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도제 일행과 헤어진 진팔 일행이 자신들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무사들을 거느리고 양양성에 도착한 천풍검 곡추였다. 곡추를 본 진팔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으로 물들었다.
“허억! 아, 아니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순간, 곡추는 그때 자신이 너무 심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진팔이 이렇게 경기가 들 정도로 놀란다면, 아무래도 사과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곡추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진팔이 이렇게 경악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귀, 귀신이다.”
그 말에 곡추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그러자 소연은 점잖은 어조로 진팔을 질책했다.
“천풍검 대협께 무슨 그렇게 망령되게 말을 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사과 드리거라.”
“그, 그게…, 저자는 그때 분명히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말에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곡추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소연은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천풍검 대협께서는 바로 저 앞에 건강하게 서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곡추가 거들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때 나도 죽는 줄 알았소.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그렇게 심한 독수를 가해 온 것이 아니었소. 사혈에서 1촌 위를 가격했을 뿐이니까.”
그 말에 진팔은 아직도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렇습니까? 하, 하기야…, 지금 생각해 보니 워낙 정신이 없어서 대협께서 돌아가셨는지 확인까지는 못해 본 거 같습니다. 사실 모두 다 죽었을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그의 손에 걸려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무하다고 들었거든요.”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다네. 그런데 자네도 건강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일세. 그때 너무 못할 짓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줄곧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자네의 이런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아, 아닙니다. 천풍검 대협께서야 무슨 잘못이 있었겠습니까? 다 위에서 시키니까 하신 일이시겠죠.”
진팔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풍검 곡추가 강호에는 상당히 명망 있는 고수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소연이 진팔에게 전음을 날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저.>
<그런데 대화 중에 나오는 ‘그’라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거냐? ‘그’가 누군지 모르니까 도통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마교 교주 말입니다.>
마교 교주라는 말에 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사이, 천풍검 곡추가 진팔에게 말했다.
“그때 그곳에 자네도 있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곳에서 죽은 사람은 단 둘밖에 없었다네. 둘 다 그의 신위를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나던 녀석들이었지. 대 남궁세가에 어찌 그런 소인배들이 끼어들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던 그 덕분에 쓸모없는 놈들이 추려져 버린 셈이 되었지. 그렇기에 그가 내 부하 둘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는다네.”
곡추가 이 말을 털어놓는 것은 진팔이 나중에 창궁18수를 보면 두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 뻔하기에 미리 말해 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곡추의 성격상 없는 일을 만들어서 말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해 준 것이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군.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그가 훌륭한 무인이라고 생각하네. 이번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천지문주께서 소문과는 달리 정말 대단한 분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소문에 개의치 않고 그의 사람됨을 제대로 판단하여 맹약을 체결했다는 것만 봐도 대단한 분이시지 않은가.”
아버지에 대한 칭찬에 진팔은 포권하며 답례했다.
“엄친을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풍검 대협.”
“나는 느낀 대로를 얘기했을 뿐일세.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몇 발자국 걸어가던 곡추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참! 그때, 자네하고 함께 가던 일행들에게도 내 사과를 전해 주게나. 이미 사람을 상하게 해 놓고 이런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일세.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남궁세가로 찾아오라고 전하게. 피 값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직접 지겠네.”
당당한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천풍검 곡추의 뒷모습을 보며, 진팔은 무언지 모를 뿌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과연 무인이라면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때, 옆에서 소연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게 이것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구나. 너도 저런 무인이 되거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무인이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저.”
“그래 어떻게 된 일이냐? 자초지종을 말해 보거라.”
진팔은 사저와 나란히 걸어가며 자신이 무림에서 겪은 일을 잔잔한 어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마교 교주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일부터 시작해서, 패력검제를 만난 후 벌어진 일까지 아주 자세한 것이다. 한참 말하던 진팔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소연에게 말했다.
“사저, 패력검제 어르신의 집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봤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소연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사제에게 대답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실지 모르지만 뒷부분은 정신없이 빠져 들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그러니까 일단 다 들어 본 후에 사저께서 평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는 갑과 을이라는 노인들이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패력검제의 저택에 기거하며 수십 번도 넘게 읽은 비급이다. 그렇다보니 진팔은 그 비급의 내용을 막힘없이 술술 외우고 있었다. 비급의 내용을 들려 주면서 진팔은 소연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과연 이것을 들으면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초반의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들이 이어질 때, 소연은 지루한지 살짝 하품까지 했다. 물론 자신을 위해 얘기를 들려 주고 있는 진팔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한 것이었지만, 유심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진팔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지루한 듯하던 소연의 표정은 이야기가 후반으로 진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뀌고 말았다. 소연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진팔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다급히 말했다.
“그 책을 어떻게 보게 된 것이냐?”
