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옥화무제는 맹주의 부름을 받고 무림맹으로 향했다. 마교와의 동맹 건으로 그녀와 몇 가지 의논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어서오시구려, 옥화 봉공.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그대를 불렀다오. 물론 전서를 통해서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서로 간에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직접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자,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으시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와 차를 놔둔 후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갔다. 맹주는 찻잔 뚜껑으로 둥둥 떠 있는 찻잎을 옆으로 슬쩍 밀며 입을 열었다.
“자, 차나 드시면서 얘기합시다. 어렵게 용정차를 구했는데 향이 그만이라오.”
옥화무제도 다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예, 참으로 향이 좋군요.”
“마교와는 워낙 오랜 시간 반목해 왔었기에 갑자기 동맹을 맺는다고 하니 걱정이 앞서는구려. 혹시 그놈들이 금과 짜고 일부러 이쪽에 접근해 오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오.”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무림맹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맹주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더 중요한 일? 그게 뭔지 말해 줄 수는 없겠소?”
“그게,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정보이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중요한 일이오. 얼마 전 맹호검군 장로가 수하들을 이끌고 금 황제를 참살하기 위해 떠났었소.”
그것은 옥화무제도 몰랐던 일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맹호검군 장로와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본녀를 찾으신 겁니까?”
이제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옥화무제의 말은 이미 맹호검군 장로가 실패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맹주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옥화 봉공께서는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던 듯하구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옥화무제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그 비밀하고 연관되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급기야 맹주의 입에서는 노기가 섞인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도 방금 전에 말했듯 이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오! 마교가 이미 금과 내통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는데, 어찌 옥화 봉공께서는 비밀 타령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오. 현재 본맹에서는 봉공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오?”
그것은 정말 의외였던 듯, 옥화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본녀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의뢰자에게 한 번 판매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규칙 때문에 본녀에게 지어진 누명을 벗기는 힘들 듯하군요. 대신 한 가지 단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뭣이오?”
“개방에 완옌 렌지에 대원수를 조사해 보라고 이르십시오. 그의 정체를 파악하신다면 본녀에게 지어진 누명은 자연스레 벗겨질 것입니다.”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기에 맹주는 의아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완옌 렌지에 대원수? 그자는 또 누구요?”
“지금 요의 잔당을 토벌하고 있는 금의 맹장입니다. 금 황제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대단한 장수지요.”
“그가 어쨌기에…….”
한참 마교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대화가 금의 장수 얘기로 바뀌자 무림맹주는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림맹주를 보면서도 옥화무제는 단 하나의 단서도 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조사하셔야 할 일이지요. 사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린다고 해서 제게 지어진 누명이 벗겨지겠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모든 게 다 허사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직접 조사하시고, 진실을 파악해 보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맹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연금당하셔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맹주의 어조에는 짙은 고뇌가 어려 있었으나 돌아오는 옥화무제의 답변은 의외로 밝았다.
“어쩔 수 없지요. 맹주께서 차에 산공분(散功粉)까지 푸셨으니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하신 것이 아니신가요?”
옥화무제가 정곡을 찌르자 맹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공분이라면 독은 아니지만 내공을 분산시켜 한동안 무공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내공을 익힌 고수에게 있어서 더없이 치명적인 약물이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소?”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전혀 산공분에 중독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그 둘의 표정만을 비교해 본다면 산공분에 중독된 사람은 옥화무제가 아니라 맹주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처음부터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이걸 마시는 것을 본녀가 거부한다면 맹주께서는 곧장 제게 손을 쓰실 게 뻔한데, 마시는 것이 현명한 처사겠죠. 안 그런가요?”
맹주의 무공이 그녀보다 약간 높은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맹주를 뿌리치고 탈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영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다 알면서도 태연히 차를 마신 것이다.
“봉공의 지혜는 정말이지 놀랍구려. 좋소, 내 개방에 통보하여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소. 그런 후 봉공과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생사람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맹주의 어조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진실임이 밝혀져 결백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맹주와 옥화무제의 사이는 그전처럼 돌아갈 리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본녀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맹주님.”
금제국의 맹장인 완옌 렌지에에 대한 조사를 부탁받은 공수개 장로는 그를 조사하다가 밝혀낸 몇 가지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맹주를 찾아갔다.
“호오∼, 그러니까 그자가 여진족이 아니라 한족이란 말이오?”
