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1화 (437/930)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무림맹의 대회의실에 모인 수뇌부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 물음에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외다.”

“흉수가 누군지 밝혀진 게 있소?”

누군가 질문을 던지자 그 대답은 공수개 장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날아왔다.

“이런 짓을 할 놈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마자 사방에서 격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정확한 물증이라는 것이 필요하지요. 심증만 가지고는 무림의 동도들을 움직이기에 불충분하지 않겠소?”

“불충분하다고? 마교 놈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돼! 그놈들은 처음부터 씨를 말려 버렸어야 했다구!”

“맞소!”

“맞기는 뭐가 맞아? 증거가 있어야 한다니까!”

공수개 장로는 손을 들어 장로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자자, 모두들 그렇게 열을 올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증거는 확보되었으니까요. 개방에서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수많은 시신에 난 상처라든지, 벽이나 바닥에 난 흔적 등을 종합해 볼 때 최소한 30여 종의 마공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소이다. 지금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으니 어떤 마공들이 사용되었는지도 조만간 밝혀지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마교가 왜 화산파를 멸문시켰을까요?”

“단 한 명도 살아 있는 자가 없기에 알아낼 방법이 없었소. 물론 마교도 몇 놈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면 의외로 간단하게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오. 하지만 그것도 힘들게 되었소이다. 그놈들은 약삭빠르게도 화산파의 아래쪽 길목에 ‘오늘은 본문에 일이 있어 손님을 받지 못하니 돌아가시오’라는 글을 붙여놨기에, 아무도 화산파에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지 못했소. 나중에 일 때문에 밖에 나갔던 화산의 제자가 돌아와 혈겁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개방에 연락을 보내오기까지 무려 7일 이상이 흘렀단 말이오. 시체들이 푹푹 썩고 있는 판에 무슨 생존자가 있을 수 있겠소?”

“그렇다면 아예 생존자라고는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소이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소이다. 하지만 본방에서 다각도로 조사를 해 본 결과, 화산파와 마교 간에 뭔가 심각한 갈등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하고 있소.”

공수개 장로의 말에 모두가 관심을 나타냈다. 궁금증을 내포하고 있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공수개 장로는 슬쩍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험험, 그러니까 본방에서 그런 추측을 한 것은 그 잔인무도한 살인 방법 때문이오.”

정보통 개방이라면 수많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시체들을 다 접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던 공수개 장로의 눈에 짙은 어둠이 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회의 석상에 있는 사람들이 놓칠 리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지금 현재 정파를 이끌어 가는 아주 뛰어난 식견의 소유자들이었으니 말이다.

“본방에서 그렇게 추측하는 것은 화산의 장로들을 살해한 그 잔인한 방법 때문이었소. 먼저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단전을 파괴한 다음, 마지막으로 출혈 과다로 인한 사망을 예방하기 위해 지혈까지 시켜 놓았다고 하더군요. 죽음의 공포와 함께, 설혹 누군가에게 구출된다 하더라도 완벽한 폐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방법이었소이다. 내공이 흩어져 버렸으니 자살할 방법도 없이 그분들은 처절하게 발악하다가 죽은 것이었소. 심지어 공천 장로의 경우, 발견되었을 때 시신이 사후강직 상태에 놓여 있던 것으로 보아 발견되기 하루 정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좌중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어찌 한 문파의 최고수들을 그런 식으로 처형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 지독한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이때, 옥진호 장로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는 듯 외쳤다.

“그건 원한이 아니라 경고외다.”

“경고라니요?”

“얼마 전, 우리는 마교와 내통하고 있던 현천검제를 제거했지 않았소이까? 그에 대한 대답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마교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는다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경고를 보낸 것이란 말이오.”

뚜두둑!

분노에 가득 찬 맹주가 무심결에 의자의 손잡이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 엄청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손잡이가 박살이 났다. 그 소리에 장로들도 놀랐지만, 맹주 본인은 더욱 놀랐다. 겨우 이런 일로 수십 년을 닦아온 평상심이 무너지다니.

“무량수불…….”

나직하게 도호를 외며 마음을 다잡는 맹주를 보며 모든 장로가 일제히 외쳤다.

“마교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화산파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맹주는 손을 슬쩍 들어 장로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마교가 본맹에 보내는 선전 포고임에 분명하오.”

옥진호 장로에게 시선을 돌린 맹주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화문검 장로는 마교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시오. 마교가 행한 그 잔인무도한 짓을 무림동도들에게 알리고, 그 힘을 집결시켜 마교의 뿌리를 뽑아야만 하겠소.”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매화문검 장로, 마교를 칠 만한 세력을 모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소?”

“최소한 10만 이상의 인원을 모아야 할 테니, 적어도 2개월 이상은 필요합니다. 격문(檄文)을 띄워 무림의 공분(共忿)을 조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청해성까지 집결을 완료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무량수불…, 마교가 화산을 멸문시킨 것을 묵인한다면, 그들은 마음 놓고 다른 문파들을 공격할 것이 분명하오. 그런 만큼 본맹은 철저한 보복을 감행하여 마교도들이 다시는 이런 사태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오. 이번 공격으로 마교를 멸망시킬 수 있다면 좋겠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최대한의 피해는 줘야만 할 것이오. 그런 만큼 여러 장로님은 최대한 많은 문파의 지지를 얻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오. 마교에 대한 총공격은 3개월 후로 하는 게 좋겠소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맹주님의 의견이 지당하십니다!”

