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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에 모인 장로들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무영문에서 방금 전해져 온 한 통의 전서 때문이었다.
“크으윽! 공수개 장로. 이것이 사실이오이까?”
공수개 장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부가 알아 본 바로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허어, 참. 마교 놈들이 초전부터 적잖은 전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본맹에서 끌어 모은 무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들의 안색이 어두운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무림맹은 황실과 민초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금제국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무림동도들을 향해 오랑캐와의 전쟁에 참가해 달라는 격문을 돌렸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들은 지금 세 방향에서 송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양양성으로 달려간 무리들은 패력검제의 지휘 하에 양양성에서 분전 중이었다. 그리고 수전에 능숙한 인물들은 회하에 주둔 중인 수군과 합류하여 금군이 도하 작전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인물들은 모두 수라도제를 중심으로 무한에 집결 중이었다.
물론, 전쟁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정파 쪽이었고, 양양성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양양성에서 수십만의 금군과 상대로 분전하고 있다고 해도, 양양성에서의 전투주체는 악비 대장군이 이끄는 송군이었다.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간 소수의 무림인들이 협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 놈들이 단독으로 작전을 감행하여 20만의 금군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20만을 상대로 1만으로 덤빈 그놈들이 씨몰살을 당했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적잖은 전과를 올리고 있다고 하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놈들이 괘씸하게도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무한 인근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자고 해 놓고, 자기들끼리만 앞에 나서서 싸운 모양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격앙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망할 놈들을 봤나. 맹주님, 이건 놈들이 무한 방어전의 전공을 자기들이 독차지하기 위해 잔대가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뒤늦게 수라도제 대협이 이끄는 세력이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세인들은 처음부터 승리를 거두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마교를 기억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교가 다 이겨 놓은 싸움에 무림맹은 그저 들러리를 섰다고 뒤에서 쑤군거릴 게 분명합니다.”
“수라도제 대협에게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마교도들과 연합세력을 구축하라고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쪽의 수가 월등하게 많은 만큼 승리를 거뒀을 때, 본맹의 위상이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무당파 출신인 청호진인(淸湖眞人)의 말이었다. 무림맹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로 봤을 때, 그의 의견이 맹주파의 전체적인 의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말에 옥진호 장로가 정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을 했다. 마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물론, 옥청학 전대맹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옥화무제가 봉공직을 차지하며 맹주의 신물 빙백수룡검을 내놨을 때, 전대맹주가 마교의 내전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교와의 합작은 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말했다.
“청호 장로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소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금군을 앞에 두고 해묵은 감정싸움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일이 난감해지지 않겠소이까? 어쩌면 마교 쪽에서도 그것을 걱정하여 단독 행동을 결심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사실 지금까지 철천지원수로 지내온 마교와 연합 전선을 펼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청호진인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수라도제 어르신에게 아랫사람들을 잘 통제해 달라고 부탁드린다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옥진호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싸우다가, 오늘 갑자기 친해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물과 불처럼 절대로 융합될 리가 없소이다.”
그건 옥진호 장로의 개인적인 감정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의 모든 장로들의 생각도 비슷할 것이다.
“그도 그렇기는 하오만……. 어찌 되었건 마교 놈들이 더 이상 전공을 독점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연합 전선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에게 전서를 띄워 금군과 싸우도록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꼭 그럴 필요가 있겠소이까? 무한 방어는 마교 놈들보고 하라고 하고,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양양성으로 향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 양양성은 무한 쪽으로 20만이 빠져 나가 10만의 금군밖에 없지 않소. 거기다가 양양성 내에 주둔하고 있는 송군과 패력검제 대협의 도움까지 기대할 수 있소이다. 20만의 금군과 싸우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실익이 클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오.”
상당수의 장로들이 옥진호 장로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사실 마교와 연합하느니 단독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는 쪽이 확실히 이익일 것이다. 그것도 금군을 격파한다는 것 외에 양양성을 구했다는 덤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그러자 청호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잘못하면 옥진호 장로의 의견대로 일이 처리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옥진호 장로의 의견도 상당히 일리가 있소. 그러나 그 의견은 본맹이 왜 금군과 싸우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물론 양양성을 포위한 금군을 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러다 무한이 함락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옥진호 장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들이 예상외로 잘 버틸 수도 있지 않소이까? 그놈들은 지금 자기들만의 힘으로 싸우고 있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또, 설혹 일이 잘못되어 무한이 함락된다고 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보고 양양성을 구한 후 밑으로 남하하여 그들을 치라고 할 수도 있지 않소이까?”