맹주가 놀라워하자 공수개 장로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언제나 무영문에 가려 찬밥 신세였던 개방이 이렇듯 맹주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보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예, 맹주님. 저도 그 보고를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완옌이라는 성은 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가 얼마나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는 인물인지 짐작이 가겠군요, 공수개 장로.”
“물론입니다. 지금의 황제를 만든 게 그놈이라고 할 정도로 충성을 다한 모양입니다. 참, 그를 조사하던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뭔데 그러시오?”
“이번에 금이 침공한 것에 무영문이 연관되어 있더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예, 옥화 봉공님이 금 황제와 대원수 사이를 이간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작전 실패로 인해 금 황제가 그 사실을 알아냈다지 뭡니까? 개봉이 무너진 것도 다 금 황제가 분풀이를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공수개 장로는 옥화무제의 흠집을 파헤치기 위해 이 보고를 올린 모양이지만, 그 보고를 듣는 맹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쪽은 이제야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는데, 옥화무제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그에 대한 조사를 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간질을 시키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대원수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었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합디까? 금제국이 자랑하는 맹장인 만큼 그 실력 또한 뛰어나지 않겠소?”
“그걸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소문과는 달리 맹장이 아니라 군사(軍師)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요 근래의 일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렇다면 그의 진면목에 대한 정보가 나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소?”
“그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저 멀리 요를 토벌한다고 뛰어다니고 있다 보니 조사하는 데 상당히 힘듭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이상한 정보가 하나 있더군요.”
“…….”
“그러니까 그가 아구다와 친분을 맺은 것이 거의 20여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때 건장한 청년이었다고 해도 20년이 흘렀다면 나이가 최소한 마흔은 먹어야 정상인데,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답니다. 그걸 보면 어쩌면 그는 무공을 연성한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주안술을 익힌 자라면 상당한 무공 실력을 쌓았다고 봐야 하겠지요. 어찌 되었건 수고하셨소. 오늘 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구려.”
“예, 새로운 정보가 도착하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소이다. 무영문을 믿지 못하게 된 지금, 노부는 개방만을 믿고 있소이다. 열심히 해 주시구려.”
“예, 맹주님.”
공수개 장로를 돌려보낸 후, 맹주는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일단 적을 알아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었다. 무영문과 아무런 연관을 짓지 않았으니, 개방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보의 왜곡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점점 그녀가 말한 대로 되어가는 것 같군. 한인에다가 무공을 익힌 자라. 만약 그놈이 마교가 보낸 놈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놈이 아구다를 만난 게 20년쯤 전이라면 그자가 마교 교주가 갓 되었을 때쯤일 텐데, 그때부터 여진족에다가 투자를 했다? 아니야. 그토록 멀리 보며 투자를 할 바에는 오히려 요에다가 하는 게 맞았을 거야. 몇 년 후 요가 연운16주를 집어삼키는 괴력을 발휘했으니 말이야.”
맹주는 실내를 서성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가 연금되어 있는 곳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는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옥화무제는 맹주가 들어오자 방긋 미소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무림맹에서는 그녀에게 아침에 한 잔씩 산공분이 들어 있는 차를 마시게 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금제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혹시나 그 모든 것이 오해로 밝혀졌을 때 뒷감당이 무서웠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지내시기는 어떠신가요? 혹여 불편한 데라도 있으시면…….”
“아뇨,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쉬어본 게 몇십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옥화무제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너희들이 본녀한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와 같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해 놓으면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뒷감당이 힘들어 자신을 살인 멸구해 버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다오.”
“예, 말씀하십시오.”
“봉공께서는 그가 한족임을 알고 계셨소?”
“물론이죠.”
역시 옥화무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까지도…….
“그가 무림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겠구려.”
“예.”
“그자가 마교도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소?”
이 질문은 맹주가 만든 함정이었다. 만약 상대가 마교도가 틀림없다면 그의 실력은 최소한 극마급으로 압축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극마급의 인물이라면 거의 없으니 조사하기도 편할 것이 분명했다. 맹주가 극마급을 생각한 이유는, 공수개 장로가 그는 전혀 무공을 익힌 자 같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교도가 자신의 마기를 완벽하게 숨기려면 최소한 극마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 그래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것을 조사하셨네요.”
“그렇다면…….”
