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4화 (490/930)

묵향이 수라도제가 와 달라고 부탁한 곳에 만통음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그곳에는 수라도제 외에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룡무제는 내상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탓인지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묵향은 그 셋을 훑듯이 살펴본 후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본좌를 부른 이유는?”

“뭐가 그리 급하시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차를 드시겠소? 아니면 술을?”

그렇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어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묵향은 태연자약했다. 몇 가지 안줏거리 옆에 놓여 있던 빈 술잔을 집어 들고 술을 따르며 만통음제에게 화기애애하게 말했다. 꼭 술 한잔하기 위해 객잔에라도 온 듯.

“형님도 한잔 드시죠.”

“아니, 됐네.”

이런 냉막한 분위기 속에서 어찌 술맛이 난단 말인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람들의 앞에도 모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수라도제는 꼭 범인을 신문하듯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걸 알고 계셨소?”

묵향은 한 잔 쭉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도제는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 줄 수 있었잖소.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그놈이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을…….”

이때 갑자기 묵향이 수라도제의 말을 끊으며 으르렁거렸다.

“내 먹이에 손대지 마. 그놈은 본좌가 직접 명줄을 끊어 놓을 거야. 알겠나?”

하지만 수라도제는 콧방귀를 뀌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교주가 직접 갔으면 되었겠구려. 그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니…….”

“이번에는 본좌가 판단을 조금 잘 못했을 뿐이야. 그놈이 거기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요구를 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칼을 들고 그놈을 찾아가서 죽여 없애시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그딴 요구는 하지도 말고 말이오.”

“말 다 했는가?”

묵향이 싸늘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지만 수라도제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을 나무란다더니, 그 짝이 아닌가.

“아직 다 못 했소. 중원이 얼마나 넓은데, 그놈이 어디에서 튀어나올 줄 알고 당신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소?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놈을 만난다면 기꺼이 놈을 당신에게 양보해 주겠소. 하지만 당신이 없는 자리라면 노부는 그놈을 죽여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안 그러면 내가 당할 테니 말이오.”

수라도제가 그런 말을 할 만했다. 직접 싸워 본 결과 상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으니까.

묵향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 자신이 따라가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으니,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요구를 할 만큼 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정도로.

“그건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본좌가 조금 감정에 치우친 듯하니 이해하게.”

수라도제는 또다시 범인이라도 신문하듯 싸늘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놈이 익힌 무공이 뭐요?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의 무공을 익혔기에 도무지 죽지를 않는 거요? 노부가 만약 그런 치명상을 입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놈은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게 묵향의 비위를 건드렸는지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이죽거렸다.

“대답하기 싫은데?”

“대답하시는 게 신상에 좋을 거외다.”

“신상에 좋을 거라고? 흥! 좋을 대로 해 봐라.”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대립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도 했지만, 괴이한 무공에 대한 흥미도 적지 않았다.

“도대체 상대가 어느 정도로 상처를 입었기에 수라도제 대협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단 말씀이시오?”

수라도제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강기에 격중당해 장부가 완전히 뒤흔들렸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우리 셋이서 그놈을 합공했으니, 그놈의 실력이 현경급이 아닌 다음에야 살아 돌아가기 힘들었을 것이 아니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놈은 유유히 살아서 도망쳤소. 황룡문주에게 부상까지 입혀 놓고 말이외다.”

그 말에 만통음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극마급의 고수와 화경급의 고수가 정면 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서로 간의 우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세인들은 서로 엇비슷한 실력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고, 만통음제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의 말을 들어 보니 이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동생.”

수라도제를 생각하면 단 한마디도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만통음제가 질문을 던지니 어쩌겠는가.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귀혼강신대법(歸魂?身大法). 그것을 익히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신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웬만한 상처 따위는 곧바로 치료되어 버리죠.”

“정말 천마신교의 무공은 너무나도 기괴하구먼. 그런 무공이 존재할 줄이야…….”

“본교의 무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의 무공인가? 그런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말일세.”

“혈교의 것이라고 보시면 맞겠죠. 아마도 혈교에 그 비슷한 무공이 있는데, 그걸 본교의 무공과 연결하여 더욱 발전시킨 모양입니다.”

“허어, 참. 무공의 한계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구먼.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묵향과 만통음제가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었다.

“귀혼강신대법이라……. 그걸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뭐요?”

“알아서 생각해 봐. 본좌가 대답해 줄 이유는 없으니까.”

