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8화 (474/930)

진팔의 수난

언제나 그러하듯 진팔은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목적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진팔의 모습을 소연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씩의 조언은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이 직접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저 먼 곳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소개해 주고 싶은 녀석은 저 녀석일세.”

그 목소리가 만통음제의 것임을 진팔은 재빨리 알아챘다. 아마도 만통음제는 자신의 지음이 이곳으로 찾아오자, 진팔을 소개해 주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진팔 또한 그의 지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만통음제처럼 선풍도골형의 고아한 신선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패력검제처럼 이웃집 아저씨같이 소탈한 모습일까?

진팔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그곳으로 고개를 획 돌렸을 때, 그의 눈은 묵향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끄어어억! 아니 저 인간이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순간 진팔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그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재빨리 묵향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쓰벌, 설마 만통음제의 지음이 교주일 줄이야.’

진팔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하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수많은 정파인들이 밀집된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교 교주 운운한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말을 뺀 것이다.

교주가 공개적으로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던 진팔이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여 인사를 건넸건만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진팔이 살짝 눈을 들어 바라보니 교주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마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말이다. 진팔이 묵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소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삼사저와 면식이 있었나? 그런데 저 눈길이 아무래도…….’

진팔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그걸 만통음제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통음제는 짐짓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어기전성을 보내왔다.

《역시 동생의 눈도 보통이 아니구먼. 여태껏 옆에서 지켜봐서 아는데 상당히 괜찮은 아이지. 동생도 혼자인 것으로 아는데, 이 우형이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되어 줄까?》

묵향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월하노인이라니…, 그건 바로 중매쟁이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소연을 바라보는 눈길 하나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자신의 표정 관리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소연도 진팔이 있는 쪽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만통음제가 그의 여제자인 설취와 함께 와 있는 것이다.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고려했을 때, 최고의 예우를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연은 만통음제의 옆에 서 있는 젊은이, 그러니까 묵향에게까지 관심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만통음제 대협.”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소연을 향해 만통음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차라도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소연은 화사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만통음제 대협.”

일단 만통음제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소연은 묵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 소연에게 묵향은 싸늘하면서도 거만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소연은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상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내기 힘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양부(養父)는 언제나 그녀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표정을 달리하면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듯, 저기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묵향을 보며 자애로운 양부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소연은 한가하게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시간 여유가 없었다. 만통음제가 차를 한잔 달라고 하지 않는가.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소연이 안내한 곳은 연무장 인근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매일 진팔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사제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차를 가져다주기 위해 간단한 취사 도구를 가져다 둔 것이다.

작은 화로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이고, 찻잔을 준비했다. 그런데 잠시 소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찻잔이 사제와 자신만을 위해 준비해 둔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누구누구에게 권해야 할까? 그녀는 다시 한 번 정자 안을 살펴봤다. 낮선 젊은이와 설취, 그 둘 중에 누가 배분이 높은지 지금 당장 추측해 내야만 했다.

아무리 설취의 무공이 소연보다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녀의 사부는 만통음제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위치는 강호에서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부 덕분에 웬만한 문파의 장로급에 상응하는 정도의 배분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이 있다. 만약에 저 젊은이 쪽이 배분이 높다면? 저 젊은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엄은 분명 범인이 지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가 다 준비되자 소연은 찻잔을 직접 권하는 대신 만통음제가 앉은 자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두 번째 찻잔은 설취와 그 젊은이의 사이에 놓았다. 그런 다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워낙 경황 중에 준비한 것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아주 향이 좋구먼.”

“감사합니다, 대협.”

만통음제가 찻잔을 들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젊은이도 찻잔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소연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놀랍게도 젊은이의 배분은 거대 문파의 장로급을 상회함이 분명했던 것이다. 혹시나 했던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놀라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둘을 만통음제는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묵향이 소연에게 꽤나 마음이 있는 듯 행동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싸늘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가.

‘허, 동생도 겉보기와 달리 쑥스러움이 많구먼. 자고로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우형이 나서야겠어. 흐흐흐.’

만통음제는 소연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며 묵향을 소개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나. 소개가 늦었구먼. 이쪽은 내 의제일세.”

그 말에 진팔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진팔은 저 극악무도한 마두가 만통음제라는 거목의 의제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맞아, 만통음제 어르신은 속고 계신 거야. 그게 틀림없어. 어르신께서는 저놈이 마두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실 거야.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살짝 알려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소연은 소연대로 의제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뜻을 곱씹고는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 말은 곧 저 젊은이의 무공 또한 평범한 수준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또다시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고수라는 말인가? 정말이지 무림은 너무나도 넓구나. 큰일이 터지자 저런 숨은 고수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소연은 살짝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그 젊은이를 힐끔 훔쳐봤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리고 타인을 압도하는 저 기도(氣道)만 아니라면, 저잣거리를 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은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일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익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지만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고 합니다.”

