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정원에는 제철을 만난 듯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 아니던가.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연못 위로는 잠자리들이 쌍으로 날아다니며 알을 낳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 경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연못 앞에 선 사내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연못에는 수많은 잉어들이 푸른 물살을 헤치며 우아하게 떠돌고 있었지만 그 모습 또한 수심 어린 그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가주,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여기 서 계신 것이오?”
하지만 가주가 가만히 서 있자 중년 여인은 가주에게 다가가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 어찌 그리 수심에 찬 표정이시오?”
가주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대꾸했다.
“아, 어머님께서 나오셨습니까?”
가주의 어머니 매화검(梅花劍) 이옥연(李玉然)은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남궁세가를 떠받치고 있는 네 명의 장로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남궁세가를 이끌어가는 가주였기에 그녀는 아들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게요?”
“워낙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금 때문인 게요?”
“예.”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옥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림맹주가 마교와 연합을 결심할 정도니, 그들의 세력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더구려. 하지만 지금껏 무림은 황실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지 않소?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어머니. 하지만…, 5대세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세가에서도 문주께서 직접 가신들을 이끌고 참전하시겠다고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각 세가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였다. 사실 5대세가라고 불린다고 해서 얻는 것은 명성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림세가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것이 사실이었고, 그들의 행보에 모든 세가들의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가들과 달리 서문세가만은 그중에서 특별한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세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유일하게 화경의 고수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서문세가는 5대세가의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는 종리세가와 사돈지간을 맺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면 당연히 종리세가도 함께 움직일 것이다. 또 종리세가가 움직인다면 종리세가의 가주 패도(覇刀) 종리영우(鍾里英優)와 의형제를 맺은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覇劍天嶺) 제갈기(諸葛琦)도 움직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수라도제의 뜻에 따라서 5대세가 중 셋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서문세가의 움직임이 모든 세가들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으응? 수라도제 어른께서?”
이옥연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노회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수라도제가 움직임으로 인해 그에 동참할 세력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확인시켜 주듯 가주의 말이 이어졌다.
“예, 패도 어르신께서도 동참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조만간에 제갈세가나 다른 세가들에서도 동참할 거라는 통지가 올 것이 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가만 몸을 사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가주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해서 금을 중원에서 몰아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오랑캐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 사람들은 모두 황실로부터 큰 포상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멀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실패했을 때라는 가정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주의 생각은 어떠신 게요?”
“소자는 한 팔을 보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서문세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훨씬 피해가 적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에 찬성한다는 듯 매화검 이옥연은 고개를 살짝 끄떡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시오?”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창궁18수를 포함해서 1천 정도를 거느리고 나갈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옥연의 아미가 꿈틀했다.
“가주가 직접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시오? 본가의 과거를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가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본가가 어떻게 될지를 말이오.”
이옥연의 근심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남편, 즉 전대 가주를 잃은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가 혈기방장하기는 했으나 근심에 젖어 있는 어머니의 눈을 보면서 차마 다시금 자신이 직접 나가겠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가주를 향해, 이옥연은 슬픈 눈빛으로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주는 한숨을 내쉬며 연못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천풍검(天風劍) 곡추(曲抽)에게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그제서야 이옥연은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시었소. 그러시는 것이 좋겠지요.”
남궁세가가 양양성으로 고수들을 파견하기로 의견을 모았듯이, 무림 전역의 다른 문파들도 양양성으로 문파의 정예들을 출발시켰다. 그것이 현재 무림의 대세였고, 또 무림맹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물론,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파 계열의 문파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천마신교가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망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서를 조인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극비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파의 핵이라는 무림맹도 마교와 손잡았다는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교 또한 장인걸의 이목을 의식하여 그것을 비밀로 숨겼기 때문이다.
