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가 봉문을 결의한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수라도제가 이끄는 1천여 명에 달하는 구원 세력이 숭산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달려와서 그런지 모두들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고르고 고른 고수들답게 그 눈빛만큼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수라도제는 소림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워낙 화급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이끌고 갈 고수들을 실력에 따라 다섯 개의 무리로 나눴다. 각 문파들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을 1진으로 삼고, 그 외에는 문파별로 평균적인 실력을 측정하여 네 개의 무리들로 나눴다. 1진은 수라도제가 직접 지휘하고, 그 외의 다른 무리들은 각각 이름 있는 명숙들을 선택하여 지휘를 맡겼다.
적들이 소림으로 몰려오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시간 여유는 없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소림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모두에게 내렸다. 그런 다음 수라도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이곳 소림사에 도착한 것이다.
묵향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사찰을 보며 이죽거렸다.
“저기가 그 유명한 소림사로군요.”
뭔가 비꼬는 듯한 어조였지만, 일단 묵향이 말을 꺼냈기에 만통음제는 질문을 던졌다.
“동생은 소림사에 온 것이 처음인가?”
“물론이죠. 제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기야 생각해 보니 언젠가는 한 번 여기 와야 할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죠.”
묵향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광기가 번쩍인다고 느껴졌다.
“허어, 소림이 동생과 뭔가 은원(恩怨)을 맺은 모양이군. 이 우형에게도 말 못할 사연인가?”
“뭐 그렇게 큰 은원은 아닙니다. 멍청한 부하 놈 하나가 땡중들을 만만하게 보고 싸우다가 박살 났을 뿐이니까요.”
언뜻 들으니까 별로 큰일도 아닌 듯했기에 만통음제는 속으로 저으기 안심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 마교가 소림사를 박살 내겠다고 든다면 정파와 큰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은 마교와 정파의 사이에 끼어 아주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한담을 나누며 달려가다 보니 어느덧 소림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소림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소림사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는 수라도제의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수라도제 정도의 인물이 도착했다고 하면 소림승들이 화급히 마중 나올……!”
바로 그때, 수라도제가 보고 있는 쪽을 향해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고 있던 묵향의 눈에도 소림사 정문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봉문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경악하는 묵향의 반응을 바라보며 만통음제는 거참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옆에서 바라보니 소림이 봉문한 것에 대해 정파의 거두라는 수라도제보다 오히려 마교 교주가 더욱 경악하고 있는 듯했으니 말이다.
“동생도 소림이 봉문한 것이 대단히 의외인 모양이군.”
“물론 의외지요. 지금껏 본교의 앞을 가로막아 온 놈들인데, 왜 금나라에 대해서는 맞설 생각을 안 하는 겁니까?”
“글쎄, 우형도 소림의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대답을 해 줄 수가 없구먼.”
잠시 후, 승려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절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승려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승은 지객당의 굉량(宏亮)이라 하오이다. 이곳에 모이신 시주분들의 신색을 보니 모두들 무림을 종횡하시는 영웅들이신 모양인데 어찌 이곳에 왕림하셨소이까?”
굉량이 보니 많은 호걸들 중에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듯한 새파란 녀석이 앞으로 쓱 나서는 것이 보였기에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말을 듣는 순간 굉량의 표정은 경악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서문길제라고 하오.”
서문길제라면 바로 저 서문세가를 이끌고 있는 수라도제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환골탈태를 했기에 그토록 젊게 보였던 것이다. 그토록 강한 고수가 많은 무림인들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굉량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아 정중하게 합장을 하며 답례를 했다. 하지만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아미타불, 본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듯 여러 무림의 영웅들께서 본사를 도와주러 달려와 주시다니 소승 감격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헛된 걸음을 하시게 되어 뭐라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도 굉량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여 답례했다.
“소림은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위기에 처해 있다면 응당 도우는 것이 도리지요.”
예법에 따른 절차상의 대화는 이 정도로 하고, 수라도제는 이제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정문에 걸려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저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소이까?”
“아미타불, 소승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방장 스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소승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헛, 참. 지금껏 큰 일만 터지면 꼬리를 감추더니, 역시 소림은 믿을게 못 되었군. 이런 한심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온 내 자신이 한심하구나. 허명만 높은 소인배들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떠들다니…….”
