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1화 (477/930)

안내자를 소개받은 마화는 먼저 옷 가게로 가서 옷부터 구입했다. 요 근래 몇 달 동안 야지를 뒹굴며 살아온 그녀였다. 목욕은 물론이고 세탁하기도 힘든 여건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썩은 내가 풍기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옷을 입고 어찌 교주를 만나러 간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을 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다음으로 선택한 행로는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이었다. 객잔에 도착하여 방을 구한 그녀는 먼저 갑주와 장검에 묻은 피부터 정성껏 닦아 냈다. 그런 다음 기름칠을 골고루 한 후에야 목욕을 시작했다.

산뜻한 새 옷으로 단장을 한 마화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밖으로 나왔다. 교주가 있는 곳은 안내자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알아 둔 상태였기에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다니까. 어떻게 몇 달이 되도록 연락 한 번 안 하실 수가 있지? 그분께서 몽고에서 돌아오셨다는 것도 부교주님께서 연락을 주셨기에 알 수가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부교주님께서 부상을 당할 정도로 강적을 만났던 모양인데, 괜찮으신 건가 모르겠네.”

낮은 목소리로 홀로 투덜거리며 길을 가던 마화는 곧이어 건강하기 그지없는 묵향을 볼 수 있었다.

“크하하핫! 좀 더 제대로 해 봐!”

“이런 빌어먹을!”

뻑!

“크윽!”

“여기도 비었잖아.”

빡!

“으악!”

매우 즐거운 것 같은 묵향의 모습을 보며 마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언젠가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옛날에 초 부교주님을 저렇게 신나게 두들겨 패셨었지. 그걸 보면 교주님께서는 저 사내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야. 참, 내. 언제나 애정 표현을 저따위로밖에 할 줄 모르다니, 언제 철이 드실지 원…, 쯧쯧. 당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셔야지.”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본 묵향이 활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마화 아냐. 지겹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다져 놓고 그리로 갈게.”

그 말에 마화는 황당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다져 놓다니? 저 양반은 눈앞의 사내가 고깃덩이로 보인단 말인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쉬엄쉬엄 하세요. 당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하셔야죠.”

“무슨 그런 말을, 쇠도 두들겨야 단단해지는 거야.”

그 말에 마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그자는 쇠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이거나 그거나 둘 다 똑같은 거야. 잘 연마해 놔야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

한눈을 팔며 마화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진팔을 열심히 쥐어 패는 것을 보면 역시 묵향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때 옆에서 소연이 다가오며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텐데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마화는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시비는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소연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화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소연이라면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하지만 교주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

마음을 정한 마화는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천지문이라고? 그 낙양에 있는 천지문 말이냐?”

물론 마화는 성격적으로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이렇듯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상대가 누군지 안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그러자면 누가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보편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화 정도의 지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천지문의 문주라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하물며 그 문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상대가 누군지 잘 알면서 일부러 하대를 사용했다. 그편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우니까.

그 말에 소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천지문이라면 본교와 약간의 내왕이 있는 관계니, 본녀가 누군지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본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한다.”

소연이 이곳에 오기 전 흑풍대와 무림 연합의 고수들은 연합 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연은 흑풍대라는 것이 마교의 여섯 개 무력 세력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수라도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각 무력 세력의 수장들인 대주가 모두 다 마교의 장로들일 정도니, 그보다 한 단계밖에 떨어지지 않는 부대주의 직위는 얼마나 높겠는가.

천지문의 문도인 자신과 마화라는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무림에서의 배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에 소연은 상대의 얼굴조차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올리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소연은 차를 가져와 마화에게 권했다. 잠시 관전을 하며 차를 마시던 마화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교주의 양녀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기에 교주가 아직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교주님과 비무하는 사람도 천지문도인가?”

별로 할 일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대가 심심해서 말을 건 것이었다고 해도, 소연으로서는 상대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사제인 진팔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니야. 저 정도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지.”

상대와 말을 나눈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연은 조금씩 상대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상대가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지위에 비했을 때, 상대의 성격이 매우 소탈하고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간 후…….

