기를 아주 잘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만통음제처럼 금을 잘 다루는 사람에게는 음공의 고수라는 말보다 금의 대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하핫, 겸손하기도 하시구려. 그대의 금 솜씨도 나 못지않게 뛰어나오. 특히 금음에 섞여 흘러나오는 내공의 조화는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었소. 살생만을 위해서 금을 익힌 자는 그렇게 세밀한 내공의 조절을 할 이유도 없고, 또 그런 기법을 익힐 필요도 없지요. 그대는 정말로 금을 사랑하시는 모양이구려. 내 오늘 잃어버렸던 지기(知己)를 다시 만난 듯하여 너무나도 기쁘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소이까?”
“묵향이라고 하오.”
묵향은 이름을 밝혔지만 만통음제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고 뒷말을 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매우 재미있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명호를 아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세인들은 노부를 암흑마제라고 부르지요.”
순간,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흑마제라니……. 바로 마교의 교주를 칭하는 명호가 아닌가. 온갖 나쁜 말을 다 붙여도 오히려 뭔가 부족한 듯한 그런 놈. 그런 악질적인 놈을 일컫는 명호였다. 모두들 그 말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통음제만은 곧 냉정을 회복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악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크하하핫! 노부도 암흑마제에 얽힌 기괴한 소문은 들어 보았소. 하지만 그대의 탄주를 듣고 그것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겠소이다. 마음이 메마른 악독한 자라면 결코 그대와 같은 탄주를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오.”
만통음제는 묵향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나하고 술이라도 한잔 더 하지 않으시겠소? 천마신교의 교주처럼 높으신 분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소. 하지만 내 오늘 이토록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났으니 그대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술잔을 나누고 싶어서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시구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그제야 묵향의 퉁명스럽던 어조도 한층 누그러져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그럽시다. 나도 오랜만에 음악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자, 가시지요.”
멀어지는 스승과 마교 교주의 뒷모습을 보며 남은 제자들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스승께서 정사 중간쯤의 성향을 가지신 분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마교 교주와 친구를 하자고 드신다면 도대체 어쩌시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 대사형, 아무래도 복수는 물 건너 간 것 같네요.”
“지금 복수가 문제냐?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부님께서 마교 교주하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게 생겼는데. 젠장! 빨리 쫓아가서 사부님을 말려야겠다.”
다급히 뒤따라가려는 냉파천을 붙잡으며 설취가 입을 열었다.
“그만 두시죠. 괜히 이마에 혹 하나 더 붙이시지 마시구요.”
“이런 젠장! 처음부터 복수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