“허어, 참. 바로 코앞에 적이 있는데, 그토록 멀리 돌아서 양양성을 포위한 무리를 치고, 또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그 둘이 자신이 세운 작전의 정당성에 대해 설토하고 있을 때, 맹주가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그 둘은 설전을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장로들의 의견은 필요 없다는 맹주의 의사였으니까 말이다.
“두 분 장로님들의 의견이 다 타당한 것 같소. 그렇기에 노부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이 결정을 수라도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보오. 그가 직접 상황을 판단하고, 어느 쪽이 더 옳은지 결정하라고 하시오.”
무한 외곽에는 지금 수많은 막사들이 들어서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송군에서 사용하는 군용 막사처럼 생겼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각 문파에서 파견한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송군과 함께 무한 방어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기에 송군에서 무림인들의 편의를 위해 보유하고 있던 막사를 지원해 준 것이다.
무영문의 지시대로 그들은 이곳에서 금군이 남하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하해 오는 금군의 병력은 무려 20만. 숫자만 들어도 기가 죽을 정도였다. 아무리 이곳에 3만에 달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만, 20만의 금군을 상대하는 것에 엄두가 안 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송군에서도 무한 방어를 위해 병력을 보내 주겠다는 통보가 오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막사라든지 식량 따위의 물자만 조금 지원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합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통보받은 마교도들 또한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허어, 이 일이 어찌 된 일일꼬? 설마 20만의 금군을 우리들의 힘만으로 막아야만 한다는 것인가?”
아무리 수라도제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라고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곳에 모인 무림인의 수도 엄청난 것이었다. 각 문파에서 차출된 고수 3만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중무장한 병사들을 상대로 집단전을 벌여 본 사람이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병졸들의 무술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세대를 거쳐 오며 발전시킨 효과적인 살상법을 가지고 있었다. 활, 각종 쇠뇌, 투석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수라도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쪽은 경험이 전무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무술 실력은 금군보다 뛰어나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보다는 기습을 가하는 편이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낮보다는 밤. 적들이 도착하는 바로 그날 밤을 노릴 수밖에 없는가?”
이때, 무사 한 명이 뛰어난 경신술로 달려와 포권하며 외쳤다.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무사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어 수라도제에게 건넸다. 서신을 읽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가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림맹의 늙은이들이 미친 것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림맹의 통보로는 현재 일단의 마교 세력이 남하해 오는 금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무림맹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교 놈들이 겁 없이 날뛰다가 몽땅 다 뒈져 버렸으면 기분이 상쾌했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데 있었다.
20만의 금군을 상대로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림맹이 끌어 모은 정파의 세력은 무한 인근에 집결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말이다.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교는 적극적으로 참전하고 있는 데 비해서, 무림맹은 눈치나 보면서 몸을 사리고 있다고 세인들이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은 수라도제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가장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북상하여 마교도들과 합류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남하하는 금군을 막든지, 아니면 남하하는 금군은 마교도들에게 맡기고 양양성으로 직행하여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과 싸우라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무사에게 지시했다.
“모든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하거라.”
“옛.”
무사가 달려가는 것을 보며 수라도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참. 겨우 1만으로 20만을 상대할 배짱을 지닌 인물이 마교에는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마교가 지닌 저력은 무섭구나.”
장내에 쳐진 막사들 중 가장 큰 막사 안에서는 지금 한창 작전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교와 통합 작전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단독 작전을 감행하여 양양성으로 향할 것인지,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다 보니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수라도제는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는 작전이외다. 효율적인 면으로만 따진다면 통합 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오. 하지만 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 왔던 마교도들과 통합 작전을 벌인다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불안도 있소. 그렇다면 오히려 단독으로 양양성으로 직행하는 쪽이 훨씬 좋을 듯도 하오.”
그러자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댔기에 장내는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마교를 이끄는 자와 만나 본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오. 통합 작전을 벌일 만한 재목이라면 통합 작전을 벌이고, 만약 그럴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단독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 말에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영우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가 찬성하자,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수라도제의 의견을 따르기로 의견 일치를 봤다. 무공이나 세력, 또 연륜으로 봤을 때 수라도제를 앞서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의견대로 실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종리세가와 제갈세가가 그의 편을 드는데, 그 누가 그의 의견에 반대를 할 수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불러 짐을 꾸리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경비무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천지문에서 파견한 문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천지문에서?”