소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면서도 진팔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예? 그건 왜 그러십니까? 그냥 그분의 서재에 꽂혀 있기에 재미 삼아 본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소연은 주위를 살피며 진팔에게 경고했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책을 봤다는 말은 하지도 말거라. 특히 그 이야기가 패력검제 어르신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건 제령문이 소중히 간직해 오던 무공비급임이 틀림없는데, 그것을 네가 우연한 기회에 훔쳐봤음이 틀림없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진팔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듯하자 소연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그 비급에 오가는 대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예에 대해 논하는 것인지 지금 몰라서 나한테 이러는 것이냐? 그 정도라면 무림지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내 생각으로는 그 둘은 모두 화경급의 고수들. 그들의 논검이 무림지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책이 무림지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냐.”
진팔은 그제서야 껄껄 웃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과연 사저의 안목은 높으시군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패력검제 어르신께서 직접 저에게 보여 주신 비급이었으니까요.”
소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직접 보여 주셨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제가 왜 사저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 의심이 가신다면 패력검제 어르신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진팔의 장담에 소연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안심이로구나. 나는 또 네가 경솔한 행동을 했나 싶었다. 그건 그렇고 그토록 엄청난 비급을 그분께서는 왜 너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이냐? 혹시 짚이는 것이 있느냐?”
사실 그런 무가지보를 아무런 이유 없이 보여 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보여 줬을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저. 딱히 원하신 것도 없었고, 그냥 이 책 한번 읽어 보게나 하면서 던져 주신 것이었으니까요.”
소연은 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구나. 과연 그분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네게 그 책을 보여 주신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연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팔의 말 속에는 패력검제와 마교 교주 간에 얽힌 이야기는 빠진 상태였기에 그녀로서는 그 부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소연은 진팔에게서 교주와 뇌전검황의 논검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 스스로 자신이 지금 화경의 벽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소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수라도제가 이끄는 세력이 모두 다 도착한 다음, 수라도제는 악비 대장군의 처소를 찾아갔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이 일대를 총괄하는 관군의 수장과 의논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쪽에서는 좀 더 전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대장군의 의향은 어떠시오?”
수라도제의 제안에 악비 대장군은 난색을 표명했다.
“지금 전진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겠소? 현재 이곳에 있는 어림군이라고 해 봐야 3만이 채 안 되오. 그리고 이 일대의 어림군을 모두 다 끌어 모은다고 해도 7만을 넘기 어렵소이다. 그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본관은 생각하오. 차후에 조금 더 준비가 갖춰진 후에…….”
수라도제는 악비 대장군의 말을 끊으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좀 더 시간이 경과된 후라면 늦소이다. 적의 대군을 물리친 지금,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전군을 이끌고 북상하는 것이 좋소. 그런 다음 우리 쪽에서 싸우기에 알맞은 위치를 선택하여 적을 기다리는 것이 유리하오. 여기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면 적들은 새로운 병력을 재차 투입해 올 것이 분명하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물론 악비의 생각도 같았다. 하지만 현재 관군의 전력은 너무나도 형편없지 않은가.
“이쪽에 충분한 병력이 있다면 귀하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할 수 있소. 하지만 현재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금군의 총 군세는 1백만에 이른다고 하오. 그중 50만만 남하해 온다고 해도 지금의 병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이오. 차라리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적을 기다리는 편이 옳다고 본관은 생각하오.”
수라도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젠장, 말이 안 통하는군.”
“어쩔 수 없소이다. 현실이 그런 만큼…….”
이제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자 수라도제는 노성을 터뜨렸다.
“좋소. 대장군의 의사가 그렇다면 이쪽 단독으로라도 움직이겠소.”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수라도제를 향해 악비 대장군이 다급히 말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개별 행동을 하다가 각개 격파당한다면 대 송제국은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 귀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조금만…, 아니 내년 봄까지만 기다려 주시겠소? 조금 있으면 곧 겨울이오. 금군도 전열을 정비했다가 봄이 되어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오. 그때쯤 되면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거요.”
수라도제는 돌아서서 말했다.
“좋소. 그때쯤이면 이쪽에도 좀 더 많은 인원이 모일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마교에서 흑풍대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양쪽을 합해 봐야 겨우 4만이 채 안 되는 수다. 그들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금군 수십만을 상대로 싸우기는 껄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특히나 마교와 연합해야 하는 만큼 그 위험 부담은 가중되는 셈이었다. 서로 간에 손발이 안 맞는 것도 예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지 못할 마교도들인 만큼 상황이 아주 안 좋아지면 자기들만 슬그머니 전장을 이탈해 버릴 위험성마저 있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어쩔 수 없이 악비 대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수라도제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영문에 다음 군사 행동은 봄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아울러서 흑풍대에게 그 사실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악비 대장군은 바로 그날부터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훈련을 강도 높게 시행했다. 이번 겨울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느냐에 따라 제국의 미래가 결정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