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은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수라도제의 지명을 받은 총관은 폭탄과도 같은 정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의 정예군에 의해 종남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말이 던지는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놀랐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와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만큼 경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종남파가 무너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총관은 자신에게 따지듯 외친 사람이 이곳에 종남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태을검군 송류 장로인 것을 알고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태을검군 장로님,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맹에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아직 맹으로부터 확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십중팔구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확인이 아직 안 되었다는 말에 송류 장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 콧방귀를 뀌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흥! 그건 더욱 말이 안 돼. 맹호검군 백량이 본문의 정예를 거느리고 무림맹에 가 있고, 또 노부가 1천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와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무너질 종남파가 아니야. 지금 본문에는 2천이 넘는 고수들이 남아 있다네. 자네도 금군과 싸워 봤을 테니, 그들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는 파악했겠지? 자네에게 잘 훈련된 금군 병사 1만 명이 있다면 종남파를 쳐부술 수 있겠나?”
그 말에 총관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송류 장로의 말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무공도 모르는 병사 1만으로 종남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총관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송류 장로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설혹 10만의 병사가 있다고 해도 본문을 하루아침에 멸망시킬 수는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순식간에 본문이 멸문당했다고 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여기까지 말한 송류 장로는 수라도제를 향해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놈들의 농간인 듯싶습니다. 만약 대협께서 고수들을 이끌고 소림사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곳 양양성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양양성 인근에 적의 60만 대군이 집결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들은 간악하게도 정보를 조작하여 양양성의 방어가 취약해지도록 만든 후, 대군을 휘몰아쳐 양양성을 공격하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수라도제 대협!”
그 말에 수라도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도 무림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9파1방에 들어가는 종남파다. 그만큼 무시 못 할 저력을 지닌 문파인 것이다.
“허어, 노부가 아무래도 경솔했던 듯싶으이.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만큼 위급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자세한 사정을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 회의를 시작한 노부의 실책이 크구먼.”
이렇게 해서 회의는 끝났다. 사실 그 누구도 그 서신이 진짜일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기에 취해진 결과였다.
“이럴 수가…….”
며칠 후 무림맹으로부터 전해진 서신을 읽는 수라도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상문주님.”
“자네도 읽어 보게나.”
수라도제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은 총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수라도제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명령했다.
“이제 사실 확인이 되었으니, 각 문파들의 모든 수장들을 불러 모으게.”
“예, 옛, 태상문주님.”
잠시 후, 회의실에 모여든 무림명숙들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니…….
“총관, 그게 진정 사실이었단 말이오?”
며칠 전과는 달리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송류 장로에게 총관은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 때문인지 아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송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총관은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말을 이었다.
“험험,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종남파를 무너뜨린 것은 금의 정예군입니다. 종남파 외에 여러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며, 상당수의 금군은 소림사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금은 송 황실과의 전쟁에 무림인들이 발 벗고 나선 사실을 알고 무림에 경고를 하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때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송류 장로의 허탈한 듯한 음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생존자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조금 지나면 진실이 드러날 게 뻔한 만큼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구출한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 태을검군 장로님. 하지만 아이들이나 아녀자들의 시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놈들이 납치해 갔을 가능성도 다분하다고 합니다.”
“크흐흐흐흑! 이런 찢어 죽일 놈들!”
비통하게 오열하고 있는 송류 장로 때문에 잠시 회의 진행이 늦춰졌다. 무림에서 지니고 있는 송류 장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가 이토록 비통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무시하고 서문세가의 총관 따위가 나설 수 없는 것이다.
장시간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자 어쩔 수 없이 수라도제가 앞으로 나섰다.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동시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오. 태을검군 장로의 비통한 심정을 노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우리들은 지금 행동을 시작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는다면 북쪽에 위치한 모든 문파들이 멸문당한 후가 될 테니 말이외다.”
“수라도제 대협께서는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먼저 소림사로 달려가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물론 소림이 금군 따위에게 무너지리라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이쪽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되오. 소림을 치기 위해 남하하고 있는 적도들을 무찌르고 하남성을 제압한다면 그놈들도 더 이상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섬서, 산서, 하북, 산동에 위치한 각 문파들을 도와주기에도 매우 용이하다는 이점도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수라도제는 묵향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지어 놓은 죄가 있다 보니 그가 과연 행동을 함께해 올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교 교주는 느긋하게 앉아서 옆에 앉아 있는 만통음제와 뭔가 쑤군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흑풍대의 대주가 시립하고 서 있었다. 회의 석상에 온 것이었기에 갑주를 입지 않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금의 영토에 위치한 무림문파가 한둘이 아니니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옳기는 해. 하지만 무턱대고 여기 있는 모든 세력을 소림사로 보낸다면 이곳 양양성이 위태롭지 않겠는가? 아무리 계절이 겨울의 초입이라 적이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지만…….”
