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7화 (433/930)

그 길로 술집에 가서 의기투합해 버린 묵향과 만통음제. 둘은 냉파천의 우려대로 아예 의형제까지 맺어 버렸다. 물론 뒤쫓아 온 제자들이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뜻을 굽힐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앞장서서 만류하던 냉파천의 머리빡에 혹이 몇 덩이 더 생겼을 뿐이다.

묵향이 인근 호북성에 건설 중인 호북분타를 둘러보기 위해 가야 한다고 하자, 만통음제는 묵향을 따라나섰다. 화경의 고수인 그에게 남아도는 시간은 주체를 할 수 없는 것.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벗을 만났는데, 호북성에 함께 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부가 마교 교주와 함께 가는데, 그것을 그냥 놔둘 제자들도 아니었다. 혹여나 이 악독한 마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그들도 사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일행 전체가 묵향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식사 후 금을 꺼내는 사부를 잠시 바라보던 냉파천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때, 뒤에서 들려온 사부의 목소리.

“어디에 가는 게냐?”

“아, 예. 잠시 뒷간에 좀…….”

그런 다음 그는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젠장,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사부께서 계시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마교 놈과 한자리에 어울려야 하다니…….”

냉파천이 뒷간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자네 생각이 어찌 그리 본좌의 생각하고 같은지 모르겠군.”

“허억!”

냉파천이 황급히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묵향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냉파천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만통음제와 동행을 하면서 묵향의 심사는 별로 좋지를 못했다. 사실 음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만통음제와의 시간은 너무도 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 뒤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째려보는 냉파천 때문에 흥이 깨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이야 참았지만 아무래도 버릇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냉파천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이다. 당연히 묵향의 말투가 부드러울 수 없었다.

“너 말이야. 본좌가 네놈이 좋아서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아? 짜식이 어디 본좌 앞에서 계속 인상을 구기고 있어.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응? 어디 한번 죽어 볼래?”

순간 묵향의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냉파천의 몸도 움직였다. 현경의 고수 앞에서 방어 동작을 본능적으로 행한 것은 그의 무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의 발로였다. 하지만 냉파천의 몸짓은 공허한 것이었다.

퍼버벅!

“끄어어억!”

복부를 거칠게 두들겨 맞은 냉파천은 뱃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 낼 수밖에 없었다. 숨이 끊길 정도로 아득한 고통에 냉파천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묵향은 냉파천이 토해 낸 토사물이 그의 몸에 묻지 않도록 머리끄뎅이를 붙잡아 뒷간 구멍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또다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묵향이 구타하고 있는 곳은 모두 다 옷으로 가려져서 밖으로 별 표시가 나지 않는 부위들뿐이었다.

“다음에 한 번만 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때는 알지? 이것들이 형님 얼굴을 봐서 본좌가 참고 넘어가 주고 있었더니, 주제 파악을 못해. 네 녀석은 본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냐? 계속 본좌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아예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알겠어?”

만통음제의 나이가 훨씬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묵향이 그를 형으로 대접한 것은 탄금에 대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형으로 대접한다고 해서 그 형의 제자 놈까지 자신의 제자로 대접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묵향이었다.

그걸 몰랐던 냉파천은 그날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뒷간 구멍 위에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채 방금 전에 위장 속에 채워 넣었던 것을 몽땅 다 토해 내야만 했다.

냉파천의 눈에서는 힘없는 자의 설움이 방울방울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흐흐흑, 어찌 이럴 수가…….”

뒷간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통했는지 그날 이후로 묵향을 향하는 냉파천의 대접은 아주 깍듯해졌다. 그 전에는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는데, 그 후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허어, 동생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기어코 매운 맛을 본 모양이구먼. 그렇다고 해서 동생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찌할꼬? 잠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자 놈이야 안 되면 나중에 한 놈 더 키워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내 음악을 이해해 줄 지기를 어디서 다시 찾는다는 말이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이겠군.’

아무리 자신이 음의 대가면 뭣 하겠는가. 듣고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건 혼자만의 광대 짓거리에 불과했다. 음을 타면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기쁨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묵향을 만난 만통음제는 요즘 너무나도 행복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묵향이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 사부의 속마음을 모르는 냉파천은 사부가 야속했을지 모르지만, 그도 만약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줄 벗을 만나게 된다면 사부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천일루에서의 합주

호북성에 도착하자 묵향은 그들을 객잔에 남겨 두고 혼자 호북분타에 다녀왔다. 물론 그들을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 때문에 건설 현장에 가는 것인데 구태여 그들을 데려갈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 후, 묵향은 서북쪽으로 길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만통음제의 물음에 묵향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화산에 가려 합니다.”