협정서가 조인된 지 며칠이 지난 후, 테무진에게 지원할 방대한 양의 물자가 준비되자 묵향은 초류빈과 함께 몽고로 출발했다. 식량 및 무기 등을 실은 마차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가 테무진에게 지원할 물자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자성만마대가 호위했다. 그리고 그 일행의 가장 앞에서 수송대를 지휘하는 이팔삼(李捌三)은 뒤쪽에서 희희낙락하며 따라오고 있는 상관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겨우 자성만마대의 제12대장 따위가 교주와 부교주를 호위하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기회에 교주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에 무영신마 장영길 장로는 함께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이번 호위는 자성만마대의 겨우 1개 대 5백 명만 출동하게 되었다. 자성만마대의 전력이 고스란히 총단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알 수가 없는데 대주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처지가 달랐다. 모두들 힘든 여정이 될 것이 뻔한 이 일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책임 떠넘기기를 거듭하다가 결국 선택된 인물이 바로 자성만마대 제12대장 이팔삼이었다.
자성만마대라면 마교의 무력단체들 중에서 흑풍대를 포함해서 가장 하급에 놓이는 두 단체들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들 중에서 5백 명을 거느린 대장이라고 해도 무림에서 말하는 신검합일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지고한 두 양반을 모시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교주와 함께 가고 있는 초류빈 부교주의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떨떠름한 면상으로 봤을 때, 그가 결코 기분 좋아서 따라나서는 것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나선 묵향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아갈 듯한 상태였다. 사실, 그와 같은 승부사에게 있어서 교내에 틀어박혀 수하들과 각종 전략과 전술 그리고 모략을 세우는 것은 영 취향에 맞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충 둘러 대고 교 밖으로 나서니 이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행하기 정말 좋은 날이로군.”
하지만 묵향의 말과 달리 하늘은 잔뜩 구름이 끼어 있어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뚱한 표정으로 초류빈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묵향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어조에 무시 못 할 여운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이 좋은 날씨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한데. 너, 혹시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냐?”
묵향의 기색이 영 심상치 않아 보이자 초류빈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한번 개겨 봤다가 무려 두 시진을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오로지 아부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제가 감히 교주님께 불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변의 풍경이 워낙 뛰어나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입니다. 교주님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해가 나오지도 않았으니 덥지 않아서 좋고, 바람도 부니 선선해서 좋고, 비도 내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이때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류빈은 급히 덧붙였다.
“허,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정취까지 더해 주는군요.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술 한잔하면 얼마나 끝내 주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놈도 나하고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역시 교내에 처박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앞으로 일이 없더라도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군.’
아마 초류빈이 묵향의 속마음을 알았으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호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묵향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초류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할 텐가?”
묵향의 제안에 초류빈은 넙죽 술병을 받아 들었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에라이, 아무리 구타가 무섭다지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아부를 못하겠군.’
묵향이 건네주는 술병을 받아 초류빈은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한 모금 들이킨 초류빈의 표정이 묘했다. 술이 입에 쩍쩍 달라붙었던 것이다.
‘오호, 이거 정말 좋은 술이군. 나는 싸구려 백주나 마시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놈은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젠장,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단 말씀이야.’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팔삼은 기겁을 하고 달려왔다.
“교, 교주님.”
다급히 달려온 이팔삼 대장의 말에 묵향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옛, 근처에 꽤 유명한 주루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행렬을 잠시 이곳에서 머물게 한 후, 주루까지 호위해 드리면 될 것이라는 이팔삼 대장의 생각이었다. 하늘같은 교주님께서 이렇게 노상에서 술을 드신 것을 만약 교의 윗사람들이 알게 되면 교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크나큰 문책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히 자성만마대의 대주인 장영길 장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장영길 장로의 경우 한때 장인걸의 수하였다가 교주님의 은혜를 받아 합류한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묵향과 행동을 같이했던 일부 장로들과 비교한다면 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교주께 과잉 충성하려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교주의 반응은 이팔삼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닐세. 갈 길이 급한데 그럴 필요 없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이팔삼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곧장 수하에게 명령했다.
“이봐, 빨리 가서 교주님께서 드실 만한 고급 안주 몇 가지를 챙겨 오도록 해라.”
“옛.”
하지만 수하가 명령을 받고 달려가려는 순간, 묵향이 말했다.
