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9화 (445/930)

적과의 동맹

회하 이북이 모두 금에게 넘어가자 무림맹은 이제 자신들이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직까지 마교는 조용했다. 만약 이번 전쟁에서 그들이 금의 손을 들어 줬었다면 회하의 저지선 따위는 하루아침에 돌파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 말은 마교가 아직까지는 금의 손을 들어 주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괜히 무림맹과 동맹을 맺는다는 둥 하는 계략을 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무림맹의 수뇌부가 깨달았을 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개봉이 함락된 후니 말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맹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던 장로들은 통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무림이 황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했지만, 이민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크흐흑,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하다니…….”

오열하는 장로들을 향해 맹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모든 장로님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설혹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님들께서 물려주신 이 땅을 오랑캐 따위에게 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물론입니다. 마교가 본맹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놈들도 한족이 아닙니까? 일단 여진족 놈들을 몰아낼 때까지는 연합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맹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득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마교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소?”

“옥화 봉공이 가장 적임자일 듯싶습니다. 처음에 마교 놈들이 동맹을 제의했을 때도 그분을 통해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그분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옥화 봉공에게 전서를 띄우도록 하시오.”

그때, 갑자기 백량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잠깐! 노부가 맹주께 한 가지 질문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엇이오, 맹호검군 장로?”

“맹주께서는 마교와 금이 합작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고 계십니까?”

맹주는 갑자기 백량 장로가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맹주는 인내심을 갖고 대답해줬다.

“현재까지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백량 장로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노부가 전에 맹주께 주청드린 사안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제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금 황제의 목을 베어다가 바치겠소이다!”

만약 마교와 금이 합작한 것이 아니라면 금 황제의 주변을 호위할 뛰어난 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제야 백량 장로의 뜻을 이해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허락하겠소이다. 맹호검군 장로께서 성공하기를 빌겠소.”

백량 장로는 깊숙이 포권하며 대답했다. 그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소이다.”

매화검군 장로가 보무도 당당하게 회의장을 나간 후 맹주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일단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구려. 금 황제가 죽는다면 금의 세력은 순식간에 위축될 것이 분명하니, 구태여 마교와 합작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묵향과 옥화무제는 또다시 자리를 함께했다. 중원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경공의 대가들에게 있어서 서로 간의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아예 호위조차 거느리지 않고 있었다.

묵향은 의자에 쓱 앉은 후 객잔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기다리고 있던 옥화무제에게 아는 척을 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군. 이봐, 점소이.”

“옛, 손님.”

“술 좀 가져와. 그리고 안줏거리 아무거나 하고 말이야.”

“옛!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역사적인 동맹이 시작되는 날인데, 축배를 들어야 할 것 아니겠어?”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조금 헛다리를 짚기는 했지만 말이다. 옥화무제는 시치미를 떼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동맹을 제의하러 온 것을 알았죠?”

“당연하지. 송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그 늙은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알았겠지. 멍청한 것들.”

“…….”

한참 동안 말없이 옥화무제가 생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 투박스런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틀렸어요. 그 늙은이들은 아직까지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모르고 있죠.”

“이런 제기랄! 그럼 뭣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야?”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화무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당신, 옛날에 만났을 때와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거 알아요?”

그때, 점소이가 술을 가져왔기에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술잔에 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본좌가 뭐가 달라졌다고…….”

“옛날에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말에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훗, 과찬이군.”

그 말에 옥화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칭찬은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나도 단순무식하게 생각했기에, 이쪽에서 판단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뿐이니까 말이죠.”

묵향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후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 제대로 봤네. 본좌가 원래 좀 무식하거든.”

뻔뻔스레 대꾸하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렇게 얼굴 가죽이 두꺼울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말을 꺼낸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당신의 생각이 보이더군요. 그걸 보면 당신은 굉장히 많이 발전한 거라구요.”

묵향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이죽거렸다.

“호오∼,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죠.”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한 뭉치의 문서였다.