수라도제의 말에 굉량의 안색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소림사를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상대하는 곳이 지객당이었고, 그것은 무림인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굉량의 경우도 지객당에서 생활하며 많은 무림인들과 접했지만, 오늘처럼 지독한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다른 중생이 저딴 소리를 했다면 즉시 그 주둥이를 틀어막고 다리를 분질러놓겠지만,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그렇기에 굉량은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 말이 되려 수라도제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듯 그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지나치기는 뭐가 지나치다는 말이냐! 네놈이 승려고, 또 이곳이 절이기에 노부가 지금 참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당장 그따위 결정을 내린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알겠느냐?”
수라도제의 노기 어린 질책에 굉량의 안색 또한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사실 대부분의 무승들이 그러하듯 굉량 또한 대 소림을 무시하는 금군들과 싸우고 싶었다. 장문인의 결정만 아니었다면 그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 놨을 것이다. 안 그래도 장문인의 결정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부터 이런 조소 어린 질책까지 받게 되자, 수십 년 동안 쌓은 불력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무림최고수들 중 한 명에게 뭐라고 대꾸할 것인가? 잘못하면 정말 소림을 박살 내고도 남을 인물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굉량은 분노를 참으며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지객당주님께 시주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사는 봉문한 만큼 손님을 받지 못하기에, 어려운 발걸음 하셨는데도 차 한 잔 대접해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굉량은 자기 할 말만 퉁명스럽게 내뱉은 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말 상대할 인물까지 없어지자, 수라도제는 도저히 노기를 주체하기 힘든 상태였다. 한참 동안 거친 숨만 내쉬고 있던 수라도제의 눈에 또다시 문짝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수라도제의 손이 어느 순간 등 뒤에 걸린 거도(巨刀)를 향해 움직였다.
쾅!
어느새 뽑혔는지 수라도제의 거대한 도는 한바탕 칼부림을 일으켰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소림사의 정문이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희뿌연 먼지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던 것이다.
“사돈, 소림의 행태에 분노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리영우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수라도제는 다시금 소림사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박살이 나 있는 소림사의 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사의 정문은 1백 년 된 소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대단히 튼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편으로 아연한 표정으로 서서 멀뚱히 무림의 군웅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을 보고 수라도제는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개새끼들! 그래, 10년간 봉문하겠다고? 좋다. 봉문의 시작은 네놈들 마음이겠지만, 끝도 그렇게 될 성 싶으냐? 이후 소림사 밖으로 나오는 새끼들은 노부가 친히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서 다시 처넣어줄 테다.”
“허어, 사돈. 노기를 참으십시오. 이렇게 역정만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듯합니다. 자, 가시지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노기를 달래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림의 정문이 박살 날 정도의 소란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장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장문인은 참혹하게 파괴되어 있는 정문을 보고는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장문인은 정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옆에 서 있던 지객 당주를 향해 물었다.
“아미타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장문인의 말에 지객 당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많은 시주들을 이끌고 달려오셨던 모양입니다. 쾅하는 소리를 듣고 소승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이렇게 된 후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객 당주는 아예 정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정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허어, 그 시주의 성정이 불같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인 모양이구려.”
“그런데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소승이 그 시주께 정문을 파괴한 것에 대해 따지려고 할 때, 그분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러면서 지객당주는 수라도제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장문인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장문인은 깊은 한숨이 섞인 불호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타불, 난제로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옛말에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지만, 나중에는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본사는 지금껏 만들어진 위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택을 했으니, 그만큼 그 시주들이 느꼈던 배신감도 컸던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노납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본사가 처음부터 불제자들의 도량(道場)으로 알려져 있었다면, 이번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인데……. 허어, 큰일이로다. 정문이 파괴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쩌면 이번 선택으로 본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음이니……. 그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이야.”
장문인은 깊은 시름에 잠겨 방장실로 돌아갔다. 혼자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대 금제국이라는 적이 버티고 서 있기에 모두들 정신이 그곳에 팔려 있겠지만,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만약 그때쯤 금과 무림 간의 분쟁이 끝난 후라면, 소림사는 서문세가, 아니 최악의 경우 무림맹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림사가 지닌 저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무림맹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어, 늑대를 피해 범의 소굴로 발을 들여 놓았음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아참, 공공, 아니 공지 사숙께 여쭤 보는 것이 옳겠군.”
공공대사는 일신에 지닌 무위도 무위지만, 워낙 세속에 초탈해 계신 듯하여 이런 것을 물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이런 세속적인 문제는 조금 세속적인 인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