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천하
정사를 대표하는 거두들이 사이좋게 협정서를 교환한 역사적인 날, 묵향은 바로 그날 흑풍대를 파견한 후 다음에 시행할 작전을 수립한다고 바빴다. 그렇다면, 철천지원수지간인 양쪽이 협정서를 맺도록 도와준 옥화무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양쪽에서 사례로 받은 선물들을 앞에 수북이 쌓아 두고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을까? 사실 그러고 있어야 함이 정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끓어오르는 울화를 삭이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옥화무제는 이가 갈리는 듯한 암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요?”
옥화무제의 질책에 총관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남경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식을 올렸다고.”
옥화무제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만큼 지금 총관의 보고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강의 변으로 황제와 상황제 그리고 대소신료들은 모두 다 금에 잡혀가 버렸어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황실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무조건 즉위식만 올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걸 본문이 주도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요?”
“하, 하지만 정강의 변 이래 워낙 많은 일들이 갑작스레 벌어졌고…, 그리고 태상문주님께서도 자리를 비우셨던 터라…….”
콰직!
옥화무제가 움켜쥐고 있던 의자의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울화를 참지 못한 옥화무제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너무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쩔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는 이를 으드득 갈며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리 본녀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걸 주도할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꽝!
그녀의 분노 어린 주먹에 탁자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순간 보고를 올리던 총관은 찔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옥화무제는 그런 총관을 한동안 못마땅한 듯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하의 모자람을 이제 와서 탓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휴우∼, 본문의 규모는 더욱 커졌지만, 너무나도 인재가 없군요, 인재가…….”
자신의 딸인 문주라도 그녀가 없는 동안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영문이 환관 동관을 배후에서 움직여 천하를 농락할 수 있었던 것도 옥화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화무제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옥화무제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무영문에 한 명 더 없다는 사실이.
황제, 상황제와 함께 고위 관료 3천 명이 금에 끌려가 버린 지금 송은 먼저 황제를 즉위시킨 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영문은 정보 단체인 만큼 끌려가지 않은 모든 황족들의 위치도 알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황제로 즉위시킬 힘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무영문이 비상할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런 옥화무제의 분노 어린 눈길을 받으며, 총관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 양 고개를 들지 못했다. 총관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옥화무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총관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딸인 문주의 잘못이요, 또 손녀인 부문주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문주와 부문주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고 있는 그 나이만 헛먹은 장로들의 잘못이기도 했다.
노력은 했지만, 아직 울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는지 옥화무제의 목소리는 거칠게 흔들렸다.
“그래, 누가 신황제를 옹립하는 데 주축이 된 것인가요?”
“진회(秦檜)라는 자입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철저히 조사해 보세요.”
“이미 조사해 보라고 일렀습니다. 현재까지 올라온 자료를 봤을 때, 지방의 하급 관료로서 그렇게 특별한 데는 없는 인물인 듯합니다.”
총관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이제는 허탈한 심정까지 드는 옥화무제였다. 아예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지방의 하급 관료 따위가 황제를 옹립하다니.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 그런 인물이 황제를 옹립하도록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니…….”
총관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접촉을 한번 해 보세요. 이렇게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예,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태상문주님.”
“아참, 그리고 혹시 신황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황족이나 세력이 있는지 조사해 보도록 하세요. 만약 진회라는 자가 우리와 손을 잡기를 거부한다면 그쪽으로도 생각해 봐야 할 테니까요.”
“옛.”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관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재빨리 문 쪽으로 갔다. 밖에 서 있던 문사 차림의 중년인 하나가 총관이 나오자마자 귀에다가 뭔가 소곤소곤 소식을 전한 다음 총총히 물러갔다. 총관은 재빨리 되돌아와 태상문주에게 방금 들어온 정보를 전했다. 마교와 관련된 특급 정보였던 것이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마교의 흑풍대가 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교에 흑풍대라는 단체가 있음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20여 년 전 마교의 내분 때만 활약했을 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영문의 경우, 마교에 대해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건 묵향의 공포스러운 능력을 일찍이 간파한 옥화무제의 명에 의해, 마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보를 긁어모았기 때문이다.
