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수라도제가 이끄는 군웅들은 숭산 인근의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다. 도중에 건량과 물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산길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것이 모두 다 헛고생이었다는 것을 알자, 허탈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지만, 수라도제 등 몇몇 피로를 모르는 고수들은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이야 죽자고 달려온 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곳까지 쉬엄쉬엄 달려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고수들은 모두 세 개의 패거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패력검제와 황룡무제, 그리고 몇몇 무림의 원로들이었다. 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간혹 언성까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오늘 보인 소림의 행태에 불만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묵향과 만통음제였다. 그들은 화경을 상회하는 고수들답게 서로가 어기전성으로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지도 모르는 다른 놈들을 생각하면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라도제와 그의 사돈인 종리영우 그리고 종리영우의 의제인 제갈기였다. 이들 또한 묵향 일행처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대화를 남이 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는 기필코 소림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이빨을 뿌드득 갈며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날리자, 그의 앞에서 앉아 있던 종리영우가 부드러운 어조로 다독거렸다.
<사돈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감정대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갈기 또한 종리영우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형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소림에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해도 때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때라고 했는가?》
<물론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소림이 소인배들의 집합소임이 드러났다고는 하나, 그들이 지닌 저력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소림과 맞대결을 해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는 문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저놈뿐일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턱짓으로 제갈기가 슬쩍 가리킨 것은 만통음제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이었다. 모두들 그쪽을 바라본 후, 한결같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소림을 징죄하려면 무림의 공분을 일으키고, 무림맹이 직접 나서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설혹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무림맹은 금을 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만큼 소림을 응징하는 것은 금을 박살 낸 후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종리영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음을 날렸다.
<듣고 보니 동생의 의견이 옳은 듯하구만.>
하지만 수라도제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모두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만약 그때가 되면 모두들 노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사돈. 사돈께서는 소림의 대문이라도 박살 내며 분풀이라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노부는 아직도 울화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돈이 노부를 찾는다면 이놈을 들고 즉시 숭산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옆자리에 세워 놓은 거도(巨刀)의 손잡이를 슬쩍 잡으며 전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의제인 제갈기 또한 함께 할 것을 맹세했다.
<저 또한 형님이 하시는 일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러만 주십시오. 만 리 길이라도 마다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이때, 점소이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들의 시선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디서 거지새끼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빨리 밖으로 안 나가?”
비럭질해서 먹는 신세인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뭘 처먹었는지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 하나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가 점소이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점소이는 맹렬하게 거지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거지는 점소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문에 점소이는 할 수 없이 빗자루를 집어 들고 거지를 두들겨 팼지만, 거지는 전혀 아파 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거지는 객잔 안을 휙 둘러본 후, 수라도제 일행을 발견하고는 지체치 않고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수라도제 대협.”
“오, 비육걸개 장로가 아닌가? 반갑구먼. 안 그래도 개방 쪽에 연락을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네를 만나다니…….”
하지만 비육걸개가 가깝게 다가오자 수라도제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육걸개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코를 감싸 쥐며 투덜거렸다.
“크흐∼ 냄새! 자네도 여전하구먼. 제발 딴 거는 모르겠지만 목욕 좀 하게. 코가 심히 괴로우니 말이야.”
“크크큭, 원래 거지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 아니겠습니까? 거지한테 바랄 것을 바라셔야죠.”
비육걸개는 너스레를 떨며, 넉살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 다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상 위에 차려진 비싼 음식들을 입속에 마구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그들 간의 대화를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점소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없이 돌아가 버렸다. 모두들 칼을 차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차마 밖으로 나가 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비육걸개가 맛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라도제는 상대가 도대체 아무런 말도 없이 먹기만 하고 있자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개방의 장로인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수라도제로서는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비육걸개는 입속에 있는 음식을 대충 씹지도 않고 삼킨 다음, 다른 음식을 손으로 움켜쥐며 대꾸했다.
“하남분타에서 영양 보충 좀 하고 있다가 대협께서 이곳으로 오신다기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군요, 대협.”
“영양 보충이라니?”
“한 며칠 절간에서 지냈었거든요. 원래 절에서 나오는 식사라는 게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 한 마리 잡아 영양 보충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수라도제는 비육걸개도 소림사 문제로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도 소림사가 봉문한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던 중이었던 게로군.”
“예, 대협. 설마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은 본방에서도 예측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방에는 무슨 일 때문에 기별을 넣으려고 하셨습니까?”