“호오, 화산에? 좋아, 화산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헤어지면 되겠구먼. 동생도 여러 가지로 바쁠 텐데 우형(愚兄)이 계속 따라다니며 방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밤마다 형님과 함께 달빛을 벗 삼아 합주를 하는 재미에 흠뻑 취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소제 너무나도 섭섭합니다.”

그 말이 만통음제를 매우 기쁘게 한 모양이다.

“그, 그렇지? 으하하핫! 역시 동생은 음이 뭔지를 안단 말씀이야. 역시 독주보다는 합주가 훨씬 좋은 것이지.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 줄 수 있으니 말일세.”

“물론입니다, 형님. 그건 그렇고 화아는 천일루(泉溢樓)에 가 봤느냐?”

묵향의 질문에 송화는 재빨리 대답했다. 무림에 첫발을 디디면 꼭 들러야 하는 몇 군데 명소 중 한 곳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어쩌면 그곳에 데려가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뇨, 갈 때는 하남성과 호북성을 거치는 길을 잡았고, 올 때는 좀 급하게 움직이느라…….”

물론 묵향한테 붙잡혀서 가게 되었으니 천일루에 들를 여유가 있었겠는가.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사과했다.

“하하핫, 미안하게 되었구나. 노부와 만나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곳에 들렀다 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때, 노부가 잠시 장난을…, 아니 착각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다 이해하거라.”

하지만 저게 이해해 달라는 사람의 눈빛인가?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했다가는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인간의 눈이지. 그 눈길을 마주한 설취는 찔끔해서 송화를 대신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숙님. 이렇게 된 것도 음을 좋아하시는 사부님께 사숙님을 만나게 해 주시려는 하늘의 뜻이었겠지요.”

묵향의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던 만통음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취아의 말이 옳구나. 이렇듯 동생을 만난 것도 음을 논할 친구를 얻게 해 주시려는 하늘의 뜻이었겠지.”

만통음제의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묵향은 빙긋 미소 지으며 송화에게 말했다.

“좋다. 노부가 화아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곳에 데려다 주지. 천일루에서 보이는 화산의 아름다운 풍취는 정말 꼭 한 번은 봐 둘 만하니 말이다.”

“정말이세요? 고맙습니다, 사숙조님.”

제자가 묵향에게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설취는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괴이한 사숙을 맞이하고 나서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인물이 송화였다. 아직 세상 구경을 많이 해 보지 못한 그녀에게 사숙은 그저 사숙일 뿐이었다. 그가 마교건 악당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묵향도 그녀를 꽤나 총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비해 설취는 묵향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마교 교주에 대한 소문이 극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교도와 어울리면 무림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도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냉파천은 자신의 속마음을 요즘에는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뒷간 바닥에 나자빠져 뱃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말이다.

두 제자가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분위기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억지 장단이라도 맞춰 주고 있는 것이 만통음제는 기분이 좋았다. 제자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노력해 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아를 위해 우리들이 천일루에서 합주를 들려주마. 화산을 바라보니 눈이 즐겁고, 합주를 들으니 귀가 즐겁지 않겠느냐. 또 훌륭한 음식이 있으니 입과 코가 즐겁고, 시간이 지나면 배까지 즐거워질 테니 가히 극락이 따로 있겠느냐?”

“하하핫,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천일루(泉溢樓).

이곳은 창밖으로 화산이 바라보이는 절경을 마주하고 세워져 있는 커다란 객잔이었다. 물론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팔고 있는 음식의 맛 또한 대단히 뛰어나다. 그렇기에 예전부터 무림초출이라면 꼭 한 번은 들려야 하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와 봐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자, 형님부터 먼저 드시죠.”

만통음제가 천일루 안으로 들어서자 꽤 똘똘해 보이는 점소이가 달려 나오며 외쳤다.

“어서옵쇼! 저희 천일루를 방문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손님은 모두 몇 분이십니까?”

“다섯일세.”

“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쇼.”

하지만 만통음제는 점소이를 따라가지 않고 다시금 말을 걸었다.

“3층에는 자리가 없는가?”

“예, 3층은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허어, 이 큰 객잔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게. 될 수 있으면 창 쪽으로 말이야.”

