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혈광마(追血狂魔)
양양성에 모인 화경급 고수들을 총동원하여 마교 교주를 때려잡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난 후, 수라도제는 비밀리에 몇몇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했다. 물론 수라도제가 교주를 때려잡겠다는 야무진 꿈을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을 총동원할 수 있다면 교주가 아무리 현경급에 준하는 고수라 해도 능히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교주 한 명만이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옆에 언제나 만통음제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죽자고 싸워 준다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겠지만, 도망치려고만 작정한다면 현재 동원 가능한 수의 세 배가 넘는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일당들은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허어, 참. 일이 고약하게 되었구먼.”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정찰이라든지 적진 시찰 같은 임무를 주어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또, 그의 경우 휘하에 상당한 수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정 구역을 책임지고 맡아 달라고 하며 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수라도제는 한숨만 푹푹 내쉬며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에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오늘 경비 책임을 맡은 무사가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장 사령이 호위 무사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태상문주님.”
“호위 무사를? 무슨 일인데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하더냐?”
“예, 방금 전에 자신을 흑풍대 소속의 무사라고 소개한 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흑풍대라…….”
그게 어떤 단체인지 잠시 생각해 보던 수라도제의 머릿속에 흑색의 갑주를 걸친 당당하기 그지없는 흑풍대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함께 왔다가 자신들은 이곳에 머물렀고, 그들은 금군을 추격해서 앞서 나갔다. 아마도 그가 전령을 보내 온 모양이다.
“그래서?”
“예, 그자는 악비 대장군을 면담하기를 청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들은 흑풍대라는 단체 자체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가 흑풍대를 사칭한 적의 첩자일 수도 있기에 호위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알겠다. 노부가 직접 가 보기로 하지.”
“태상문주님께서 친히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속하가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됐네. 그에게 가서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장 사령의 안내를 받아 수라도제가 가 보니 흙먼지가 잔뜩 끼어 있어 희뿌연 회색으로 보이는 갑주를 걸친 인물이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초조한 듯한 시선을 보내 왔다. 수라도제는 첫눈에 상대가 상당한 수준급의 고수라는 것을 파악했다. 잔잔한 가운데 폭발적인 기도를 내뿜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먼지에 싸인 더러운 갑주만을 봤겠지만, 수라도제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는 핏덩이를 봤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는지 그의 갑주 전체가 검붉은 핏덩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저런 살귀가 전령일 가능성은 없었다. 전령으로 보내오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난 자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흑풍대에서 왔다는 자가 자네인가?”
“예.”
안면 보호대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사내인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여성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악비 대장군을 만나자는 것인지 노부에게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상대는 수라도제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구 사이로 나와 있는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내며 되려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파란 젊은 것이 와서 노부 어쩌구 하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귀하는 누구십니까?”
“사람들은 노부를 수라도제라고 부른다네.”
그 말에 상대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대협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악비 대장군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군사적인 문제이기에 대협께 드릴 말씀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장 사령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서문 대인,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흑풍대의 무사가 맞습니까?”
“복색만으로 본다면 흑풍대 소속의 무사가 맞소이다. 천마신교라고 불리는 무림의 단체에서 파견한 9천의 정예들이지요.”
“9천이라고 하셨소이까?”
장 사령은 기절할 듯 놀랐다. 9천이라는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수라도제가 이끌고 온 무림인들의 가공할 만한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장 사령이었다. 그런 자들이 9천이라면 엄청난 힘이 아닌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흑풍대를 홀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장 사령은 급히 흑풍대 무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장군께 연락드리리다.”
장 사령이 달려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흑풍대 무사에게 은근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노부는 자신을 밝혔는데, 아직 자네의 소개를 못 들었네만. 알려 줄 수 없는 겐가?”
“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합니다.”
“부대주라고? 허, 놀랍구먼. 자네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노부는 지금까지 평생을 거쳐 천마신교와 싸워 왔다네.”
“…….”
