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2화 (438/930)

결국 검은 돌은 단 한 곳에도 진지를 구축하지 못한 채 바둑판 위에는 흰 돌만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흰 돌들을 원독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조령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찌 초보자를 상대로 이토록 무자비한 손속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의 심리 상태를 모르는 척 쓱쓱 돌을 주워 담던 패력검제는 음흉스런 어조로 조령에게 제안했다.

“어때? 또 한 판 하려나?”

그런 패력검제의 모습이 너무나도 얄미워 조령은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차, 참아야 하느니라…, 으드득.’

그렇지만 그녀의 미간에 내천(川) 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인내심의 한계가 가까워 오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다섯 점만 아니, 아홉 점만 미리 깔고 두면 안 될까요?”

“허어, 어찌 공명정대한 바둑을 둠에 있어서 먼저 우위를 점하고 시작하려 하는고? 절대로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지.”

“훌쩍훌쩍!”

결국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조령은 기어코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하지만 패력검제의 의지는 단호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으아아아앙!”

조령이 울면서 어딘가로 뛰쳐나간 후, 패력검제는 바둑판을 한쪽 옆으로 치워 놓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다시 바둑 두자고 올 때는 조금 더 실력이 향상되어 있겠군. 어쩌면 다음에는 내기에 질지도 모르겠어. 흐음, 확실히 근성이 있는 아이란 말이야. 그렇게 무자비하게 깨 버리는 데도 계속 도전해 오는 것을 보면 말이야.”

이때, 저쪽에서 서량이 차를 가지고 걸어오는 것을 보고 패력검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네가 늦은 듯하구나. 그 아이는 벌써 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 말에 서량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하, 무슨 말씀을. 아버지 드리려고 가져왔지, 조령 소저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닙니다.”

“그럼 왜 찻잔이 세 개인고?”

“소자가 만약 두 개를 가져왔는데, 혹시 조령 소저가 있다면 그 둘을 누구에게 줘야 하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언제나 말씀하셨듯이 삶을 평화롭게 살려면 융통성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죠.”

패력검제는 아들의 말에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어서 올라오너라. 오랜만에 너하고 다향을 즐기게 되었구나.”

“그런데, 좀 살살 봐주면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멀리서 슬쩍 보니 너무 심하신 것 같던데요.”

“허허, 내가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단 한 집이라도 살리면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내기 바둑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지. 또 겨우 이런 것으로 포기할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어찌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이냐?”

두 부자가 한담을 나누며 다향을 즐기고 있을 때,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문주님, 무림맹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호오, 무림맹에서?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무림맹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3개월 후에 십만대산을 공략할 테니, 각 무림동도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화산파가 마교에게 멸문당했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령문은 이렇다 할 첩보 조직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작은 문파였고, 또 소주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기반이 취약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교와 전면전을? 놀라운 일이로다. 지금까지 마교와 수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무림맹에서 그렇게까지 강하게 전의를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슬쩍 패력검제의 눈치를 보며 서량이 말했다.

“답신을 빨리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네는 눈치 빠른 녀석 몇을 데리고 나가 무림맹이 왜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내라. 갑자기 무림맹에서 이런 강수를 둔 이유가 있을 게다.”

“옛, 문주님.”

“무슨 일일까요?”

패력검제는 느긋하게 차를 마신 후 대꾸했다.

“글쎄, 점쟁이가 아닌 한 나라고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사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더 이상 무림맹과 마교의 일은 자신에게 족쇄가 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3일 후, 패력검제는 무림맹이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한 이유를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으리, 고혼일검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고혼일검 여민은 패력검제의 단 하나뿐인 사형이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패력검제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패력검제는 서재에서 황급히 달려 나오며 외쳤다.

“사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빨리 이쪽으로 모시지 않고.”

“예, 도련님께서 모시고 계십니다. 아, 저기 오시는군요.”

낡고 허름한 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서량과 담소를 나누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마와 뺨에 난 긴 상흔만 없었다면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형.”

“허허, 문주도 건강한 듯하여 마음이 놓이는구먼. 문주, 드디어 마교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다네.”

“아, 사형께서도 무림맹에서 마교에 전면전을 선포한 사실을 들으셨군요.”

“물론이지. 내 그걸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 놓고 곧장 달려왔다네.”

“자자,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을 달려오셨는데, 차로 목이나 축이시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헛, 기왕이면 향기로운 술로 주게.”

“무슨 대낮부터 술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형과 밤새 마시려고 준비해 둔 좋은 술이 있으니까요. 자,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패력검제는 여민이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무림맹이 마교에 대해 그런 초강수를 동원했는지 사형은 들으셨습니까?”

“아니, 문주는 그것도 아직까지 몰랐단 말인가?”

“예, 여러 가지로 일이 많다 보니…….”

“마교에서 화산파를 멸문시켰다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말에 패력검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 그, 그럴 리가…….”

“기습 공격을 가해 완전히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린 모양이더군. 소문을 듣자마자 노부와 면식이 있는 개방의 분타주를 찾아가 확인까지 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일세.”

“이상하군요.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그라니, 누구를 말하는 겐가?”

여민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채근하자, 패력검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넘기며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형께서는 왜 마교가 화산을 공격했는지 아십니까?”

“아, 그거야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예? 당연하다니요?”

