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화는 슬쩍 만통음제를 훔쳐본 후, 묵향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잠시 따로 얘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 말에 묵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본좌의 의형이시니, 외인이라고 할 수 없지. 말해 봐.”
“소 소저의 일은 계속 이런 식으로 끌고 가실 겁니까?”
설마 마화가 양녀 얘기를 꺼내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해 본 터였기에 묵향은 난감했다. 이 일은 최대한 기밀을 지키는 것이 좋았는데 말이다. 만통음제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연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묵향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난처한 듯 대꾸했다.
“어흠!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지.”
하지만 마화의 대응은 단호했다.
“아뇨, 지금 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 소저가 유향이라는 사람이 마교에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좀 알아 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오래전에 자신이 사용한 가명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향이라고? 그게 누구지?”
마화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자기가 사용한 가명도 잊어버리셨나요?”
그 말에 묵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화의 말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뭣?”
묵향은 예상치 못한 마화의 말에 적잖이 놀란 듯했고, 만통음제는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저 옆에서 차를 장만하고 있는 설취 또한 숨소리마저 죽이고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묵향이 마화를 제지하기도 전에, 마화의 말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일도 아니고 소연에 대한 것이었기에 묵향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교주님께서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신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기회를 빌려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알아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딱 잘라 말하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다시 한 번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주님의 단 하나뿐인 양녀가 아닌가요? 그녀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시면서도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참고 계신다는 것을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녀도 교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 이 기회에.”
소연이 묵향의 양녀라는 사실에 만통음제와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만통음제의 놀라움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월하노인을 자처하여 소연에게 다리까지 놓으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이런! 양녀라고?”
만통음제의 외침에 묵향의 고개가 그쪽으로 획 돌아갔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객식구들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대한 대화를 훔쳐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묵향과 눈길이 마주치자 만통음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형은 그런지도 모르고 중신을 선다고 나섰었구먼. 이런 실수가 있나…….”
묵향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중신을 선다고요? 설마 벌써 그런 말을 꺼내신 거는 아니겠죠?”
그 말에 만통음제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벌써 했는데… 당사자에게 직접 말일세. 어쩐지 너무 당황하는 것 같더라니……. 어쩌면 그녀도 조금은 자네에 대해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젠장, 약간은 눈치 챈 것 같더라구요?”
“우형이 보기에는 그랬다네.”
옆에서 듣고 있던 마화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끼어들었다.
“소 소저도 벌써 눈치 챘다면 잘되었네요. 이 기회에 교주님께서 양부라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과 사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집단임을 잘 알지 않느냐? 아비가 모든 정파인들이 치를 떠는 극악무도한 암흑마제라는 사실을 그 애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 애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주위에 있는 자들은 결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녀가 본교에 들어온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손가락질하지 못할 거예요.”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만통음제 어르신도 그녀가 어느 정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신다잖아요.”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묵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그게 더 잘되었군. 한 가지 얘기를 지어내는 거야. 형님도 조금 도와주셔야 되고 말입니다. 형님은 한 번 더 가서 중신에 대해 얘기를 꺼내 주세요. 교주가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시 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화 너는 가서 유향이라는 인물이 전사했다고 전하는 거야.”
“예? 전사했다고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이 방금 생각해 낸 줄거리를 말해 줬다. 그런 다음 그는 만통음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얘기에 허점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마화가 알아들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묵향은 아차 싶은지 탄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헛,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군! 명호가 있었어. 명호를 하나 지어서… 그러니까 추혈광마(追血狂魔)가 좋겠군. 척 들어 봐도 마교 냄새가 물씬 풍기니까 말이야.”
추혈광마. 피를 좇는 미친 마귀라는 말이 아닌가.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았기에 마화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도 그녀가 사랑하는 양부인데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
하지만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별로 심할 것도 없어. 오히려 충격적인 명호를 쓰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못하게 되지. 그래, 그 명호로만 말했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본명을 밝혀서 네가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총타에 연락을 넣어 답을 받느라고 늦었다고 말이야. 그러면 충분한 대답이 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오늘 동생을 다시 봤는걸? 담백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토록 책략을 잘 세울 줄은 미처 몰랐네, 그려.”