공공연히 만통음제가 소연에게 자신을 소개하자 묵향은 내심 격동을 감추기 어려웠기에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마도 그 모습이 소연에게는 강인한 자의 거만함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때, 만통음제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허헛, 노부의 동생은 무림에 마교 교주로 알려져 있다네. 어쩌면 자네들은 천지문도들인 만큼 이미 동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그 말을 듣고 진팔은 더욱 경악했다. 어떻게 저자가 마두라는 사실을 알고 의동생을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통음제가 제정신인가?

진팔이 경악하고 있는 만큼, 소연 또한 그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래졌다. 하지만 잠시의 그 경악감이 지나간 후, 소연은 자신의 결례를 의식하고는 다소곳이 말했다.

“교주님께서 천지문에 많은 은혜를 베푸신 점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진양 문주와 한중길 교주와의 일이었으니 본좌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다 보니 오히려 묵향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해져 있었다. 소연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올 듯했기에, 묵향은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봤을 때에 비해 진일보했구먼. 아주 빠른 성취야. 여기서 싸우면서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지?”

“예,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팔의 겸손한 대답에 만통음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은 깨달음이라……. 절정으로 들어가는 초입을 작다고는 볼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동생.”

“물론이죠.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초식의 틀을 깬 존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제 그 지고한 경지에 첫발을 들여 놓았으니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지요.”

그 말에 진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런 검론은 듣기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지문이라는 문파에서 배출한 최고 고수가 신도합일급이니, 그 위 경지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예? 지고한 경지의 첫발이라니요?”

“초식의 틀을 완전히 깼을 때, 화경이 열린다는 말이야. 자네의 경우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볼 수 있지. 기존 초식을 물 흐르듯 연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와 하나가 되었다고 부르지. 바로 신도합일을 말함이야. 그런데 아무리 완벽한 도법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거든. 그것을 깨닫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초식의 벽을 허물었을 때, 세인들이 말하는 화경에 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초식을 허무는 것의 완성형을 현경이라고 말하는데, 의식과 무의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을 때 가능한 것이야.”

현경에 대한 얘기는 만통음제도 처음 듣는 말인지라 잠시 묵향이 한 말을 곱씹으며 되새기고 있었다. 그가 가야 할 다음 단계가 바로 현경이니 말이다. 만통음제가 뭔가 묵향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묵향이 먼저 진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첫발을 들인 기념으로 한 수 지도해 주지.”

그 말에 진팔의 입이 기쁨으로 쭉 찢어졌다.

‘흐흐흐, 이런 횡재가 있나.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꿨더라?’

교주의 제의를 받은 진팔은 해묵은 감정이 어느샌가 증발해 버리는 자신을 느꼈다. 과거 그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한 것도, 또 지금껏 쌓여 있던 감정도 모두 다 사라졌다. 무림최고수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데야 사양할 이유가 없겠지만, 진팔은 상대의 제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대신 천지문의 무공을 본좌한테 알려 줘야 해. 자네가 가장 자신 있게 사용하는 도법과 신법을 말이지.”

‘이런 젠장, 어쩐지 너무 조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진팔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의는 감사드립니다만, 대인(大人)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원래 무공이라는 것이 문외불출(門外不出)이라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해묵은 원한이 사라지고, 교주에 대한 따스하기 그지없는 호의감이 싹트고 있어서 그런지 진팔의 입에서 ‘대인’이라는 극존칭의 단어가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묵향은 진팔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외불출 좋아하고 앉아 있네. 본좌가 그딴 쓰레기 같은 도법이 필요해서 네 녀석한테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네가 익히고 있는 무공만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비무가 가능한지 내가 직접 보여 주려는 거야. 아마 네놈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세계일걸? 어때, 생각할 시간을 딱 1각(15분) 주마. 결정하거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과연 천지문의 도법이 묵향의 손을 거쳐 어떤 모양으로 거듭나게 될 것인지 그 역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게 소형제, 한 번 해 보지 그러는가? 이런 기회는 평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찾기 어려운 기연임을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쓰레기 같은 도법이라는 말에 울컥하고 있던 진팔이었지만, 만통음제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지라 그는 난처한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녀가 허락만 해 준다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팔의 시선을 받은 소연은 잠시 궁리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타인에게 본문의 무공을 무단으로 가르쳐 준다는 것은 가장 큰 중죄들 중의 한 가지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중원 최강이라 불리는 고수다. 아마도 그가 익히고 있을 막강한 무공들에 비한다면 천지문의 도법은 3류무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무공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도 한몫했다. 그가 펼치는 천지문의 도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윽고 결심했는지 소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허락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자 진팔은 다급히 교주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묵향은 활짝 미소 지으며 진팔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한 거야. 자, 이제 자네가 즐겨 사용하는 무공을 가르쳐 줘야겠지?”