“전에 문주가 노부에게 무영신마를 사냥하려고 하는데 함께 가자고 청하지 않았었나?”

“그랬었지요.”

“무영신마를 잃은 마교에서는 당연히 복수를 꿈꾸며 이를 갈았을 테고, 그때 재수 없게도 화산파가 걸린 것이 아니겠는가?”

사형의 논리에 패력검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마도 사제의 실력을 인정하는 그였기에 필히 무영신마의 목이 날아갔을 게 분명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않은가.

“사형께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무영신마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뭔가 화산파가 박살 날 만한 짓을 마교에게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허허이, 이상한 일이로군. 언제부터 문주가 그렇게 마교를 높이 쳐 줬었지? 원래 그놈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 놈들이야. 그놈들이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했을 때도 이유가 있었나? 무엇이건 간에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만 않으면 곧장 죽이고 파괴하는 놈들이 아닌가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화산이라는 문파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요.”

고혼일검 여민은 예전에 자신들이 당했던 처참한 기억을 떠올렸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거 본문에 불어 닥쳤던 혈겁을 생각해 보게. 처음에는 아버지, 그런 다음 일이 커져서 산 위에 올라갔던 대부분의 사형제들, 우리 쪽에서 치밀하게 대비를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본문까지 잿더미로 만들었을걸? 안 그런가?”

“그건 알 수가 없으니 논외로 하지요.”

“그래, 문주는 언제 출발할 생각이신가?”

“글쎄요, 3개월 후라고 하니 시간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준비를 갖춘 후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문주 말이 맞는 것 같구먼.”

먼지 나게 한번 맞아 볼래?

염왕대가 마교를 떠나 화산으로 이동할 때는 대파산맥을 빙 돌면서 야음을 틈타 적의 눈을 속여 가며 전진했었다. 하지만 일단 임무를 끝마치고 귀환하는 마당에 그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꾸물거리다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하면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천진악이 거느리고 온 것은 겨우 5개 대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수하들을 독려하여 진령산맥을 타고 최대한 빨리 귀환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천진악과 그가 거느리는 염왕대 고수들은 마교에 복귀하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미 비마대를 통해 그들이 이룩한 전과가 마교 내에 널리 알려진 덕분이었다.

“염왕대주 천진악 이하 염왕대 5개 대, 임무를 무사히 끝마치고 본교에 귀환했습니다.”

천진악의 보고를 받은 수석장로 수라혈신(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의 안색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인명 피해는 없었는가?”

“일곱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화산파라는 대적을 무너뜨린 것을 감안한다면 피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크하하핫! 그것 참 통쾌한 소식이로군.”

여기까지 기분 좋게 말한 수석장로의 어조는 갑자기 이빨 갈리는 그것으로 급변했다. 아무래도 천진악이 뭔가 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행동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큰 작전을 어떻게 수석장로인 나도 모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노부를 상관으로 생각했다면, 떠나기 전에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북궁뇌가 언성을 높이며 질책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수석장로면서 내총관까지 겸하고 있지 않은가. 각 무력 단체를 총괄하는 장로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내총관의 권력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은 내총관이 총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북궁뇌의 눈치를 보면서 천진악은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무래도 따지셔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수석장로님. 저는 화산 인근에 집결하라는 명령만 받고 교를 나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화산 인근에 비마대가 쫙 깔려서 화산파의 내부 정보를 전해 주더군요. 그것으로 봐서 아마도 군사나 비마대주께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 않겠습니까?”

천진악은 슬며시 군사에게로 팔밀이를 했고, 덕분에 수석장로의 노화를 한꺼번에 감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군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석장로는 분노 어린 시선을 군사에게로 돌렸다.

“사실이오, 군사?”

군사는 수석장로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수석장로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어찌 수석장로님께 보고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염왕대를 보내라는 교주님의 명령을 받고, 비마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비마대주께 협조 요청을 했을 뿐, 저도 설마 교주님께서 화산파를 멸문시키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석장로의 시선을 받은 비마대주 홍진이 다급히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염왕대와 합류한 이후에 화산을 치시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수하들에게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이미 일이 끝난 후였습니다.”

화산파와 마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가로막혀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이 멸문당한 이후에야 교주가 화산을 치려고 한다는 보고가 홍진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질책할 사람도 없었기에 수석장로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그렇다면 그 작전은 완전히 교주님께서 즉흥적으로 시행하신 작전이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향한 노화는 거두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구먼. 이보게들, 다음부터는 뭔가 조그마한 낌새만 있어도 노부에게 연락 좀 해 주게. 알겠는가?”

“옛,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젠장, 그 망할 화산파가 끝장나는 통쾌한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본교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니……. 이런 빌어먹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석장로님. 아마도 곧 그럴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비마대주 홍진의 말에 수석장로의 입은 한껏 벌어졌다.

“오오, 비마대주,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지 않습니까? 뭔가 복수를 하기 위해 움직이겠지요.”

“크흐흐흣,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움직여 봤자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무림맹을 끝장내 버릴 것이야. 자, 모두들 축배를 들러 가세나. 노부가 좋은 술을 잔뜩 준비해 놓으라고 일렀다네.”

그날 수석장로는 모든 장로와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오랜 세월 마교와 다툼을 벌여 왔던 숙적들 중의 하나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는 다음에는 꼭 자신이 앞장서서 정파 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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