“흑풍대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이미 옥화무제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교의 실질적인 목표는 금이 아니라 장인걸이었다. 장인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교가 개입했다는 것을 눈치 챈다면 모종의 대비를 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미리 차단하려면 장인걸의 촉각에 걸리지 않을 만큼 마교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강력한 단체를 파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은 마교 내에서 흑풍대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흑풍대의 간부들은 모두 다 찬황흑풍단의 무장 출신이었다. 금군을 상대로 한 대규모 접전에도 경험이 풍부할 것이 분명했다.
“예, 난주 인근의 관도를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인 것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옥화무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흑풍대는 통상적인 마교의 단체들과 달리 엄청난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데다가 기마대이기에 아주 눈에 잘 띄는 무력 단체였다. 그런 그들이 십만대산 주위가 아닌 난주 인근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마교와 무림맹이 협정서를 조인하기 훨씬 이전에 흑풍대가 움직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난주 인근이라고 했나요?”
“옛, 태상문주님.”
“흠, 그렇다면 그 정도 병력이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규모의 비밀 분타가 그 근처에 있다는 말이군요. 몇 개 조를 투입해서 비밀 분타의 위치를 파악해 두도록 하세요.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옛.”
묵향이 이토록 빨리 움직이기 시작할 줄이야. 물론, 장인걸에게 하루라도 빨리 복수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묵향이 장인걸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을 때, 바로 그때가 금이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다. 장인걸 없이 금이 버틸 재간은 없을 테니 말이다.
금의 멸망.
“뿌드드득!”
금에 대한 일만 생각하자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그녀의 이빨이 갈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금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던가. 그녀 또한 묵향 못지않게 금에 대해 원한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흑풍대가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주도록 하세요.”
“옛.”
“그리고 난주 쪽에서 중무장을 한 기마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장인걸이 괴이하게 생각할 거예요. 이쪽에서도 수많은 첩자를 운용하고 있듯, 저쪽의 첩자들도 사방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들의 첩보망을 철저히 교란하도록 하세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묵향에게 먼지 나게 쥐어 터지진 후, 초류빈은 또다시 심기일전하여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는 그 꿈에 볼까 두려운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그 말에 혹해서 이곳까지 따라왔는지. 내가 미쳤지, 젠장!”
초류빈은 식사를 마친 후, 식사와 함께 보내진 독한 화주 세 병을 마시며 푸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을 다시 만난 이후부터 느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주량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솔잎을 헤아렸다는 것은 순 거짓말인 것 같고, 뭔가 엄청난 무공을 비밀리에 수련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아무리 주량이 늘었다지만 안 좋은 기분에 독한 화주를 계속 마시자 취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하지만 내공을 일으켜 억지로 취기를 억누르지는 않았다. 취한 기분에 속에 있는 불만을 이렇게라도 토해 내지 않으면 울화가 쌓이고 쌓여 주화입마라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술병을 들어올려 벌컥벌컥 들이켠 후, 초류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울분에 찬 어조로 외쳤다.
“화경에 들었다면 그래도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강자잖아, 젠장. 그런데 화경에 들면 뭘 해!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는 통하지도 않는데. 그나마 성격이라도 좋으면 스승처럼 모시며 존경심이라도 갖지.”
혼자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또다시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기가 오르자 슬슬 속에 쌓여 있던 불만이 거친 욕설과 함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아, 그나저나 예전에 사부가 말씀하시기를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성을 제대로 닦아야 한다더니 말짱 다 개소리였어. 그렇지가 않다면 저 극악무도한 놈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명이 안 되잖아.”
초류빈은 묵향을 만나기 전까지 무공을 사사받았던 예전의 사부, 즉 초씨세가의 전대 가주의 말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사부는 어느 정도의 무공까지는 숙달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겠지만, 그 한계를 뚫고 깨달음을 얻어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자연의 이해와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면서 명상을 통해 자연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곧 초류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딴 성찰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묵향에게 맞지 않겠다는 일념, 그것 하나만으로 악착같이 무공을 익혀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우∼,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내 창창한 인생도 이렇게 비루하게 썩다가 종치게 되는구나. 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빌어먹을 새끼!”
얼큰하게 취한 초류빈이 묵향을 떠올리며 이를 갈 때였다.
“뭐시라?”
