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대사는 도망치는 마교도들을 따라 몸을 날리려는 소림승들을 불러 세웠다.
“멈추거라!”
“무슨 일이십니까? 사숙.”
공공대사의 행색은 묵향의 가공할 만한 공격을 받아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소림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연대구품(蓮帶九品)의 최상승신법을 펼치고도 상대의 공격을 모두 피해 내지 못한 탓이었다. 만약 그가 금강불괴신공을 대성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쪽은 초류빈이 아니라 공공대사 자신일지도 몰랐다.
공공대사가 진기를 끊자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황금빛 광채가 서서히 사라졌다.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공공대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정 사질, 그들이 과연 마교도가 맞기는 맞는 것인가?”
그 물음에 대정선사는 아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자들 본인의 입으로 말했지 않습니까? 마교의 교주와 부교주라고 말입니다.”
공공대사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어찌 마교의 교주라는 자가 사용하는 무공이 도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상의 절기들이요, 부교주라는 자는 악독한 살수를 쓰지 못하고 시종 방어에만 일관하다가 무너진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도다. 아미타불…….”
그 말에 대정선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숙,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초류빈이라는 시주의 무공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공공대사는 모여 있는 소림승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대정선사가 거느리고 온 승려들은 정확히 152명. 하나같이 뛰어나지 않은 무승들이 없었다.
아무리 초류빈이 화경에 도달한 막강한 고수라고 하지만 그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경의 고수가 그들 중 단 한 명에게도 중상을 입히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사실이었다.
묵향이 공공대사와 싸우면서 지속적으로 초류빈의 안위를 살폈듯, 그것은 공공대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류빈이 승려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지독한 살수는 일부러 피했고, 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상황이 수십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마지막 일격을 날리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화경에 이르는 고수와 싸우고 단 한 명도 중상을 당하지 않았음을 사질은 어찌 생각하는고?”
사숙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정선사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력한 화경의 고수라도 싸우다 보면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수가 한 명을 족치는 데 있어서 최강이라는 나한진법을 익힌 소림승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단 한 명도 부상당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대정선사였기에 사숙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순후하여 살수를 펼치지 않았음이야. 그리고 그 덕분에 노납도 목숨을 건졌고 말일세.”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정선사가 봤을 때, 교주와 사숙은 거의 대등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초류빈이 부상을 당하자 교주는 황급히 그를 구출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었던가.
“사질이 봤을 때, 대등하게 비쳤을지 모르나 그와 노납의 사이에는 종이 몇 장 정도의 간격일지라도 엄연히 실력 차가 존재했다네.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결국에 가서는 노납이 쓰러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대정선사는 놀랍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마물(魔物)이 그토록 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공공대사는 사질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수하를 그토록 아끼는 마교의 교주라. 허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정도(政道)가 아닌 마도(魔道)의 길을 걷게 하셨을꼬.”
사실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고수와 겨루다가 몸을 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걸 해냈다.
갑작스럽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억수같이 퍼부어 공공대사를 뒤로 밀어 버린 후,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부상당한 초류빈을 들고 튀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공공대사가 그 틈을 노려 역공을 가해 왔다면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교도라는 자들이 인간이기를 거부할 정도로 비정한 자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공공대사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기회를 놓치고 나니,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공공대사는 묵향이 사라진 곳을 향해 아쉬움이 가득 배인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공공대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며 뒤로 몸을 돌렸다. 이제서야 사질을 자세히 관찰할 여유를 가지게 된 공공대사는 뭔가 오늘 아침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질의 얼굴이 이렇게 나이 들어 보였었던가?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많이 늙었…….”
여기까지 말한 공공대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승려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낮선 인물들이었다. 그것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소림에는 수많은 승려들이 있다. 그중에는 무승도 있고, 불법에만 정진하는 선승(禪僧)도 있다. 그들을 모두 다 공공대사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상당한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자신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연공실에서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디라는 말인가? 너무나도 낯선 지형과 지물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이곳이 결코 소림 인근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한여름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렇듯 선선한 계절로 바뀌어 있다는 말인가.
왜 마교의 교주, 부교주와 자신들이 싸우게 되었을까?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 엄청난 무위를 지닌 소림의 정예들이 왜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개개인의 실력으로 보아 모두들 소림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모두 소림을 떠나 이곳에 모여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은 그들을 따라 이곳에 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공공대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보게.”
“예, 사숙.”
공공대사는 대정선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노납에게 뭔가 할 말이 없는가?”
그제서야 대정선사는 공공대사가 정신을 차린 것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님을 깨달았다.
“저…, 사숙. 그, 그것은…….”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네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노납이 직접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닐 것이야.”
공공대사의 엄포에 대정선사는 한숨을 내쉬며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숨겨도, 또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만사불황을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엽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소림의 무승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세상에 퍼진 얘기들은 한 다리 걸치면서 더욱 살이 보태지고 부풀려져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사숙께서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얘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 축소된 형태로 말이다.