“놈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있는 지금은 계절이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문파들을 쓸어버리는 데 동원한 것도 금군이고, 양양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금군이 아닙니까?”
“아참, 그건 그렇구먼. 하지만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보면 똑같은 금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문파 토벌에 동원된 금군 병사들의 무공이 훨씬 뛰어나겠지.”
“그야 그렇겠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묵향. 물론 틀리다는 것을 묵향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문파 토벌의 전면에는 장인걸 그녀석이 있을 것이 뻔했고, 또 그가 오랜 세월 공들여 키운 뛰어난 병사들이 함께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무공이 어떻건 간에 금의 정예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양양성 방면에 있는 60만 대군과 합쳐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을 연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만큼 수라도제의 작전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보네. 하남성 이북의 모든 문파들이 멸문한다면, 특히나 그중에서도 소림사가 멸문당한다면 그 피해는 너무나도 크지 않겠는가?”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텐데요? 아주 팔팔한 땡중들이 득실거리니까요.”
묵향은 일전에 자신과 치열한 격투를 벌였던 공공대사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던 만통음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소림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실전 경험에 있어서 아주 취약하다네. 이쪽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소림도 결코 무사하기 힘들게야.”
이때, 수라도제가 묵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천마신교에서도 이번 작전에 동참해 주시겠소?”
그 말에 묵향은 잠시 갈등했다. 사실 자신이 소림을 구하러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림에는 공공대사라는 썩을 놈이 있지 않은가. 그때 당한 것을 갚아 주러 가도 시원찮은데, 구해 주러 갈 이유는 더욱 없었다. 오히려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장인걸이 소림사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전개인가.
하지만 묵향에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대진과 능비화 두 연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림사 같이 격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양양성에 남아 있어 봐야 내년 봄까지는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본좌도 참여하겠네. 물론, 본좌 혼자만 갈 것이야. 거의 모든 고수들을 소림사로 뺀다면 양양성은 텅 비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수하들에게는 양양성을 지키고 있으라고 명해 놓겠네.”
교주가 너무나도 선선히 승낙하자, 수라도제는 새삼스럽게 상대를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마교라는 최강의 방파를 이끌 만한 인물이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배포. 확실히 흑풍대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그의 밑에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아무리 마교가 강자지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라고 해도,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지존의 자리를 지킬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 말에 수라도제는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묵향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교주님의 의향이 그러하시다면, 양양성을 맡기겠소이다.”
회의실에서 나오며 묵향은 관지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흑풍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남게나. 정파의 고수들이 빠져나간 만큼 양양성의 방어력은 취약해질 테니, 그 공백을 자네와 흑풍대가 메워 주게. 자네라면 충분히 해내리라 믿지만, 결코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지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충분히 해내리라 믿는다면서 목숨을 걸지 말라니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묵향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본교의 싸움이 아니야. 양양성쯤이야 그냥 내줘도 돼. 본교에 아직 동원하지 않은 엄청난 전력이 남아 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 양양성 따위는 나중에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네. 하지만 자네를 잃으면 본좌는 어디서 자네를 대신할 자를 찾는다는 말인가? 알겠는가?”
그 말에 감동한 관지는 군례를 드리며 힘 있게 대답했다.
“기대에 보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벽곡단 한 알의 의미
맑은 독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소림 장문인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숭산 인근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물론 금군 병사들이 소림사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소림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무림인인 듯한 자들이 소림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일을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소림이다 보니 그들이 왜 그곳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소림은 무림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정파의 무림인들이 마교라는 숙적을 없애기 위해 광분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림사 최악의 치부라고 할 수 있었던 만사불황을 없애는 데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생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듯, 지금껏 화가 되어 왔던 만사불황은 일순간의 각성으로 인해 소림사의 커다란 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방파들이 마교와의 싸움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소림은 그와 무관했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오랜 세월 무림의 일에 무관심했던 대가로 현 장문인인 덕량대사(德良大使)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난제(難題)로다.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꼬?”
이때, 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장 스님.”
“무슨 일이냐?”
“개방에서 비육걸개(肥肉乞쾬) 시주께서 오셨습니다.”
비육걸개라면 개방의 장로가 아닌가. 외부의 정보가 부족한 이때, 정보에 능한 개방 장로의 등장은 부처님이 내리신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어서 드시라고 해라.”
“예.”
이어서 명호대로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가 들어서는 순간 장문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냄새 난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방이 거지들의 문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커흠, 저, 시, 시주.”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무래도 이곳은 서로 간에 차분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은 것 같구려. 자, 노납을 따라오시구려.”
악취를 참지 못하고 누렇게 찌들고 있는 장문인의 표정을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요, 뭐.”