“하하핫, 아주 재미있군. 그래 자네 결혼은 했는가?”

왜 마교도인 상대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던 터라 소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혼기를 놓쳤습니다.”

“그래? 많이 서운해하셨겠군.”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의 동그란 두 눈이 자신을 향한 후에야 마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이 잘못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급히 머리를 굴려 보니 수습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말은 천지문의 문주, 그러니까 자네의 사부가 서운해했을 거라는 말이야. 자네의 아이들도 자네를 닮아 무예에 뛰어날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장차 다음 세대의 천지문을 떠받칠 텐데, 서운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소연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무공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다고요.”

“본녀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나? 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어. 그러다 보니 강한 자를 알아보는 감각이 짐승처럼 예민해지게 되었지. 지금까지 내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만 빼고.”

말만이라도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니 소연의 기분은 아주 좋아졌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꺼내 놓고 난 후에 소연은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상대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화는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감출 일은 아니니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오래전에 본녀가 관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상관으로 부임해 온 적이 있었어. 목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것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같았거든.”

흥미로운 주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대꾸는 못하고 소연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자가 지금껏 세상 구경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죽자고 처박혀서 무공만 익힌 무공광인 줄 내가 알았겠나? 그것도 모르고 대련을 신청했다가 단숨에 묵사발이 난 적이 있었지.”

마화의 말에 소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저런…….”

하지만 마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사정을 많이 봐줬기에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났었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분이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혹시?”

그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마화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실상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사람은 지금의 묵향이 아닌, 과거 몽고 벌판을 질타하던 자애로운 묵향이었으니까.

“전사(戰死)… 하셨나요?”

“전사라고도 할 수 없어. 찬황흑풍단이 해체되던 날, 옥영진 대장군 등 대부분의 고위급 장교들이 모두 그날 죽임을 당했어. 살아서 도망간 자들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고 말이야.”

몽고 원정 때의 각종 고생담, 찬황흑풍단의 몰락, 마교에 입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가 있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들을 마화는 재미있게 들려줬다. 그녀는 교주의 딸인 소연과 조금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소연이 알고 있는 묵향은 또 어떤 사람인지 그것도 궁금했고 말이다.

소연도 어느덧 마화의 화술에 끌려 들어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게 되어 버렸다. 두 여자는 진팔이 무자비하게 두들겨터지는 장면을 감상하며 서로의 과거를 나눴다. 그 대부분은 추억거리 정도로 치부될 만한 쓸모없는 대화들이었지만, 그녀들 간의 친분을 두텁게 만드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많은 대화가 오고간 상태였던 탓인지, 소연은 잠시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외람된 부탁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를 알아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왜 그런 부탁을 본녀에게 하는 것이지? 무영문이나 개방 쪽이 빠를 건데…….”

“왜냐하면 그분은 천마신교에 소속되어 계셨거든요.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선물하셨던 장신구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걸요.”

소연이 마화에게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교주가 진짜로 자신의 양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만약 진짜 그가 양부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호, 정파의 고수인 자네가 본교 고수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본녀가 알아 봐 주도록 하지.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뭐지?”

소연은 추억 어린 어조로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유향(柳香)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무인의 이름 같지 않으니 오히려 찾기 쉬우실 거예요.”

마화가 마교 내에 있은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유향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마교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그런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향이라고? 남자 이름인 것 같은데……. 혹시 한때 사모했던 남자인가?”

그 말에 소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제 양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그분을 기다리셨는데, 결국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든 그분께 연락을 넣어 보려고 해 봤지만,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워낙 비밀에 싸인 곳이라 알아 볼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부대주님이시라면 혹시 알아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없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드리는 겁니다.”

양부라는 말에 마화는 유향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연을 만났을 때 교주는 유향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오랜 세월 이리저리 알아 봐도 유향이라는 고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화는 내심 난처했지만 겉모습만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좋아. 본녀가 총타에 기별을 넣어 알아 보도록 하지. 그러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총타가 아니라 저기에서 진팔을 때려잡느라 광분하고 있는 교주에게 물어본 후 그의 결정을 기다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들 부녀간의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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