“좋소. 그렇다면 모든 문파에게 마교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대의에 동참하는 격문을 띄우도록 하시오.”

모든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맹주의 결정에 찬동하며 마교에 대한 전의를 불태웠다. 이제 드디어 마교와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밀실에서는 경악한 여인의 뾰족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가 화산파를 박살 냈다고?”

“예, 할머니.”

옥화무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매영인에게 되물었다.

“분명히 염왕대 5개 대라고 하지 않았더냐? 겨우 그들만으로 화산을 멸문시킨다는 것이 도대체가 가능이나 한 일이냐?”

“하지만 마교에는 그가 있지 않습니까?”

매영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는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훗, 아무리 그가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화산에는 현천검제가 있지 않느냐. 아무리 그가 지고한 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겨우 그 정도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화산을 쓸어버리다니…, 뭔가 이상하구나. 화산파의 멸문에 대해 좀 더 철저하게 조사해 보거라.”

“예, 할머니.”

매영인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옥화무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자가 제정신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산만 쓸어버린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이건 아예 전면전을 시작하자는 선전 포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때 굳게 닫혀 있는 회의실 문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밖에서는 큰 소리로 외친 것이겠지만, 워낙 방음이 잘되는 방이라서 그런지 작게 들려온 것이다.

“무림맹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총관은 황급히 문으로 다가갔다. 회의 중인데도 불구하고 가져온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전서인 모양이었다. 총관은 문을 살짝 열고는 서신을 받아 든 다음 다시 문을 굳게 닫았다.

“무슨 일인가요?”

서신을 재빨리 읽은 후, 총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무림맹에서 마교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훗, 그 영감으로서도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겠지요. 그 외에는요?”

“예, 3개월 후 마교의 근거지인 십만대산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무림에 적을 둔 동도들은 무림맹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옥화무제는 상관운 장로에게 말했다.

“나는 요를 멸하는 일에 얽매이다 보니 아무래도 무림 쪽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어려움이 크군요. 하지만 지금 무림도 격변기에 놓여 있어요. 영인이가 뛰어난 아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연륜이 떨어지니 상관운 장로가 옆에서 잘 보좌해 주세요.”

무영문주는 마교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사천분타에 가 있었다. 그런 만큼 총타에서 문주를 지원할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평상시라면 옥화무제가 있으니 큰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은 온통 요에 가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무영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부문주인 매영인이었다.

“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 무림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루한 소모전으로 일관되다가 슬그머니 끝마치게 되겠죠. 아무리 마교의 세력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정파 무림을 한꺼번에 복속시킬 만한 능력은 없어요. 또 정파에서도 그 천혜의 요새인 십만대산을 정벌할 만한 힘이 없구요. 최대한 타격을 입힌 후 후퇴하는 정도로 마무리 짓게 되겠죠.”

매영인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찬성의 뜻을 표했고, 그것은 상관운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상문주님.”

“그렇기에 본문의 역할이 중요한 거예요. 어느 한쪽의 세력이 돌출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최대한 둘 사이의 세력을 조율하는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해요. 알겠나요?”

“예, 할머니.”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기로 하지요.”

매영인과 상관운 장로가 밀실을 나간 후 총관은 옥화무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임청 원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완전한 집계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서둘러 정보를 전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현재까지 모인 것만 해도 70만이 넘지만, 아직도 더 많은 병사가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어요. 어쩌면 80만 정도일지 모르지만, 그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요.”

“예, 태상문주님. 그건 그렇고, 설마 요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뛰쳐나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었지 않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요 황제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말이겠죠. 요의 군대가 금의 군대와 전쟁을 시작할 때, 그때가 기회가 될 거예요. 본국의 군대가 국경선을 돌파해 침공을 시작했음을 안다고 해도, 군을 되돌릴 수가 없을 테니 말이에요.”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요와 금의 대군이 대치할 때, 그때를 노려 요를 쳐야 해요. 시간이 생명이에요. 이곳 총타로 보내온 정보를 다시 전선에 가 있는 임청 원수에게 전한다는 것은 시간 손실이 너무 커요. 그런 만큼 그에게 곧바로 정보를 전달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최소한 3일의 시간은 단축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흑과 백의 전쟁터.

전쟁의 규칙은 매우 간단했다. 포위만 되면 무조건 전멸. 그런 다음 나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는지를 따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허어, 이거 이번에는 제법 저항이 거센걸?”

화경의 고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코앞에 있는 바둑판이 잘 안 보일 리가 없거늘, 머리를 바싹 가져다 대며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보면서 조령은 약이 바짝 올라 조잘거렸다.

“아니, 정말 이렇게 무자비하게 두실 거예요? 한 집이라도 살려 보겠다고 이렇게 아둥바둥하고 있는 걸 보면, 나 같으면 불쌍해서라도 살려 주겠어욧!”

조령은 흰 돌을 쥐고 있는 패력검제의 손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지금 심하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한 수 둬 놓고 보니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제발, 저기 있는 허점을 몰라야 할 텐데…….’

하지만 이제 갓 바둑을 시작한 그녀의 눈에도 보이는 허점이 어찌 수십 년 동안 바둑을 둔 패력검제의 눈에 안 보이겠는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잠시 전장을 관찰하던 패력검제는 인정사정없이 그곳에 흰 돌을 쑤셔 넣으며 이죽거렸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패력검제가 돌을 놓자마자 조령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제, 제발 한 수만 물려주시면 안 될까요? 예? 제발∼∼.”

애처롭게 사정했지만, 패력검제는 무자비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일수불퇴!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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