“숭산에서 철수한 금군의 행방을 묻고자 해서 말일세. 그놈들이 어디로 갔나?”
“호북성 방향으로 급히 남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양양성 인근에 포진하고 있는 금군의 주력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겠죠.”
그 말에 수라도제는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됐군. 후발대가 도착하는 즉시 추격하여 그놈들을 박살 내 버려야겠어.”
바로 이때, 저쪽 자리에 앉아 있던 묵향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비육걸개에게 말을 걸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옆에서 듣게 되었는데 말씀이야, 자네가 소림에 있다가 왔다고?”
새파란 젊은 것이 처음부터 말을 찍찍 놓고 있으니 비육걸개의 속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인 듯한데, 수라도제 일행과 합석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동석하기 힘들 정도로 배분이 낮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비육걸개 또한 개방의 장로인 만큼 묵향의 인상착의 정도는 초상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이곳에서 정파의 최고수들 중 한 명인 수라도제와 같은 객잔에 앉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허어, 대협과 함께 온 후기지수인 모양이군. 아마 이번이 초출인 모양인데, 상대를 봐 가면서 말을 걸게나.”
이때 옆에 앉아 있던 수라도제가 아차하면서 재빨리 비육걸개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초출이 아니라 마교 교주일세. 말조심 하게나.》
순간 비육걸개의 발그스레하던 뺨은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 버렸다.
“허걱!”
“본좌는 상대를 봐 가면서 말하는 거니 네놈이 그런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네놈이 개방 출신이고, 또 소림사에 있다가 왔다는 점이 마음에 든 것뿐이니까 말이야. 자, 이제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나 좀 나눠 볼까?”
상대의 의향은 들어 보지도 않고 묵향은 수라도제에게 말했다.
“이녀석 좀 빌려 가겠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시게나.”
묵향의 말은 절대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 줄 수는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서도 의외였던 것이, 비육걸개가 순순히 묵향을 따라 객잔을 나가 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못 가겠다고 버티면서 수라도제에게 구원을 청했다면 자신이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육걸개가 순순히 교주를 따라서 나가 버리자 수라도제로서는 그들 사이를 막아설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재빨리 묵향의 뒤를 따라 일어섰고, 다른 무림의 명숙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비육걸개가 개 맞듯이 맞고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도중에 끼어들어 그를 구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멀리 가지도 않았다. 비육걸개를 객잔 뒤편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 후,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소림사가 왜 봉문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은데 말씀이야. 입을 열지 않거나,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상대의 위협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걸 모를 수 있겠는가. 저놈에게 박살 난 제자가 5백을 넘어섰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개방이 저놈에게만은 정보를 공개하자고 결의했겠는가.
“물론입니다.”
“하기야 잘 알고 있겠군. 본좌가 주리를 튼 개방 제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말이야. 자, 빨리 말해 보라구.”
“그게… 이런 말씀 드리기가 그렇지만, 사실 본방에서도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을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묵향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뭣이? 이것이 정말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비육걸개는 난감하다는 듯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믿지를 않으니 그로서도 난처했던 것이다.
“사실입니다. 제가 분명히 수라도제 대협께서 이끄는 구원 세력이 곧이어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장문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외로 장문인은 봉문을 결의했습니다. 싸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승산이 있고도 남으니까 본좌가 그 망할 놈들이 봉문을 선언한 이유를 네놈에게 묻는 거잖아. 아무도 소림을 돕지 않았다 해도 소림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봉문한 것이지?”
그 말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살점에 묻혀 있던 자그마한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교주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다. 개방이 모르고 있는 뭔가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호언장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걸 자신이 모른다는 걸 교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슬슬 유도 신문을 하여 교주가 뭘 알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육걸개는 개방의 결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주에게 정보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오늘 큰 건수를 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봉문을 선언하기 전날 장생전에 고승들이 모여 밤새도록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났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장생전에 들어가서 직접 들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찌 되었건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고승들이 모두 장생전에서 나오더군요. 그런 다음 그들은 모두 소림사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소림사에는 가 본 적도 없는 묵향이었기에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소림사 뒷산이라……. 거기에는 뭐가 있지?”
“뒷산 쪽으로 가면 먼저 조사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참회동이 나오지요. 그분들이 가는 방향으로 봐서 조사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참회동으로 가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참회동이라고? 그럴 리가.”