“옛.”
그 말에 수라도제와 함께 있던 서문세가의 노신들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천지문이라면 강호에서도 유명한 박쥐들의 문파가 아닌가. 유일하게 마교와 협정을 맺은 문파. 그런 그들이었기에 낙양이 금에 함락되어 피난을 떠난 처지가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그들을 동정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지원군을 보내 온 것이다.
“이런 몰염치한 것들을 봤나. 태상가주님, 그놈들을 내쳐야만 합니다.”
서문세가 노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을진대, 다른 문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잠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돌려보내야 하나? 아니면 함께 싸워야 하나. 하지만 지금 싸워야 할 상대는 마교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을 의심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단 한 명의 무인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이 아닐까.
수라도제는 침착한 어조로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향해 말했다.
“노부가 자네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들은 마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소? 지금 금이라는 오랑캐를 앞에 두고 서로 간에 해묵은 감정으로 대립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지 않겠소? 모두들 표정 관리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소.”
태상가주의 말에 노신들은 일단 분노를 억눌렀다. 하지만 아직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에 수라도제는 덧붙여 말했다.
“그놈들도 다 쓸 데가 있지 않겠소? 미끼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소모품으로 쓸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니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
그 말에 노신들의 안색은 확연히 밝아졌다. 과연 그렇게 써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상황에 따라 어떤 문파, 혹은 어떤 고수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어야 할 때도 있다. 서로가 다 아는 처지에서 사지로 가기를 권하기도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때 그들을 이용한다면 일석이조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태상가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수라도제는 경비무사에게 말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 제가 그곳으로 뫼시겠습니다.”
“허어, 천지문도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일꼬?”
“그러게 말이외다. 낙양의 쓰레기들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경비 무사에게 안내를 받아 한곳에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는 천지문도들을 향해 여기저기서 비방하는 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래도 그들은 묵묵하게 대기했다. 자신들과 합류하라는 허락이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인지, 조금 있으면 밝혀질 것이다. 그때까지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짙은 푸른색의 날렵한 경장 차림의 그들은 하나같이 4척은 됨직한 두툼한 거도(巨刀)를 등에 지고 있었다. 도의 손잡이에 天地(천지)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신들이 천지문 소속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황색 경장 차림을 한 중년 사내 하나가 앞으로 쓱 나서며 천지문도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본인은 하북팽가(河北彭家)의 팽조(彭早)라는 사람이외다.”
팽조가 자기소개를 하자 천지문도들 중에서 한 명이 나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그녀는 간편한 경장으로 맵시 있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었는데, 무공으로 단련된 늘씬한 체형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거기에다가 미모 또한 상당한 수준이 아닌가. 물론 젊은 것들과 같은 풋풋한 맛은 없었지만, 중년의 여인이 지니고 있는 완숙함이 그 부분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녀린 체형에 이지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전혀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녀는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蘇衍)이라고 합니다. 철혈권(鐵血拳)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슬쩍 시비를 걸기 위해 말을 건 것이었는데, 계집이 튀어나와 자기가 천지문도들의 수장이라고 소개를 하니 철혈권 팽조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계집을 상대로 시비를 걸어 봐야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것이다. 물론 강호에서 호젓하게 둘이 만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 놔도 상관없겠지만, 이곳은 사람들의 이목이 많은 장소다. 조금만 심하게 괴롭혀도 잘못하면 변태 소리를 들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그대들 같은 인면수심의 무리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말에 소연은 다소곳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것이 무림맹의 결정입니까?”
“무림맹에 물어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 같은 쓰레기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취 때문에 코를 못 들겠으니 꺼져 달라는 말일세. 본인의 말을 알아듣겠는가?”
쓰레기라는 말까지 하며 천지문을 격하시켰지만 소연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에서 돌린 격문에는 천지문은 필요 없다는 구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출발하기 전에 이곳에 모인 문파들을 가장 연배가 높으신 수라도제 대협께서 이끄신다고 들었습니다. 철혈검 대협께서 하신 말씀이 수라도제 대협의 의견을 반영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하북팽가처럼 작은 문파의 문도 따위가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팽조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요와 금에 이르는 오랑캐들이 연경을 점령한 덕분에 고향을 잃어버리고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하북팽가의 고수가 듣기에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팽조의 귀에 그녀의 말은 하북팽가를 아주 업신여기는 것으로 들렸던 것이다.