대정선사로부터 자신의 잊혀진 과거사에 대한 얘기를 듣는 공공대사의 눈길은 예상외로 아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점이 대정선사를 안심시켰다. 혹시 절망감에 자살이라도 하지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공공대사는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랬었는가?”
“예, 세상에는 이런저런 소문들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원래 추악한 소문이라는 것이 한 사람씩 건너뛰면서 더욱 살이 붙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더욱 부풀려져 있습니다. 혹시 제가 드린 말씀 외에 딴 것이 있더라도 이해하시고 넘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공공대사는 허탈한 듯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반성을 하거나 사과할 수 있을까? 반성이라는 것도 자의적으로 저질러 놓고는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할 마음도 없었고, 또 저지른 기억도 없는데 뭘 반성할 것이 있단 말인가?
“허허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변명하고 넘어가자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 내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만사불황이라는 인물과 노납이 별개의 인물이라 자위하며 살아갈 수도 있음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인 게지. 이것도 다 무공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을 끊어 버리지 못하고 한없이 파고든 노납에게 부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리니.”
공공대사의 말에 대정선사는 기겁해서 외쳤다.
“사, 사숙.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하지만 공공대사는 단호한 어조로 대정선사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느니라. 먼저 소림으로 가자. 가서 방장님께……. 참, 방장직은 아직도 공지 사형께서 맡고 계시느냐?”
“아닙니다. 지금은 대덕(德良) 사제가 맡고 계십니다.”
“그러신가…….”
공공대사는 태연한 신색으로 대꾸했지만, 그 마음이 결코 편할 수는 없었다. 장문인이 바뀌었음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동안 흘러간 세월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욱 공공대사를 슬프게 했다.
“자, 앞장 서거라. 돌아가자꾸나.”
소림으로 돌아가는 공공대사의 뒷모습은 마교 교주와 싸우며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던 그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었다.
묵향은 안전한 지역까지 도망친 이후에야 초류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젠장, 괜찮아?”
초류빈의 상처는 매우 깊었지만, 지혈을 해 놓은 상태였기에 출혈은 거의 없었다. 수십 명이 넘는 소림승들에게 속된 말로 다구리를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진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다 묵향이라는 희대의 고수가 그를 도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말이다.
초류빈은 고통에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얄미웠는지 묵향은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초류빈의 머리통을 호되게 후려갈기며 외쳤다.
“망할 녀석! 내가 그래서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도륙 내라고 했잖아. 네놈 주제에 어쭙잖게 봐주면서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묵향은 초류빈의 품속을 슬그머니 뒤져서 금창약을 꺼내어 상처에 발라 줬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묵향의 경우 금창약 따위는 아예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초류빈에게 운기조식을 하라고 이른 다음, 묵향은 그 옆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운기조식 중에는 취약한 법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초류빈이 안심하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도록 호법을 서 주는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공공대사의 움직임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 소림이 말하는 연대구품이라는 초상승 절학이다. 그리고 그 화려한 움직임과 함께 터져 나오는 소림의 무학들. 그 하나하나가 아무리 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격에 바위를 꿰뚫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땡초들의 무학이 그 정도였던가……. 그놈들이 무림의 태두라고 불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묵향은 씁쓸한 시선으로 초류빈을 힐끗 바라본 후 중얼거렸다.
“당분간 이 빚을 갚기는 아주 어렵겠어. 물론 내가 혈랑대와 수라마참대를 이끌고 쳐들어간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
곧이어 묵향은 결심을 굳혔다는 듯 주먹을 세차게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오냐, 나중에 장인걸을 끝장낸 후에 그다음 목표는 소림이다. 아예 무공을 익힐 엄두가 안 나도록 싹 쓸어주겠다. 땡중이면 땡중답게 주야로 불경이나 읽고 있을 것이지, 감히 무공을 익혀? 그래, 나중에 두고 보자.”
초류빈이 운기조식을 통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묵향은 초류빈을 이끌고 산서성에 마련해 놓은 비밀 분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몸을 추스른 후, 총타로 돌아가라.”
묵향의 지시에 초류빈은 궁금하다는 듯 반문했다.
“교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놈이나 빨리 회복할 궁리나 해라. 장인걸과의 접전이 시작되면 네놈이 필요해질 테니까 말이야.”
말투는 투박했지만 묵향의 눈동자는 초류빈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걸 느낀 초류빈은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묵향은 밖으로 나오며 산서 분타주에게 물었다.
“요즘 양양성 쪽의 전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 말에 분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당황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아직 제대로 된 전투 세력을 보유한 분타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총타로 보내는 것은 몰라도, 중앙에서 이쪽으로 정보를 넘겨 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중원의 전체적인 판도에 대해서 거의 깡통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저, 그게…, 들리는 소문으로는 양양성 인근에서 금의 대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향은 차가운 어조로 산서 분타주의 말을 끊었다.
“됐네. 본좌가 괜한 것을 물어봤구먼. 이곳의 공사 진행은 어떤가?”
