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8화 (454/930)

이어지는 인연

며칠 후, 국경을 넘은 묵향 일행은 길 안내를 하기 위해 비마대에서 파견된 막이첨(莫理甛)의 안내로 몽고 벌판 깊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몽고 여인과 중원인의 혼혈아였는데, 그 때문인지 몽고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그쪽의 풍습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해박했다.

몽고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대한 평원이겠지만, 그들이 이동하는 이곳은 몽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싱그러운 초목이 여기저기에 우거져 있었다. 몽고 남쪽은 몽고 전역에 비해 비교적 숲이 많이 우거져 있었고, 물도 흔한 편이었다.

막이첨은 이팔삼 대장하고 낮은 목소리로 뭔가 속닥거리더니 묵향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이 일대는 전부 케레이트 부족의 지배자 옹칸의 영역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송과 교역을 해 온 인물이기에 아무래도 그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고 통행권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뇌물을 요구한 관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에 대해 이팔삼 대장에게 들은 막이첨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몽고에서도 강행 돌파를 시도하자고 한다면? 이번 일은 대단히 어려워지면서도 귀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본교의 힘이라면 그렇게 안 하고 강행 돌파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말을 구입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묵향은 알아서 하라는 듯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몽고에 왔으면 몽고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순리겠지.”

뇌물을 주는 것은 순리가 아니었기에 쓰레기들에게 돈을 바칠 이유가 없었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는 묵향의 대답이었다. 묵향의 말에 막이첨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이팔삼 대장에게 전하겠습니다.”

뒤로 돌아서며 막이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자신들의 힘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문제는 말을 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케레이트 부족의 본거지에 도착한 후, 묵향은 이팔삼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네가 옹칸을 구워삶도록 하게. 선물은 준비해 왔겠지?”

“옛, 걱정 마십시오.”

명령을 받은 이팔삼은 수하 몇을 거느리고 옹칸이 기거하는 궁전으로 갔다. 대부분의 몽고 족장들은 궁전 따위를 건설하지 않았다. 궁전을 만들 물자도 없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궁전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옹칸은 달랐다. 그의 수입원 중에서 가장 굵직한 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역이었다. 시장은 언제나 한곳에 고정해서 열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보호해 줘야 했다. 그렇기에 작은 궁전을 만든 것이다.

이팔삼은 통역관으로 막이첨을 거느리고, 수하 몇 명에게 성대한 선물을 들게 하여 옹칸을 배알하러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묵향은 이팔삼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수하들과 함께 마〔馬〕 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묵향이 몽고어를 구사하며 상인과 거래를 시작하자, 그를 수행하고 있던 수하들은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마신교에서 교주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런 분께서 몽고어를 구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 묵향이 기억을 잃었을 때, 옥영진 대장군 밑에서 일하면서 몽고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하부르라는 몽고 처녀와 함께 생활하며 꽤 많은 몽고어와 함께 몽고의 풍습도 배워 둔 것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묵향이 기억을 상실하며 잠시 잊혀졌었지만, 아르티엔이 기억을 몽땅 되살리며 모든 것을 되찾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막이첨이라는 통역관이 있었기에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았지만, 그가 없는 지금 묵향은 직접 상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몽고마는 작고 다부지게 생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생긴 대로 아주 끈질긴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가기에 최악의 조건에 가까운 몽고의 대지에 적응해서 살아오다 보니 그런 식으로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고마는 그 작은 덩치 때문에 송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싸구려 짐말 정도로 쓰기 위해 수입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당당하게 전투마로 활용되고 있었다.

묵향이 사들인 몽고마의 수는 무려 3천 필. 그날 마 시장에 나와 있는 거의 대부분의 몽고마를 사들인 수였다. 묵향은 수하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한 필씩의 말을 지니고, 남은 말들에게는 중원에서 가져온 화물들을 실었다. 수레 1백 대분의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2천5백 필에 달하는 말에다가 나눠 싣다 보니 각 말 등에 실린 분량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마차들은 모두 표국 등지에서 빌린 것들이기에 몽고 접경에서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했다. 묵향이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마부들에게 품삯을 나눠 주고 있을 때, 이팔삼이 돌아왔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예,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 줬습니다.”

“수고했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하지.”