상대의 태도가 너무 친근한 것 같아 진팔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뭔가 속고 있는 거 아냐?’

그렇다고 그걸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진팔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제가 사용하는 도법은 선풍도법(僊風刀法)입니다. 구결부터 말씀드리자면.”

진팔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리며 묵향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구결은 필요 없으니 저기 가서 한 번 시범을 보여 봐.”

“구결이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죠.”

구결을 안 가르쳐 줘도 된다는 말에 진팔은 오히려 좋아라했다. 구결이 빠진 껍데기뿐인 도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말 한마디로 진팔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수련하는 모습을 며칠간만 훔쳐봐도 초식의 겉모습은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 문파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들이 적전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가 뭔가? 그게 다 초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공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구결이 없다면 모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설혹 모방했다손 치더라도 제대로 된 위력은 결단코 나올 수가 없었다.

구결을 알려 주지 않아도 되기에, 사문에 큰 죄를 범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진팔은 아주 당당하게 연무장으로 내려가 도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진팔의 도가 장쾌한 움직임을 보이며 선풍도법의 초식들을 하나씩 보여 줬다.

진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들을 선보이고 나자,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비무를 하기 위한 무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가 보였기에 그걸 잘라 대충 다듬은 후 붕붕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제법 쓸 만하군.”

그걸 보며 만통음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실력의 고수라면 무기가 뭐건 큰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격을 당하는 입장이라면 진짜 도(刀)보다는 목도(木刀) 쪽이 훨씬 상처가 적을 것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묵향이 진팔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묵향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잡는 것도 오랜만이군. 흐흐흐, 네놈의 맷집이 좋기를 바란다.”

워낙 낮은 목소리였기에 소연은 묵향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만통음제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 말을 듣고 만통음제는 묵향이 왜 진팔과 비무를 하겠다고 한 것인지 한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해묵은 원한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다음에 전개된 비무를 본 만통음제와 소연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묵향이 진팔을 개 잡듯이 때려잡기 시작했기에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놀란 것은 묵향이 사용하는 무공에 있었다. 어떻게 단 한 번 겉모습만 훑어본 타 문파의 무공을 저렇듯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각 초식의 앞뒤가 뒤바뀌기도 하고,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사용되었기에 완전히 다른 도법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틀림없이 천지문의 선풍도법이었다.

소연은 비무를 바라보며 엄청난 것들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선풍도법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위력이었다. 그녀가 직접 사제와 비무한다고 해도 저 정도까지 완벽한 도법을 구사할 자신은 없었다.

물 흐르듯 완벽하게 이어지는 도법과 신법. 저 모습만 본다면 선풍도법이 어찌 3류도법이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묵향의 의도대로 소연은 그 비무의 정수(精髓)를 마치 모래가 물을 흡수하듯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비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눈들도 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또 다른 상승의 고수들이었다. 양양성 내에서 강렬한 기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간간이 폭음까지 들려오니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호오, 과연 천지문과 마교가 가깝다고 하더니 그게 거짓이 아닌 모양이군요. 저렇듯 교주가 직접 비무까지 해 주니 말입니다.”

황룡무제의 말에 그 옆에 서 있던 수라도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저게 비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부가 보기에는 멀쩡한 젊은이 하나 때려잡는 모습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하지만 묵향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것을 배웠던 황룡무제와 패력검제였다.

“저런 생사결에 가까운 치열한 비무를 통해 무인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것이 끝나면 뭔가 수확이 있겠지요.”

수라도제는 더 이상 비무를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것에는 노부도 공감하는 바일세. 하지만 교주가 사용하는 것은 마교의 도법, 진팔이라는 저 청년이 사용하는 것은 천지문의 도법. 과연 무엇을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교주가 사용하는 무공에 있었다. 교주의 애병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교주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그 모습으로 보아 매우 무게가 가벼운 도(刀)든지 아니면 살짝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검(劍)일 것이다. 그것만 봐도 빠른 쾌검류를 익히고 있다고 짐작되어지는 그가 저런 둔중한 몽둥이를 들고 무공을 펼치면 제대로 된 위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교주가 펼치고 있는 저 도식(刀式)은 또 뭐란 말인가? 한 번 쓱 봐도 저건 초식에 얽매여 있는 하급의 도법이었다. 화경에 이른 그의 입장에서 단 하나도 배울 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때, 그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 왔다.

《본좌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왔나?》

‘헉?’