분타주는 이번 질문에는 신들린 듯한 어조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옛,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길게 잡아도 2개월 내에는 본교의 고수들을 머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향은 흡족한 듯 치하했다.
“아주 수고가 많았군.”
“황송합니다, 교주님.”
산서성 비밀 분타를 나선 묵향은 문득 만통음제가 만나고 싶었다. 만통음제를 만나기 위해 개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고 해 봐야 그렇게 많이 돌아가는 길은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혹시 누가 아는가? 형님을 꼬셔서 같이 갈 수 있을지 말이다.
물론 묵향은 만통음제의 본거지가 어딘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수제자인 냉파천의 거처가 어딘지는 알고 있다. 냉파천에게 물어보면 만통음제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은 냉파천이 살고 있는 장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숭산의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소림사는 수많은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려 8천 명에 이르는 수많은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인 만큼 그 규모 또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중에서도 소림승들이 가장 소중히 관리하는 건물들은 몇 개로 압축된다. 소림사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방장실(方丈室), 귀중한 불교의 경전들과 무공비급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 선대 고승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아 놓은 조사전(祖師殿), 무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선승(禪僧)들이 불법을 수도하는 계지원(戒持院)이 그것이다.
특히나 방장실의 경우 팔대호원(八大護院)을 두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토록 삼엄하게 보호되고 있는 방장실에 지금 통보도 하지 않은 방문객이 들어왔다.
“누, 누구?”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갑작스런 인기척에 장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순간 수많은 세월을 불법에 정진하여 쌓아온 평정심도 소용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데 외인이 갑작스레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장문인은 하마터면 심장이 멎어 버릴 뻔했다.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때 소림의 자랑이었다가, 우환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승려를 말이다.
그 순간 장문인의 뇌리에는 만사불황을 없애 버리겠다며 소림사를 나선 대정 사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소림 최고의 정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 12금강과 32수좌승 그리고 108나한까지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 그 덕분에 지금 팔대호원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32수좌승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가 별 어려움 없이 이곳에 들어왔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죽었다는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대정 사형과 함께 간 그들이 누구인가. 108나한은 나한전의, 12금강은 장생전의, 그리고 32수좌승은 팔대호원의 핵심 전력이었다. 그들 모두가 만사불황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소림의 위명은 이제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다.
“아, 아미타불……. 어, 어떻게 이곳에 오셨소이까?”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만사불황이 무너지듯 꿇어앉으며 오체복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장문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오체복지를? 이때 만사불황에 가려 있던 또 다른 인물이 장문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로 대정 사형이었다.
대정선사는 장문인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선사의 인자한 눈매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 사숙께서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공공대사는 오체복지한 채 장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림 제자 공공, 오랜 방황을 끝내고 소림에 돌아왔음을 방장께 고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큰 심려를 끼쳐 드린 점 너무나도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장문인은 작금의 상황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지 멍한 상태였다.
“그동안 쌓은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 참회동(懺悔洞)에 들고자 합니다.”
그 말에 장문인은 화들짝 놀랬다. 그가 쌓은 죄업이 크다는 점은 장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공 사숙이 누구인가? 현존하는 소림 최강의 고수가 아닌가. 그가 말썽을 일으킬 때라면 몰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세상이 뒤숭숭할 때 그의 존재가 소림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그런 그를 참회동에서 썩게 만들 수는 없었다.
“사, 사숙, 모르고 한 죄는 죄가 아니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공공대사는 장문인의 말꼬리를 잘라 버리며 말했다.
“아무리 기억에 없다고 하나, 빈승이 쌓은 업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빈승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르되 알고도 참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빈승을 잡지 마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그럼, 빈승은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에게는 한 가지 과제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과제가 남겨진 셈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발 세상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던 인물이 이제는 더없이 소중한 인물이 된 것이다. 화경급 고수…….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 문파에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게 된다.
“후우, 사숙 어르신을 저리 보낼 수는 없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대정선사라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서는 여기까지 오면서 공공 사숙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사숙께서는 아마도 참회동에서 생을 마감하시려는 듯하더군요.”
그 말에 장문인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마, 마감한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에 대정선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본사가 최초로 배출한 현경의 고수를 그렇게 잃어야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 말에 장문인은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뭐, 뭐라고요? 혀, 현경이라고요?”
“예, 지금까지 현경의 고수라고 알려진 마교 교주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셨습니다. 아마도 정신을 차리시면서 무공은 더욱 진보하신 듯하더군요. 그분께서 그토록 소원하시던 현경에 들었으되 수많은 업보를 쌓으셨으니 참으로 부처님의 오묘한 뜻은 알 길이 없습니다.”
마교 교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니……. 수틀린다고 화산파를 멸문시킨 자가 바로 마교 교주였다. 아무리 소림의 저력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힘만을 숭상하는 거대 문파 마교와 쌍벽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공 사숙께서 함께 한다면 그게 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문인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께서 자진하시는 것만은 말려야 합니다. 속히 그리로 가시죠.”
“예.”
대정선사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장문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