도대체 수라도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마화는 의심 가득한 눈길을 상대에게 보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 지금까지 노부가 마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싸워 왔던 천마신교의 하부단체들과 자네들은 너무나도 다르니 말일세.”
그 말에 마화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교는 힘을 숭상할 뿐, 정파에서 생각하듯 악에 물든 무리들은 아닙니다. 물론 본교에도 악질적인 인간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파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노부도 인정하는 바일세. 정파라고 자처하는 놈들 중에서도 돼먹지 못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어쨌거나 귀교와 정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이야.”
“…….”
“…….”
둘 사이에는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얘기를 주도하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지 않자, 마화 또한 괜히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자연 침묵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침묵이 깨진 것은 요란한 갑주 소리를 내며 다가온 송군 장수들 때문이었다.
“귀하가 흑풍대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인가?”
악비 대장군은 여태껏 보아 온 무림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생소한 모습의 마화를 보며 의아스러운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듯 중무장을 갖춘 무림인은 처음 봤던 것이다.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십니까?”
군례를 올리는 마화의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악비 대장군은 상대가 어쩌면 군부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본관이 악비일세. 그래, 본관에게 급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고 했던가?”
“예, 이틀 전까지 본대는 양양성에서 퇴각하던 금군을 추격하여 지속적인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왜 그렇게 금군 쪽에서 양양성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한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오오, 그랬었는가?”
“예, 그런데 50만에 달하는 금군이 남하해 오면서 지금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적의 군세가 워낙 엄청나 본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지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새로운 적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50만의 적이 새로이 가세했다는 말인가? 그래, 놈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언제 양양성에 도착하겠는가?”
“그들은 본대에 쫓기던 금군과 합류한 후,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방책을 치며 방어 상태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움직일 의사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다음 해 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대주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 둘이 합쳤다면 물경 6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니,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겠지.”
잠시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악비 대장군이 마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흑풍대주는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하시던가?”
“곧 겨울이 다가오니 조만간 양양성으로 퇴각하시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게 좋을 듯하구먼.”
“그리고 흑풍대주께서 대장군께 한 가지 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뭔가? 본관이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겠네.”
“각 곳에 주둔 중인 송군 진영에 흑풍대의 존재를 천마신교 소속이 아닌 황군 소속의 기마대로 해달라는 청이셨습니다.”
“이상한 부탁이로군.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재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본교의 반역도입니다. 만약 그자가 본교에서 고수들을 이곳에 파견했음을 안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금을 정벌하기를 원하신다면 대주님의 청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잠시 궁리하던 악비 대장군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대주님을 대신하여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편의상 흑풍대는 대장군님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하고, 본대에 대장군님의 인장이 찍힌 공식 문서를 소지한 전령을 보내 주십시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소 귀찮으시더라도 공식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기왕에 허락한 것인데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 염려 놓게나.”
“옛, 대주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언을 전했으니,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런 다음 악비 대장군은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 장 사령에게 명령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할 텐데 편안한 자리를 주선해 주도록 하게.”
“옛, 대장군.”
철그렁거리는 갑주 소리를 울리며 대장군이 멀어진 후, 장 사령은 마화에게 말했다.
“본관을 따라오시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에 와 있는 무림인들 중에서 천마신교의 교주님이 계시지 않소?”
그 말에 장 사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무림인들의 일은 본관이 잘 모르오. 참, 여기 계시는 서문 대인께서 그들을 관장하고 계시니 이분께 물어보도록 하시오.”
마화가 의문의 눈길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수라도제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교주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를 해치우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었겠는가. 없애 버린 후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발뺌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을……. 하지만 이 여인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그 가능성도 이제는 끝이었다.
“수라도제 대협, 저희 교주님께서 이곳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밖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요즘 들어 천지문의 제자 하나를 매일같이 개잡듯 때려잡고 있다는 것을 성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 성내에는 천지문이 혹시 교주의 마음에 안 드는 무슨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라면 지금 천지문의 제자와 한창 비무 중일 거라네. 노부를 따라오게.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사람을 붙여 주지.”
“감사합니다, 대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