“어허! 그럴 필요 없대도 그러는군. 본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면서 묵향은 품속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걸 쭉 찢어서 초류빈에게 한 토막을 건네준 후 말을 이었다.
“본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그래도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육포를 질겅거리며 씹고 있던 초류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괜히 부담가지지 말고 자네 일이나 보게. 교주님께서는 먼 길을 가며 갖은 고생을 하게 될 자네들을 배려하여 하시는 말씀이니 부하들이나 잘 챙겨 주게나.”
이팔삼은 왠지 모를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와 같은 하급 고수가 교주님이나 부교주님 같은 지고한 존재들을 가까이서 볼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분들을 이렇듯 가까이서 뫼시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동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너무나도 소탈하지 않은가. 마교 내에서 서열 1백 위권만 되더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움직이려 한다. 심지어는 수하들을 마소쯤으로 생각하는지 여덟 명의 고수를 시켜 가마를 메도록 하고는 타고 다니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분들은 마교의 하급 고수들처럼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먼 길을 가게 되는 수하들을 배려하는 저 깊고 깊은 마음……. 저런 분들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 바친다 한들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묵향과 초류빈을 향해 마음속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이팔삼 대장이었다.
화려한 명판과는 달리 대원루(大原樓)는 조그마한 객잔이었다. 객잔 주인인 방 노인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보며 혀를 찼다.
“에잇, 젠장.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오늘 손님 받기는 글렀구먼.”
웬만큼 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굵은 빗줄기를 뚫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법이다. 이제 해가 지려는 참이었기에 사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이만 끝인 모양이다. 문 닫을 준비하거라.”
“예, 나으리.”
점소이는 방 노인의 지시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한참 점소이가 지저분한 곳을 쓸고 닦고 있는데, 마을로 1백여 대에 달하는 마차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의 수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방 노인은 재빨리 점소이에게 외쳤다.
“손님 받을 준비하거라. 주방 화로에 장작 좀 더 집어넣으라고 이르고, 빨리!”
얼핏 본 것만 해도 마차와 함께 마을로 들어온 무사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이 마을에 몇 개 있지도 않은 객점이나 객잔들은 모두 다 다음 날 아침까지 그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마을에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커다란 객잔이 없으니 말이다.
잠시 후, 온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인물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쇼! 자, 모두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폭우를 뚫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방 노인은 처음에는 그들이 표사들인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 노인은 곧이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손님들의 몸에서는 사람을 억누르는 것 같은 괴이한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사들은 절대로 몸에서 저런 기운을 뿜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방 노인의 손님 대하는 태도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객잔 안으로 들어선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초립을 벗어 탁자 옆에 놨다. 그것을 본 점소이는 재빨리 두 사람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사람이 많은 만큼 빨리빨리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드릴깝쇼? 손님.”
점소이가 방글거리는 얼굴로 말을 걸었지만 오히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상대가 대꾸했다.
“야, 비 맞은 사람 처음 보냐? 뭐가 좋아서 헤실거리는 거야?”
그러자 그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봐, 비에 젖는 것이 싫으면 내공으로 튕겨 버리면 될 일이지, 그냥 다 맞아 놓고 왜 이제 와서 점소이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거야?”
체격은 앞에 앉아 있는 사내에 비해 왜소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약간 비굴한 표정으로 꼬리를 말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교주님께서 그냥 맞으시는데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수하들도 다 저와 같은 생각으로 비를 맞았을 텐데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군. 누가 맞으라고 했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음식이나 시켜.”
“예? 예. 이봐, 오리탕하고 술 좀 가져와.”
점소이가 한눈에 척 봐도 그들 간의 상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객잔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무사들로 꽉 차 있었지만 유독 이 둘이 앉은 자리에는 그 누구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이 두 사람이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소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점소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주문을 받지도 않고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주방장에게 처음에 주문하는 오리탕 두 그릇은 가장 신경 써서 만들라고 덧붙여 주문했다. 겉으로는 안 그렇게 보였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점소이는 거친 무사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