팽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노인이 바로 팽조의 사부였다. 무림명숙인 사부는 자신이 직접 시비 걸기가 뭣했기에 그 제자에게 그들을 망신 주고 오라 시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잘못하면 사부님께 누를 끼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팽조는 조금 억지를 부려 보기로 했다.
“계집이기에 조용히 말로 하려 했거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토록 오만방자한 것이냐?”
“하북팽가의 여덟 분 장로들 중의 한 분이신 혼원패권(混元覇拳) 팽선(彭詵) 대협의 제자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멍청한 것!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 그따위 말대답을 해 대다니!”
그와 동시에 팽조의 손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팽조의 움직임에 맞춰 소연도 함께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어쭈? 천지문의 잡것이 감히 반항을 해?”
처음에는 무례한 계집의 뺨을 한 대 치는 것으로 징계를 가하고 끝낼 속셈으로 움직인 것이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슬며시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에 내력을 뿜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3성에서부터 시작한 공력을 5성으로 끌어올렸는데도 불구하고 계집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이런 망할 년을 봤나! 매끈한 얼굴을 봐서 다른 사람들에게 표 나지 않도록 5성의 공력만 사용해 줬거늘, 아직도 물러서지 않다니.’
드디어 팽조의 머리 뚜껑이 활짝 열려 버렸다. 팽조는 상대에게 가하는 공력을 점차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내력이 8성에 이르자 팽조의 장포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쯤 팽조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내력 대결을 펼치는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점점 더 내공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공력을 다 뿜어내기 시작한 팽조의 안색은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이마에는 핏줄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상대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제서야 팽조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상황이었다.
“셋 하면 공력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철혈권 대협.”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팽조에게는 구원이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공력이 딸린다고 갑자기 멈출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기가 자신의 몸으로 타고 들어와 오장육부를 바스러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그녀가 한 제안을 먼저 할 수도 없었다. 그건 바로 항복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팽조는 손을 떼자마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누가 봐도 자신의 패배가 분명했다. 저 가냘픈 계집의 내공이 저토록 막강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사문과 사부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젠장! 다시 한 번 해 보자.”
팽조가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팽조가 뒤돌아보니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사부였다. 사부는 엄한 눈으로 팽조를 흘겨본 후 중얼거렸다.
“미숙한 녀석!”
팽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뒤로 물러서서 운기조식이나 하거라.”
팽선은 앞으로 쓱 나서며 날카로운 어조로 소연을 질책했다.
“감히 하북팽가를 업신여기다니.”
“소녀가 무엇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혼원패권 대협. 수라도제 대협께서도 같은 의견을 지니고 계시냐고 물은 것이 그토록 큰 실례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물러나라고 했으면 물러날 것이지, 그것에 토를 단 것이 죄이니라. 얄팍한 한 수를 익혔다고 기고만장해서 감히 본가에 대들다니, 그 죄를 알렷다?”
“바른 소리를 한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은 혼원패권 대협께 처음 듣습니다.”
“아이야, 네 입을 원망하거라.”
그 순간, 팽선의 외호가 왜 혼원패권인지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실감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펼쳐진 극성의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은 너무나도 패도적인 기운을 물씬 뿜어내고 있었다. 그 권풍의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자들도 황급히 방어 자세를 갖춰 살을 찢는 권풍의 위력을 막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이거 어쩌면 전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팽선은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제법 한가락 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빨리 끝내기 위해 체면불구하고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 때문이었다. 그녀의 도가 완만하게 움직이는 순간, 불꽃과 함께 뇌성이 터지며 팽선의 공세를 짓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 막은 것도 아니고 팽선의 힘보다 더욱 막강한 힘으로 짓눌러 버린 것이다.
그 순간 계집이라고 약간 얕잡아 보던 팽선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계집이 보여 줄 수 있는 힘과 파괴력이 아니었다. 무거운 무기만을 잡고 수십 년 동안 고련한 사내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반응. 중도(重刀)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한 대처였던 것이다.
‘계집이면 계집답게 연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