갑자기 등 뒤에서 치미는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괴이한 울림을 간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바로 뒤에 누군가 있었다. 초류빈은 순간 취기가 확 달아나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있어서 자신의 지척까지 기척을 숨기고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도(刀)를 움켜쥐며 재빠르게 뒤로 돌아서며 외쳤다.
“누구?!”
퍽!
초류빈은 순간 머리를 뒤흔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호되게 가격당했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돌아섬과 동시에 머리를 공격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픔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화경에 다다른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초류빈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억지로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만큼 그 목소리가 전해 주는 공포감은 소름 끼칠 만큼 끔찍했던 것이다.
“네놈이 본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애써 무공도 가르쳐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더니 하는 소리 봐라! 오냐, 안 그래도 장인걸 그놈 때문에 짜증이 났었는데. 마침 너 잘 걸렸다. 이 배은망덕한 놈, 어디 죽어 봐라.”
순간 초류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그토록 무공을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묵향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상대에 대해 아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라는 자각보다는 상대가 안겨 주는 공포감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묵향이라도 화경에 오른 초류빈의 감각을 속이고 이토록 가깝게 접근해 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초류빈이 정상적일 때의 얘기다. 지금처럼 술에 취해 있을 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묵향을 따라 마교에 들어온 후, 초류빈이 매일 당한 것은 지독한 구타였다. 일단 몸이 느껴야 대성한다는 괴상한 지론 아래 묵향은 초류빈에게 비무 아닌 비무를 강요했다. 그 덕분에 초류빈의 무공이 급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는 묵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지금까지 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더욱 높은 경지의 무공을 연성하려고 노력해 온 것도, 다 이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초류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묵향에게 변명하려고 했다. 안 그러면 맞을 테니까 말이다.
“저, 제가 잠시 술에 취해서 미쳤나…….”
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분노에 찬 묵향의 발길질에 무자비하게 짓밟혀야만 했다.
퍽! 퍽!
“으아아악! 제발 한 번만…….”
초류빈은 아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최대한 몸을 움츠려 맞는 부위를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묵향의 무자비한 구타에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지만 설마 그것이 묵향의 분노를 더욱 돋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호오, 호신강기(護身剛氣)? 몇 대 쥐어 패고 용서해 주려 했더니 감히 호신강기를 일으켜 저항을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초류빈은 자신이 왜 그토록 기를 쓰고 무공을 익혔는지 새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켰나?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초류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빨리 묵향의 분노가 끝나기만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사실 묵향이 자신을 죽이자고 패는 것도 아니었고, 그도 구타라면 당할 만큼 당한 강골이 아닌가. 묵향이 처음에 초류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때 우선 몸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 진전이 빠르다며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기 때문에, 맞는 것이라면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다.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통증을 최소화하는 기법에 있어서는 아마 무림 내에서 초류빈을 따를 자가 없을지도 몰랐다.
초류빈은 적당히 비명도 질러가며 묵향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이쯤 했으면 화가 풀릴 때도 됐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묵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는 생각이 들자 초류빈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했다.
“잘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해 그만…….”
“호오, 아까는 극악무도한 성격이라며?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평상시에 생각하는 내 모습이 그런 모양인데 말이야.”
초류빈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제가 감히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본교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신 지존께 제가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잘못 들으신 거겠죠.”
넉살 좋은 그 말에 묵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어엇? 이 녀석이 무공은 안 늘고 아부만 늘었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말은 진실이라니까요.”
어차피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묵향은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초류빈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나 좀 따라와라.”
“예? 어, 어디 가십니까?”
“이번에 일이 생겨 몽고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자니 심심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명색이 부교주라는 놈이 허구한 날 처박혀서 밥만 축내고 있지 말고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묵향의 말에 초류빈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쉽게 말해 몽고까지 가며 심심하면 쥐어 팰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마교 내에서 묵향의 등쌀에 견딜 수 있는 자라고 해 봐야 자신과 천리독행 정도였다. 하지만 천리독행은 몸이 완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만한 건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초류빈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묵향의 심기를 건드려 매를 버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이죠, 교주님. 하명만 하십시오.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싫어도 초류빈은 눈물을 머금고 묵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젠장, 화경에 오르면 편할 줄 알았는데, 어째 좀 더 귀찮아지는 것 같단 말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