“옛.”

막이첨의 인도로 묵향 일행은 몽고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테무진이라는 족장이 있는 곳은 몽고의 동북부였다. 그런 만큼 오랜 시간 몽고 벌판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묵향이 지휘하는 자성만마대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져가는 화물을 노린 몽고족들의 공격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몽고족들은 막심한 피해만 입은 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력(武力)에서 쌍방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몽고족들의 공격을 가볍게 물리치는 것으로 그쳤지만, 그게 자꾸 반복되자 짜증난 묵향이 공격해 들어온 몽고족을 철저하게 응징해서 본보기를 보였다. 그때 죽인 수백 명이나 되는 몽고족의 시체를 갈기갈기 토막 내어 여기저기에 흩뿌려 놨던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또 다른 몽고족이 있으면 보라는 듯.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들을 건드리려는 간 큰 몽고 부족은 없었다. 설혹 그 와중에도 습격해 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던 몽고 부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중원 상단과의 격전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이 그때의 참담한 전투 상황을 사방에 알렸다.

생존자들의 증언까지 듣고 나서도 중원 상단을 건드릴 뜻을 굽히지 않는 몽고 부족은 없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집단을 상대로 감히 도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방에서 약 1천 기의 몽고병들이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이팔삼에게 명령했다.

“호오, 오랜만에 손님이 오시는군. 이팔삼 대장! 손님 맞을 채비를 해라.”

그 말에 이팔삼은 긴장된 표정으로 명령했다.

“모두들 전투 준비를 갖춰라. 8개 조는 앞으로, 2개 조는 말을 보호한다.”

묵향은 초류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씩 미소 짓고는 말했다.

“심심할 텐데 자네도 따라가서 몸 좀 푸는 게 어때? 요즘 할 일도 없었잖아.”

초류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공손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실 그처럼 뛰어난 고수가 덜떨어진 몽고 병사들하고 싸워 봤자 식후 운동거리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부대로 시행합죠.”

초류빈은 4백의 자성만마대 대원들을 이끌고 앞서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짐작과는 달리 이번에 접근한 무리는 약탈을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보급물을 싣고 오는 묵향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테무진이 부하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몽고 기병들은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몽고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손을 위로 들자 그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우두머리인 몽고 병사는 말에서 내린 후 걸어서 초류빈에게로 다가왔다.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보고 초류빈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공격할 의사는 없는 모양인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초류빈의 말에 이팔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테무진의 영역이 멀지 않았다고 막이첨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테무진이 보낸 사람이 아닐까요?”

이때, 자신들에게 다가오던 몽고 병사가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 사이사이에 ‘테무진’이라는 말이 끼어 있었다.

“자네 추측이 맞는 모양이군.”

초류빈은 말에서 내려 몽고 병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팔삼이 따르고 있었다. 몽고 병사는 처음 보는 중원풍의 복장을 한 사내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지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가죽 부대를 초류빈에게 건넸다.

“이, 이게 뭐지?”

초류빈은 이팔삼을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그라고 상관이 모르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몽고 풍속에 능통한 막이첨은 지금 뒤에 남아 있었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하라고?”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몽고 병사는 손짓으로 그것을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초류빈이 가죽 부대를 슬쩍 흔들어 봤다. 뭔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듯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아아, 먼 길을 왔으니 물이나, 술을 대접하는 것인 모양이군. 아주 독특한 풍습이네.”

기세 좋게 마개를 열고 한 모금 입속에 넣었던 초류빈은 하마터면 입속에 들어온 액체를 푸학하고 토해 낼 뻔했다. 이 느끼하면서도 괴이한 맛과 역한 냄새는 도무지 인간이 참고 마실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류빈이 누구인가. 그는 마시는 척하면서 입속에 들어온 액체를 다시 혀로 슬슬 밀어 가죽 부대 속으로 원상 복귀시켰다. 그런 다음 신나게 목젖을 움직여 벌컥벌컥 마시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마유주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몽고 병사를 향해 한껏 잘 마셨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초류빈은 이팔삼을 슬쩍 쳐다봤다.

‘망할 자식. 혹시 알면서 나한테 엿 먹으라고 가만히 있었던 거 아냐?’