수라도제는 어기전성이 들려오자마자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그딴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이곳에 단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순간 수라도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그건 아니오.》

그러자 곧이어 비비 꼬인 어조가 이어져 들려왔다.

《의형께 들으니 본좌를 때려잡겠다고 하셨다면서?》

그 말에 수라도제의 안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길, 그 영감탱이가 진짜로 고자질을 했구나. 사내놈이 그토록 주뎅이가 가벼워서야…….’

《정 싸우고 싶다면 칼을 들고 본좌를 찾아와. 반쯤 죽여 줄 테니까. 그럴 배짱도 없으면 처박혀서 술이나 퍼 마셔. 알겠어?》

아무리 수라도제가 묵향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말이 심하지 않은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묵향보다는 수라도제가 더욱 오랜 세월 동안 무림을 종횡해 온 고수가 아닌가. 연배는 자신이 높지만, 상대는 마교의 교주였기에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 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수라도제는 심기가 상한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 이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니오?》

그에 비해 묵향은 상대의 연배가 높건 낮건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냐 그렇지 않느냐만 중요할 뿐…….

《심하기는 뭐가 심해? 너 오늘 한 번 죽어 볼래?》

수라도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다시금 묵향으로부터 어기전성이 들려왔다.

《본좌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뒤에서 꼼수 쓰는 놈들이야. 이번은 본좌가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 주겠지만, 다시 한 번 더 그딴 짓을 하는 게 본좌에게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지금껏 수라도제에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수라도제의 안색은 붉으락푸르락 정말 가관이었다. 일대일로 싸우면 박살 날 것을 뻔히 안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수라도제는 하마터면 도를 뽑아 들고 묵향을 향해 달려들 뻔했다. 나이도 자신보다 어린 것이, 그 망할 탈마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선배 고수를 이토록 우습게 본단 말인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수라도제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패력검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패력검제가 옆에서 갑자기 말을 걸었기에 수라도제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할 수가 있었다. 수라도제는 떨떠름한 어조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별일 아닐세. 노부는 이만 가 보겠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수라도제는 교주에게 또 다른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그다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해 버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더군다나 저놈의 똥은 대금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 매우 필요했다.

‘젠장! 거름으로라도 쓸 데가 있으니 똥 덩어리 같은 네놈을 상대해 주는 거야.’

수라도제가 갑자기 자리를 뜬 후에도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는 그곳에서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잘 몰랐던 부분이 그들의 눈에 잡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서로가 같은 도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오?”

그 말에 패력검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노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소.”

“그렇다면 소형제가 사용하는 저 도법이 마교의 도법이라는 말이오?”

그 말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 것 같소이다. 노부가 저 아이를 오랜 시간 데리고 있으면서 관찰해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도법은 언제나 그가 연습하던 선풍도법이 확실하오.”

천지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천지문 하면 선풍도법을 생각할 정도로 외부에 잘 알려진 도법이었다. 그런 만큼 교주가 선풍도법을 진팔에게 가르쳤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추측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아이에게 선풍도법의 정수를 알려주기 위해 교주가 저 도법을 배웠다는 말씀이 되지 않소? 교주의 입장에서는 하등의 쓸모도 없는 도법인데, 그걸 한순간의 비무를 위해 배웠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노부의 생각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워낙 엉뚱한 인물이라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패력검제의 그 말에는 공감이 가는지 황룡무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교주와의 비무는 오늘날의 그가 있도록 만들어 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었으니 말이다. 생사를 건 대결, 그 단 한순간에 무인은 엄청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웬만한 경우 고수는 자신과 대결한 하수를 살려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상대가 더욱 크게 성장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주는 자신을 살려 줬다. 그런데 교주는 자신을 왜 살려 준 것일까? 그것도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비무까지 해 주고 말이다.

‘확실히 그릇이 크긴 커. 저런 위대한 인물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만 해도 하나의 복인지도 모르지.’

황룡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비슷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패하는 개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왜 하늘이 나를 낳고 또 저놈을 낳았느냐고 통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처음부터 싸울 의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패력검제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고, 황룡무제가 말했다.

“더 관전하지 않고 가시려고 그러시오?”

“그러고는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외다. 아무래도 비무가 끝난 후에는 좋은 약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패력검제는 한창 비무 중인 진팔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진팔은 지금 오뉴월 복날을 만난 멍멍이처럼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긴, 노부도 그 생각에는 동감이오. 그런데 저 녀석 보기보다는 맷집이 좋구먼. 저렇게 맞아도 또 일어서는 것을 보면 말이오.”

“일부러 적당히 패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런 식으로 계속 충격이 누적되면 쇳덩이라도 버티겠소? 지금은 정신력으로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도 힘들 거외다.”

그 말에 황룡무제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참으로 깊으시구려. 대련이 끝나자마자 치료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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