‘그가 누구일까? 20년쯤 전에 극마의 경지를 깨달은 고수라.’
맹주의 머릿속에는 한때 마교를 주름잡았던 4천왕의 명호들이 떠올랐다. 독수마왕(毒手魔王) 한석영(韓夕英), 흑마대왕(黑魔大王) 한중길(韓中吉), 벽안독군(碧眼毒君) 능비계(凌非癸), 흑살마왕(黑殺魔王) 장인걸(張仁傑). 이들 중에서 현 교주인 묵향과 끝까지 권력 다툼을 벌였었던 인물은 흑살마왕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흑살마왕이 쫓겨난 것이 20년쯤 전이었지.’
“그가 흑살마왕 장인걸이었소?”
옥화무제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맹주님께서 제게 유도 신문을 하신 것이었군요. 예, 맞아요. 그가 장인걸이에요.”
“그렇다면 마교 교주가 연합하여 금을 쳐부수자고 한 것도 장인걸을 치기 위해서……?”
“예, 장인걸이 금을 뒤에 업고 있는 이상 마교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그를 없앨 수 없어요. 만약 장인걸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과거 공포의 대명사였던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있거든요.”
그 말에 맹주는 경악했다.
“천마혈검대! 그, 그랬었구료. 맹호검군 장로가 치를 떠는 인물들이 바로 그놈들이었어.”
“이제 본녀에 대한 오해가 좀 풀리셨나요?”
“그렇다면, 진작 노부에게 말씀하셨다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셔도…….”
“아뇨, 저도 오랜만에 이걸 핑계로 푹 쉬었으니까요.”
옥화무제는 날렵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본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맹주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시면 위험하오. 내공이 돌아오려면 하루는 지나야 할 텐데…….”
“아뇨, 제 수하들이 있으니 그럴 걱정은 없을 겁니다. 그동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를 향해 맹주가 말했다.
“잠깐.”
옥화무제는 춤이라도 추듯 우아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예? 달리 명하실 것이라도……?”
“마교 교주와 협정을 맺게 중간에서 도와주시겠소? 오해가 풀렸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오만.”
“알겠습니다, 맹주님. 조만간에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습니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의 뒷모습을 보며 맹주는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에는 산공분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저 모습은 산공분을 섭취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키는 사람이 곁에서 보고 있는 상태에서 산공분이 들어 있는 차를 마셨음에도 중독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비장의 수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허이∼참, 이 일로 그녀와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조사를 해 보고 손을 썼어야 했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
그로부터 3주 후, 정사(正邪)를 대표하는 두 거두가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만큼 양측의 수행원은 정확히 1백 명으로 제한했으며, 그들이 만난 곳 역시 감숙성의 난주(蘭州) 부근이었다. 난주는 과거 송의 북방 방어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던 전략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군대가 떠나 빈껍데기로 전락해 버린 도시였다. 사실 송으로서는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판에 이 변방에까지 투입할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난주 인근에 있는 작은 평야에서 그들은 만났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놓인 고급스러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고수들이 저마다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허허허, 이런 일로 천마신교의 교주와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소이다.”
“그것은 본좌도 마찬가지외다.”
며칠 전부터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협정서의 초안을 놓고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다퉜었다. 양쪽이 글자 하나를 가지고도 갑론을박해서 결국 양쪽 다 만족할 수 있는―하지만 양쪽 다 만족할 수 없는―그런 협정서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만들어 놓은 협정서는 2부가 제작되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양측 대표단이 싸울 만큼 다 싸운 상태였기에, 두 거두는 시시한 글자 하나 가지고 쪼잔하게 싸울 필요 없이 우아하게 인장만 찍은 후 헤어지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는 협정서에 서명한 후, 서로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중원을 오랑캐 따위에게 넘겨 줘서야 되겠소? 잘해 봅시다.”
“하하핫, 물론이야. 감히 중원을 넘본 것을 후회하게 해 주지.”
악수를 하며 나누는 서로의 인사말은 따로 놀 수밖에 없었다. 중원을 걱정하는 무림맹주의 생각과 달리 묵향의 목표는 오로지 장인걸 하나였기 때문이다. 금은 그를 없애는 데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피차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마교와 정파는 불과 물의 관계. 설마 그 누가 마교와 무림맹의 연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양측의 거두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앞으로 두 세력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묵향19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