뻔뻔스럽게도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보통이죠. 제가 그런 데는 머리 회전이 좀 빠르거든요.”
자화자찬을 한 후, 묵향은 마화를 향해 말했다.
“가서 그렇게 말해. 말할 때 표정 관리만 잘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좋아요. 하명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죠.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요.”
“뭔데?”
“그녀에게 상승의 도법을 가르치시고 싶다는 교주님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거기에다가 진 공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너무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그놈도 뭔가 얻는 게 있을 테니 서로가 좋은 것이겠지.”
“서로가 좋다구요? 그건 순전히 교주님 생각이시겠죠. 뭔가 얻는 게 있기 전에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만약 뒤가 그렇게 끝난다면 소 소저는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묵향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극악무도한 마두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겠지.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말이야. 지금껏 본좌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망설임 없이 처리해 왔다. 그놈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겠고, 그놈이 뭔가를 얻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본좌가 원한 것은 그 비무를 보고 소연이가 한 차원 높은 무예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잡아 주는 것. 더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게 간접적으로 하지 마시고 소 소저와 직접 비무하시는 것이 빠르지 않겠어요? 엉뚱한 사람 골병들이지 마시고 말이에요.”
“그녀석이 남자였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 한 군데라도 팰 데가 있어야 말이지.”
묵향의 황당스런 대답에는 마화도 두 손 들어 버렸다. 언제는 상대를 두들겨 패는 데 있어서 남녀를 가렸던 사람이었나? 그걸 뻔히 아는데, 저딴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
“정말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알았으면 이제 그 얘기는 끝내자구.”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묵향은 슬쩍 뒤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술 마시러 간다.”
옆에서 묵향과 마화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나 설취는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관과 부하 간에 비밀스런 얘기를 엿들은 기분이 아닌, 꼭 뭔가 부부 싸움 하는 장면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바탕 언쟁이 끝난 후, 실내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뒤숭숭했다. 묵향이 나가고 난 후 마화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묵향이 나가고 나자 마화는 장검을 꺼내어 닦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티끌 한 점 없어 보이는 장검을 비단 천으로 닦고 또 닦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기분 해소 방법인 모양이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 장검을 닦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사부님께서도 사숙 어른과 함께 술이나 드시고 오시면 어떻겠어요?”
실내의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여 난감하던 터에 제자가 그런 부탁을 해 오자 만통음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노부가 제자 하나는 정말 잘 뒀지. 어쩌면 저렇게 총명한지……. 마침 술 생각도 나는데 잘되었군, 흐흐흣.’
만통음제는 점잔을 빼며 중후한 어조로 제자에게 대답했다.
“허어, 노부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동생이 쓸쓸하게 혼자 마시고 있을 텐데, 노부는 동생의 기분이나 풀어 주러 가 볼까?”
사부가 나가고 난 후 이제 여자들만 남게 되자 설취는 시원스런 어조로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마 소저, 당신이 한 제안이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교주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만 기분을 풀어요.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요?”
마화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교주님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기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예전부터 남의 말은 잘 안 듣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여자들끼리 남아 있다 보니 훨씬 대화하기가 편했다. 더군다나 점소이가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까지 가져오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그분은 겉보기와 달리 너무도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자신의 여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괴팍스럽게 행동하시죠. 퉁명스럽게 말하고, 못된 행동을 하시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해요.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죠. 소 소저 일로 얼마나 슬퍼하고 계시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군요.”
마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설취는 마교 교주로서의 묵향이 아닌, 아주 인간적인 묵향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풋사랑이었던 묵향을 말이다. 설취는 마화의 말을 들으며 과연 그 남자에게 자신이 빠져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