그러면서 만통음제는 품속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어 점소이의 손에 쥐어 줬다. 하지만 점소이는 한사코 그 동전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손님의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없다는 표시였다.

“손님,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3층을 통째로 빌리신 손님들이 계시기에…….”

그 말이 만통음제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혹시 손님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면 양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점소이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닌 것이다.

“뭣이? 통째로 빌려? 어떤 돈 많은 놈들이 감히 이 큰 객잔의 3층을 통째로 빌렸다는 말이냐! 사람 수가 그렇게 많더냐?”

“아, 아닙니다, 손님. 손님 수는 적지만…, 매우 많은 돈을 지불해 주셨기에…….”

드디어 만통음제의 화가 폭발했다.

“이런 망할 자식들!”

마음이 통하는 의제와 강호 초출을 기념해 줄 사손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물러나면 만통음제로서는 지금껏 쌓아 놓은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의 속도 모르는 점소이는 한사코 말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손님. 그분들은 무림인들이십니다. 괜히 시비를 거셔도 뒤끝이 별로 좋지 못하실 겁니다.”

이게 결정적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아무래도 손대기가 껄끄러운 구석이 있겠지만, 무림인이라고? 만통음제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허허, 노부가 잘 말해 자리를 얻어 볼 터이니 그럼 되겠느냐? 너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마.”

불안해하는 점소이를 밀치고 3층으로 올라가자, 역시나 가장 전망이 좋은 탁자에 단출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청춘 남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수는 겨우 다섯 명. 남자 셋에 여자가 둘이었다.

‘허어, 이것들 봐라? 밑에는 자리가 없어서 난리법석인데, 여기는 아주 휑하게 비워 놓고 즐기고들 계시구먼.’

묵향 일행이 올라오는 것을 본 그들 중의 한 명이 거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돈 많고 세력 있는 집안의 덜떨어진 자식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이봐 점소이, 3층은 우리가 전부 빌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점소이는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저,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이분들이 워낙 막무가내라서…….”

말을 듣자마자 사내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험악한 인상으로 소리쳤다.

“이것들이 정말!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까부는 것이냐?”

“누군데?”

만통음제가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사실 적당히 좋은 말로 타일러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만통음제였지만 사내의 싸가지 없는 말투에 일순 심기가 뒤틀려 버린 것이다.

“이 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대 화산파 청심검자(淸心劍子) 장로님의 속가제자이며, 섬서표국을 이끄시는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청심검자라면 바로 화산의 일곱 장로들 중의 여섯째인 노숙(魯塾)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여 꼭 필요할 때만 검을 휘둘렀기에 젊었을 때 청심검이라는 명호를 얻었고, 또 나이 들어서는 청심검자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호오, 자네의 소개가 꽤나 호화롭구먼. 그렇다면 네 눈앞에 보이는 노부는 누군 줄 아느냐?”

자신의 말을 듣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를 보자 보창(普彰)은 속이 뜨끔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멋을 잔뜩 부린 문사라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탐스러운 긴 수염을 배꼽까지 기르고, 백옥 같은 피부에 계집애처럼 손가락마저 희고 고왔다. 잘 봐줘도 서른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이까지 감안한다면, 저놈도 세도 있는 집안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보창은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소?”

“좋다. 내가 누군지 말을 해주지 않고 너희들을 닦달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겠지. 내 이름은 석량이라고 한다.”

말투와 달리 만통음제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일례로 자신이 만통음제라고만 말해 주면 저들이 알아서 길 텐데, 명호가 아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을 보면 그 속셈이 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보창은 석량이라는 이름이라고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 일대에서 석씨 성을 쓰는 사람 중에서 그가 조심해야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석량이라고? 혹시 누구 석량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분은 안 계시오?”

동료들 모두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는 것을 보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만통음제의 진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동료들의 행동을 보고 보창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죽거렸다.

“아하하, 형씨는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그런 것에 속을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오.”

“그래? 그럼 속는 게 뭔지 가르쳐 주마.”

만통음제의 신형이 번쩍 했다고 느껴진 순간, 그는 이미 보창의 멱살을 틀어쥐고 배에다가 몇 대의 주먹질을 끝마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만통음제의 제자들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한껏 부릅떠졌다. 냉파천이 묵향에게 당했던 전설적인 신법, 이형환위가 그들의 사부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만통음제가 보창의 배를 두들기고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자마자 보창의 구토가 시작되었다.

“우웨에에엑!”

방금 전에 먹고 마셨던 모든 것이 물줄기처럼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만통음제의 몸은 이미 그 사정거리에서 멀리멀리 벗어나 있었다.