장문인이 밖으로 나오자, 방장실 앞에서 장로와 함께 온 꾀죄죄한 거지 네 명이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비육걸개까지 모두 다섯 명이 개방에서 파견되어 온 모양이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이 뿜어내는 악취가 워낙 지독한지라 이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 줘야 할지 골치부터 아파지는 장문인이었다.
“자, 노납을 따라오시게나.”
“예.”
장문인이 비육걸개를 안내한 곳은 방장실 뒤편에 있는 산에 지어 놓은 자그마한 암자였다.
비육걸개는 이곳에 오면서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 하나를 등에 지고 뒤따라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거지들 또한 비육걸개가 지고 있는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푸대자루를 하나씩 등에 지고 있었다. 한 번씩 ‘구구…’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안에는 전서구 등 연락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육중한 덩치를 지닌 비육걸개였지만 앞서 달려가는 장문인에 크게 뒤지지 않고 암자에 도착했다. 비육걸개의 경공술이 생각보다 뛰어나다기보다는, 방장실에서 암자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과 장문인이 경공술을 전력으로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귀사에 큰 겁란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 본방의 예측이기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근지러운 곳을 득득 긁으며 비육걸개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장문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런 혐오감보다는 비육걸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안겨 준 충격이 더 컸다.
“겁란이라니요? 아미타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지금 소림을 제외하고 장강 이북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금군은 각 문파를 공격해서 제압한 후, 문도들을 잡아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이상한 일이구려. 지금껏 관부가 무림에 개입한 일이 없었거늘,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이오?”
“아, 대사님께서는 잘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본방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양양성에서 있었던 전투에 무림맹이 가세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보복을 가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놈들은 될 수 있으면 많은 포로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을 인질로 삼아 각 문파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행동이 아닐까 하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허어, 시주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각 문파들의 반발이 크지 않겠소?”
“대사님의 말씀도 옳으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까지 무너졌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않겠습니까?”
종남파가 무너졌다는 말에 장문인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비육걸개는 피둥피둥하게 찐 살집 안에 감춰진 작은 눈알을 굴려 장문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껏 황실이 무림을 억누르지 않은 것은 무림을 친다면 황실도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금으로서는 잃을 게 없습니다. 안 그래도 무림맹은 금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무림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 확실시된 이상, 금이 각 문파를 공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을 뿐입니다.”
비육걸개의 말에 장문인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허, 참. 이것 쉬운 문제가 아니구려. 아무래도 노납 혼자서 뭐라고 말할 사안은 아닌 것 같으니 원로들과 대화를 좀 해 봐야 할 듯하구려.”
“서두르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후 비육걸개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아무래도 방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인적이 거의 없었다. 숨어서 뭔가 저지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닌가. 둔중해 보이는 그의 살집에 감춰진 작은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육걸개는 막 발길을 돌리려는 장문인에게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제가 한동안은 귀사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장문인은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토록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것이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이곳은 완전히 독립된 작은 암자인 만큼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게 아닌가.
“물론이외다. 시주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구려. 참 식사도 이곳으로 가져다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편이 편리하지 않으시겠소?”
식사 시간에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들어온다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밥덩이를 안겨 주며 거지답게 마당에서 밥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장문인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그 속뜻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비육걸개는 환히 미소 지으며 고마워했다.
“물론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마울 뿐이지요. 다만 좀 많이 부탁드립니다.”
비육걸개의 기름진 몸을 힐끔 훔쳐보며 장문인이 중얼거렸다.
“많이… 말씀이시오?”
“예.”
“알겠소이다. 그렇게 일러두겠소. 그럼 노납은 이만 가 보겠소이다.”
장문인이 떠나고 난 후, 비육걸개는 함께 온 거지들 중의 한 명에게 명령했다.
“장문인을 만나 소식을 전했다고 총타에 전하거라.”
“예, 장로님.”
그 거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푸대자루 안에는 제법 큼직한 새장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10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들어 있었다. 거지는 소림사에 무사히 도착해서 비육걸개 장로가 소림사 장문인을 만났음을 아주 작고 얄팍한 양피지에 기록한 후 전통(箋筒) 안에 집어넣었다. 전통을 비둘기 다리에 묶고 재빨리 그것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일단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끝마친 비육걸개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져 구운 닭 한 마리와 커다란 술병을 꺼냈다. 마개를 뜯은 후 몇 모금 급히 마신 비육걸개는 누가 본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소림사에다가도 전서구를 통한 연락망을 갖춰 놨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소림사에 파견되는 인물인 만큼 격식에 맞게 장로급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모든 장로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은 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 이유는 바로 술과 음식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림사가 무공으로 유명하지만 사찰은 사찰이다. 신성한 사찰인 만큼 술을 마시기도 힘들뿐더러, 고기를 먹기는 더욱 힘들 것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다른 장로들에 비해서 비교적 술을 적게 탐하고, 음식의 질보다는 양을 선호하는 비육걸개가 뽑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