“그게 뭔데?”

“당신이 금과 싸우려는 이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향의 손이 휙 움직이더니 문서를 낚아채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읽고 있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당신이 협상을 원했던 완옌 렌지에 대원수가 바로 그예요.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그의 능력상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묵향은 문서 뭉치를 품속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그렇게 위험한 놈이 아니었다면 노부가 그렇게 혈안이 되어 놈의 행방을 찾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의외로군. 설마 대원수 나으리가 되어 계실 줄이야. 이거 크게 한 방 먹었구먼.”

묵향의 어감에는 묘한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가 20여 년간 직접 교육시킨 고수만 1만에 달해요. 물론 그것도 다 천마혈검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그 혼자서 그 많은 고수를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에요.”

뿌드드드득!

묵향은 이빨을 갈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는 옥화무제에게 말했는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공포스러운 뭔가가 깔려 있었다.

“장인걸이 금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 본좌는 본교의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야.”

“물론이죠. 저는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뿌릴 정도로 몰염치하지는 않아요. 언제나 한 가지 정보는 한 명의 고객에게. 그게 제 신조죠. 그런 의미에서 정보료를 청구하고 싶은데요.”

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한다는 듯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전표 다발을 꺼냈다.

“은자 1천 냥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물론이죠. 고맙게 쓰겠어요.”

그녀는 그 돈으로 군량을 사서 양양성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금 황제 아구다를 참살하겠다며 호언장담한 후 보무도 당당하게 무림맹을 떠났던 맹호검군 백량 장로가 돌아왔다. 그것도 혼자. 그가 거느리고 떠났던 1백 명의 고수는 단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었고, 백량 장로 혼자 돌아온 것이다.

무림맹의 수뇌부는 맹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인 백량 장로가 수하들을 모두 잃고 엉망진창이 되어 도망쳐온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씀이오?”

백량 장로는 비참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노부 평생에 이토록 참담한 적은 없었소이다. 노부도 수하들과 함께 죽고 싶었으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아 돌아왔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 차근차근 말씀해 보시구려.”

“개방에서 제공한 지도를 통해 연경궁 내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소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황제의 행방은 알 수 없었소. 그도 그럴 것이 그자가 거느린 첩실이 한둘이겠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수색하며 내부를 살펴나갈 수밖에 없었소. 그러다가 그들을 만났소.”

백량 장로의 눈에 짙은 두려움이 깔리는 것을 보고 장로들은 말을 재촉했다.

“그들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바로 마교 놈들 말이오. 수는 약 40명 정도였는데, 그 개개인의 실력이 노부와 맞먹을 정도였소. 아니, 어쩌면 더욱 강한지도 모르겠소.”

그 말에 장로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말이 쉬워서 40명이지, 무림맹 장로급이 40명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한 명 한 명만 해도 엄청난 실력인데, 만약 그들이 집단으로 움직인다면 화경의 고수라도 찜 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맹주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이 정말이오, 백량 장로?”

“노부가 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노부가 거느린 수하들은 도무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소. 그들 중에서 겨우 20명이 덤볐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수하들이 죽어 나가더이다. 그래서 노부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크흐흐흑!”

백량 장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날 밤에 벌어진 참극을 다시금 회상하자니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한 모양이다. 잘 갖춰진 함정에 멋모르고 기어 들어가 아끼던 수하들만 몽땅 죽이고 돌아왔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맹주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토록 중대한 정보를 전해준 백량 장로께 감사드리는 바이오. 노부는 맹주의 권한으로 옥화 봉공을 소환할 것을 명하는 바이오. 무영문이 무림 제일의 정보통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마교와 금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오. 그런데도 본맹에게 마교와 합작할 것을 권했다는 것은 명백한 배신행위. 대신 그녀의 실력을 감안하여 정중히 초청하시오. 그런 후 노부가 직접 손을 쓰겠소.”

“알겠습니다, 맹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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