이상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초류빈은 그 가죽 부대를 이팔삼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하게. 환영의 표시니 맛나게 마셔 주는 게 예의겠지?”

말이야 그렇지만 초류빈의 어감은 이거 맛나게 안 마시면 반쯤 죽여 주겠다는 협박의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이팔삼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이팔삼은 초류빈이 자신에게 가죽 부대를 건네주자 가슴이 뛰었다. 자신과 같은 하급 무사가 하늘 같은 부교주님과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영광이 아닌가. 그런데 가죽 부대를 건네는 순간 초류빈의 말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이팔삼이었다. 그는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가죽 부대를 받아들었다.

“옛, 감사합니다, 부교주님.”

그는 가죽 부대를 받아 입가로 가져가며 슬쩍 냄새를 맡아 보았다.

‘허억! 이 무슨 이상야릇한 냄새더냐!’

이팔삼은 그제서야 초류빈이 가죽 부대를 건넬 때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냄새만 맡았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가죽 부대를 입가로 가져갔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교주가 마시라면 마시는 거다. 설혹 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다고 해도 맛나게 마셔야만 한다. 이팔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죽 부대를 곧장 입으로 가져가 사력을 다해 벌컥벌컥 들이켰다.

곧이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괴상한 맛과 향에 독극물이라도 들어온 듯 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토해 낼 수는 없었다. 이팔삼은 필사적으로 구토를 참아 냈다. 사나이 이팔삼, 여기까지 와서 상관에게 맞아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모금이나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배가 불러올 때쯤 되어, 위장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지, 아니면 헛된 저항을 포기해 버렸는지 잠잠해진 지 오래다. 이팔삼은 가죽 부대를 몽고병에게로 다시 넘겼다. 트림이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괜히 트림을 하다가 마유주가 뿜어져 나올까 봐 이팔삼은 배에 힘을 꽉 주고 참아 버렸다.

이팔삼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억지로 활짝 미소 지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곧바로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류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던 그 뭔가를 저놈은 아주 맛있다는 듯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자신이 겪었던 그 고통을 네놈도 어디 한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에서 가죽 부대를 건넸던 것인데 저렇게 맛있게 마시다니…….

‘거참 이상하네. 혹시 냄새가 약간 고약해서 그렇지 맛은 아주 괜찮았던 게 아닐까?’

가죽 부대를 바라보며 별의별 생각이 초류빈의 뇌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환영의 의미로 준 마유주를 이렇듯 호쾌하게 들이키자 몽고 병사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 환한 웃음을 되돌리며 자신도 벌컥벌컥 마유주를 들이켰다.

묵향이 거느린 본대가 도착한 후에야 막이첨이 달려 나와 몽고 병사들과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교주님, 저자는 젤메라고 한답니다. 주군인 테무진의 명을 받들어 교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묵향도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막이첨의 통역을 다 듣고 난 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좋아. 자, 가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반나절 동안 벌판을 더 가로질러 간 후에야 묵향은 테무진을 만날 수 있었다. 테무진은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모든 근육이 잘 발달한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묵향이 가져온 물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기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만 해도 수천 필이다. 이것만 해도 자신의 세력이 월등하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테무진은 상대의 저의를 알고 싶다는 듯 길게 째진 눈으로 슬쩍 묵향을 살펴보았다.

“서로 간의 동맹을 위해 이렇듯 먼 길을 와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바이오.”

테무진은 묵향이 자신의 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인이 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자신이 지닌 검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검은 나의 아버지 예수게이께서 사용하셨던 검이오. 아주 훌륭한 보검이지 않소?”

물론 그 모든 말은 사이에 끼어 있는 막이첨이 즉시 통역해 줬다. 테무진의 말을 들은 묵향의 눈에는 짙은 감회가 서렸다.

어찌 그가 그 검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옥영진 대장군이 자신에게 사용하라고 줬던 청성(淸性)이라고 하는 검이었다. 황제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한 것인 만큼 장식이 아주 호화로운 검이었다. 그렇다 보니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검을 과거 하부르를 맡긴 사내 녀석에게 줬었지. 용의 눈을 가지고 있던 뛰어난 아이에게 말이야. 저놈은 아마 그 녀석의 아들인 모양이군. 아무리 봐도 그 녀석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옥영진 대장군의 휘하에서 싸우던 일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용의 눈을 지니고 있던 그 아이는 요절하고 말았구나.