“거참, 많이도 처먹었군. 그래, 다음은 누구냐?”

물어볼 것도 없었다. 방금 전에 바라본,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움직임만 보더라도 엄청난 고수임에 분명했다. 괜히 싸움에 말려들어 봐야 얻어터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들은 모두들 슬금슬금 만통음제의 눈치를 보며, 이제는 서 있을 힘도 없는지 엎어져서 토악질을 하고 있는 보창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만통음제는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점소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자, 손님들이 우리들을 위해 애써 자리를 양보해 주셨으니 어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라. 그리고 저 쓰레기들은 빨리빨리 치우고 말이다.”

“예?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만통음제는 적당한 자리를 택해 앉으며 겸연쩍다는 듯 말했다.

“동생 앞에서 무공을 펼친다는 것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잘 안다네. 하지만 아무래도 동생이 내 못난 제자 놈을 손봐 준 것을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동생이 손을 쓰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겠나? 아무리 저놈들이 괘씸해도 그렇지, 사손을 위한 자리에서 피를 볼 수야 없지 않은가.”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해 놓은 짓이 있는데 어찌 그렇지 않다고 발뺌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말이다.

“예, 형님의 그 마음 이해합니다. 기분 좋은 자리인 만큼 피를 봐서는 안 되겠죠. 자, 앉으시죠. 오늘은 소제가 크게 한턱 쓰겠습니다.”

점소이 몇 명이 달려 올라와 재빨리 청소를 시작하자 주위는 곧 깨끗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묵향은 송화를 가리키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음식은 이 자리의 주빈이 정해야 하겠지?”

“저…, 좀 비싼 거를 시켜도 되겠죠?”

자신이 말해도 좀 부끄러운지 송화는 혀를 살짝 꺼내며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기에 묵향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으하하핫! 화아는 이 사숙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여기서 가장 비싼 것을 시켜도 상관없으니 좋을 대로 하거라.”

송화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듯 상기된 표정으로 이것저것 평소에 먹어 보고 싶었던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내려가고 나자 만통음제는 등에 지고 있던 금을 꺼냈다. 그것에 맞춰 묵향도 품속에서 한 자루의 적(笛)을 꺼냈다. 이것은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들어진 최상품으로 만통음제가 묵향이 피리도 잘 분다는 것을 안 후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묵향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 후 만통음제는 금을 타고, 묵향은 적을 불며 서로의 우정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금음과 적음이 서로 절묘하게 어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우르르르 손님들이 몰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몇 가지 시키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직접 가지고 올라오기도 했고, 돈이 있는 자들은 황급히 몸만 올라온 후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새로이 주문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점소이에게 자신의 음식을 위로 가져오라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고 위로 올라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가락은 점소이가 음식을 내오면서 잠시 멈췄다.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먹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들어오는 화려한 화산의 자태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훌륭한 술이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모두들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들고 있는데, 아래쪽이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도사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저놈입니다요, 사형.”

방금 전에 뱃속의 음식을 몽땅 쏟아 놓고 간 보창이었다. 보창이 만통음제를 지적하자 도사들이 살기 띤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본 냉파천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묵향 때문에 쌓인 것이 많은 냉파천이었다.

“사부님,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괜히 사건 크게 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하거라.”

“예, 심려 놓으십시오, 사부님.”

냉파천은 쓱 몸을 일으키더니 도사들에게 물었다.

“화산파에서 왔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화산의 제자들임에 분명했다. 냉파천은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여기서 푸닥거리할 필요가 있겠느냐. 모두들 따라오너라.”

냉파천이 앞장서서 가 버리자 화산의 제자들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자신들은 거의 10여 명인데, 어찌 한 놈이 나서서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대 화산파의 제자들을 뭐로 보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사형?”

“뭘 어떻게 해? 저놈부터 박살을 내 놓고 다시 올라오면 될 것 아니겠느냐.”

그 사형이라는 자의 지시에 따라 모두들 냉파천을 따라 아래로 우루루 내려가 버렸다.

그 꼴을 본 만통음제는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허허, 처음부터 2층에 자리 잡을 걸 그랬나? 오늘같이 좋은 날, 사람 여럿 잡게 생겼구먼.”

묵향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누가 잡고 싶어서 잡는 겁니까? 자, 상관 마시고 술이나 한 잔 더 드시죠.”

잠시 후, 아래쪽에서 뭔가를 때려잡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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