“아닙니다. 그쪽이 확실했습니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선대들이 쌓은 업적을 무너뜨리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니, 어쩌면 그것을 참회하기 위해 가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만…….”
비육걸개는 자신의 추리를 묵향에게 말했지만, 묵향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들이 참회동으로 갔다? 왜 참회동으로 갔다는 말일까? 모두 다 참회동으로 몰려간 후, 소림의 앞날을 결정할 중차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참회동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 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소림 내에서 그만한 발언권을 지닌 인물이 참회동에서 썩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단 한 가지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 있음을 모른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허어, 그러고 보니 그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지? 그가 합해진 소림의 힘이라면 금나라쯤이야 겁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강자지존(强者之尊)의 법칙이 통하는 세계에서 성장해 온 묵향으로서는 도저히 소림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린애와 어른의 싸움에서 어른이 대충 항복해 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어른이 어린애에게 뭔가 양보할 이유라도 있다면 또 모른다. 상대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약점을 잡혔든지…….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가?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얼거리던 묵향은 비육걸개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돌리며 질문했다.
“그놈의 참회동이 어디 있지? 본좌가 알기 쉽게 설명해 봐.”
비육걸개는 땅바닥에다가 손가락으로 소림사의 내부 건물들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여기는 처음이시라고 하셨으니, 알기 쉽게 설명 드리죠. 그러니까 이곳이 저기 보이는 정문, 정문을 들어서서 정면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이죠.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지객당입니다. 그 지객당 뒤편으로 몇 개의 건물들을 통과해서 쭉 더 들어가면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이 나옵니다.”
비육걸개의 설명에 묵향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구먼.”
“그 건물들을 통과해서 이쪽으로 더욱 뒤로 들어가면 야트막한 산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참회동이죠. 참회동으로 올라가는 길 이쯤에 조사전이 있으니 아마도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교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한지라 손쉽게 침투하시기는 쉽지 않으실 텐데요?”
비육걸개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파임을 자처하는 개방도가 아무리 방 내의 결의가 있었다고 해도 마교 우두머리에게 소림사 내부를 자세히 알려 주는 짓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비육걸개가 선택한 것이 이것이었다. 진실을 알려는 주되, 조사전으로 가기에는 가장 험난한 길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조사전으로 가는 길을 가장 알기 쉽게 알려 달라고 했으니, 이 이상 더 알기 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길들이야 빙빙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가 알려 준 통로는 곧장 방장실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방장실은 소림사 최상급 무승들의 집합체인 팔대호원이 호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는 도중에 나한전까지 덤으로 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묵향은 다시 한 번 더 땅 위에 그려진 지도를 자세히 바라본 후, 비육걸개에게 말했다.
“이렇듯 자세하게 설명해 줘서 고맙군. 그럼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또 보기로 하지. 잘 가게나.”
엄청난 속도의 경공을 발휘하여 자신의 시야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는 교주를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떠그랄! 정말 지랄같이 빠르군!”
잠시 후 비육걸개는 정신을 차린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놈을 다시 보게. 그건 그렇고 저놈을 만났다는 걸 빨리 총타에 알려야겠어.”
비육걸개의 두뇌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마교 교주가 숭산에 있다는 것을 총타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혹시 교주가 소림사에서 볼일을 마친 후 수라도제 일행에 재 합류할지도 모르니, 수라도제 일행에다가 개방 제자 몇 명을 파견하는 일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또 뭐를 해야 할까?
이때,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교주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송달송한 수수께끼 같은 말.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다고? 그런데 미쳤다면 왜 고승들이 그의 말을 듣고 봉문을 했단 말인가. 미친놈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 미친놈만 있으면 소림에게 금나라의 정예 병력 쯤이야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 되는 모양이다. 그 미친놈이 누구길래…….
비육걸개는 방금 전 교주가 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해 내기 위해 둔중한 비곗덩어리 속에 감춰진 날카롭기 그지없는 두뇌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미친놈이라……. 그게 교주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칭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욕인가, 아니면 진짜 상대가 미친 건가…….”
이때, 갑자기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호 하나가 있었다. 만사불황! 바로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 버린 소림사 최강의 무승을 일컫는 명호가 아니었던가. 교주가 말한 미친놈이 바로 그라고 가정한다면, 방금 전에 교주가 한 말이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었다.
“허어, 바로 그거였군. 공공대사가 돌아왔음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비육걸개는 수라도제 일행에게 되돌아가서 이별을 고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하남분타를 향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해 달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