하부르…….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가 그녀석이 다스리던 부족이라면 그녀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녀도 결혼했을 테고 아마 아이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묵향은 하부르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적인 감정은 제쳐 놓고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했다.

“쓸 만한 검이긴 하군. 하기야 황제가 준 검이라고 옥 대장군에게서 들었는데 나쁜 것일 리가 없지. 사실 그때 그놈에게 선물하기는 좀 아까운 검이었어. 그건 그렇고, 멍청한 몽고 놈 주제에 본좌와 동맹을 맺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이만한 물자까지 힘들여 운반해다가 안겨 줬으니 목숨을 걸고 본좌에게 충성해야 해. 알겠나?”

동맹을 맺은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저놈은 한어를 단 한마디도 모르는데 말이다. 황당하다는 듯 교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막이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대로 통역할까요?”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 사소한 것까지 본좌가 일일이 다 가르쳐 줘야겠냐?”

막이첨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교주님.”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테무진을 바라보며 유창한 몽고어로 말했다.

“저희 교주님께서는 당신처럼 뛰어나고 용맹스런 부족장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소이다. 더불어 당신이 다스리는 부족과 동맹을 맺게 되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셨소.”

막이첨의 통역을 들은 테무진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이오?”

“우선, 본좌가 원하는 것은 타타르 부족의 멸망이야.”

막이첨의 통역에 테무진의 눈이 번쩍 빛났다. 타타르 부족이라면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가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그게 다는 아니야. 타타르가 멸망하면 네 녀석의 영토는 금과 맞닿게 되겠지. 안 그래?”

테무진은 불신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금을 치라는 말이오이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건 터무니없는 요구요. 금은 워낙 강성한 제국이라 우리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귀하도 잘 알지 않소.”

테무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이 멍청한 녀석이 아주 성급하게 판단하는군. 내 말은 금을 공격해서 멸망시키든지, 아니면 영토를 점령하라는 말이 아니야.”

테무진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 달라는 말이시오?”

“금과 몽고의 국경선은 아주 길지. 이곳저곳 금군의 경계가 약한 곳을 골라서 약탈하고 도망쳐 달라는 말이야. 금군과 치고받으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 정도도 생각 못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구먼.”

막이첨의 통역을 듣던 테무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일이라면 이자가 부탁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척박한 몽고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주위를 약탈해서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자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해 줄 수 있소이다.”

“하하핫, 좋아. 자네와 나의 이해가 합쳐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군. 나야 네놈이 금나라 놈들과 치고받다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네놈은 몸을 아끼지 말고 열심히 금의 국경을 괴롭혀야 돼. 알겠나?”

묵향과 테무진의 사이에 끼어서 열심히 통역을 하는 막이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묵향의 거친 말을 최대한 정중한 용어로 바꿔, 다시 테무진에게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테무진은 호탕하게 웃은 후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자, 부하들에게 귀한 손님들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일렀소.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일단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묵향은 지금껏 테무진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혹시 이 부족에 하부르라는 여자가 살고 있나? 과거에 안면이 있기에 여기 있다면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테무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하부르는 매우 흔한 이름이기에 그것만 가지고는 그 여자를 찾기 힘들 거요. 우리 부족만 해도 그런 이름을 쓰는 여자가 몇 명이나 있소. 그 여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마흔은 넘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해 보던 테무진은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들여 한참동안 쑤군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부족에 그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가 세 명 있다고 하오. 지금 부하들에게 데려오라고 일렀으니, 곧 올 거외다.”

“허, 그놈 참. 행동도 재빠르군.”

잠시 후, 테무진의 부하 한 명이 몽고 여자 세 명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묵향은 그들 중에서 하부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윤곽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얼굴은 하부르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하나는 예순이 넘어 보일 정도로 팍삭 늙은 여자였다.

묵향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젠장, 아무래도 내가 아는 그녀는 여기에 없는 것 같군.”

“그렇소? 그거 유감이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망한 듯한 묵향의 기색을 살피며, 테무진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자자, 멀리서 오셨는데, 잔치나 즐기러 갑시다.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두라 일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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