수라도제의 얼굴이 분노 때문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둘의 눈치를 살피던 만통음제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 무공은 상처 회복의 속도를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만드는 것인 모양이군. 하지만 상처 회복을 방해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가능성도 있겠지. 예를 들어 양강의 무학을 통해 살을 태워 버린다거나, 아니면 극음의 무학으로 살을 얼려 버린다거나…….”

가만히 듣고 있던 패력검제와 황룡무제가 끼어들었다. 그들 둘 다 극양이나 극음의 무학 따위는 익힌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익히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 극음이나 극양의 무학을 익힌 자는 흔치 않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절정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음양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한쪽에 치우친 무학만으로 절정에 오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죠. 그런데, 어찌 극양이나 극음의 무공을 논하십니까?”

“허어, 황룡 대협의 말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그렇다고 극양이나 극음의 속성을 지닌 신병이기를 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만통음제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여기만 박살 내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 말에 수라도제를 비롯한 다른 고수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쉬운 방법이!’하는 듯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한 고수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절정의 고수들 간에 있어서 실력의 차이는 종이 몇 장 간격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기에 이쪽이 조금 더 실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한순간에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공격 목표를 머리로 한정해야만 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될 정도로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녕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까?”

패력검제의 질문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글쎄…….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사실 본좌는 그 방법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난제로군요.”

“뭐 어려운 문제랄 것도 없네. 적의 장점을 알려 줬으니 이번에는 각자 자신이 지닌 장점을 충분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지. 적의 장점을 죽이고, 이쪽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대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 말에 수라도제는 티껍다는 듯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모르겠소? 그건 그렇고, 귀교에는 그 대법을 익힌 자가 많소? 이번에 그들과 싸울 때, 베어도 죽지 않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꽤 많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그걸 익힌 자가 마교에도 많다면, 앞으로 마교를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수라도제가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상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쯧, 생과 사가 오가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야. 처음부터 목숨을 잃기 싫은 놈이 어찌 지고한 경지를 개척할 수 있겠나? 본좌가 집권할 때 그런 놈들은 몽땅 다 목을 따 버렸지.”

패력검제가 충분히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교주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어쩌면 답보 상태에서 머물러 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한 가지 돌파구를 제공해 준 것이 교주와의 대결이었다. 교주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순간 패력검제는 목숨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어졌다. 그걸 어떻게 풀어 갈지는 자신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룡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을 만난 김에 한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제가 익힌 것이 청월검법이라는 사실은 아시겠지요?”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룡무제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귀교에서는 청월검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겁니까?”

“어찌 본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가?”

“흑살마왕은 제가 공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빈틈을 찾아 맞받아쳤습니다. 만약 제 깨달음이 조금만 미약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겠죠. 물론, 그가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그토록 손쉽게 상대했었다면 이런 말은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황룡무제를 지긋이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묵향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파훼법이 있어.”

“끄응…….”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알고 황룡무제는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황룡무제를 향해 묵향은 부드러운 어조로 질책했다.

“파훼법 따위에 초식을 벗어난 화경급 고수가 걸려들었다는 것은, 자네가 그만큼 상대를 경시했다는 말이 되겠지. 하기야 3대 1로 싸우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기에 앞서서 자네의 미흡함을 먼저 반성하게. 그게 옳은 수순인 듯하군.”

옆에서 이걸 듣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이 한 가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분을 물어보는 황룡무제나, 그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해 주는 교주나 자신이 봤을 때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교주가 황룡무제의 사부도 아니면서 왜 그런 의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 줘야 한단 말인가.

‘허어, 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군.’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자신이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만통음제는 재미있게 듣고 있더니 자신까지 덩달아 끼어들어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왔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하기야 저렇듯 호기심이 많으니 만통음제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력검제는 이들의 대화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번씩 자신이 궁금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까지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도제가 양양성 내의 최고수들을 모두 다 집합시킨 것은, 이번의 실패가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교주를 문책하고, 또 장인걸 일당이 지닌 전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회의장의 분위기는 이게 뭐란 말인가? 각자가 지닌 심득을 나누는 토론장이 되어 버렸다. 딱딱한 회의장의 분위기를 보고 처음에는 차를 시켰던 패력검제나 만통음제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든 것을 보면 대화를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할 작정인 듯했다.

‘뭔가 있어. 그 이전부터 이들이 교주와 교류가 있었음이 분명해. 안 그렇다면…….’

교주가 후진양성을 위해 자신이 지닌 것을 아낌없이 베풀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누가 봐도 그건 가능성이 없는 추리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미친놈이 장차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것도 얻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원래 무림이라는 것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계다. 협이니 뭐니 떠들어 대는 정파라 해도 그건 사정이 다를 바 없었다. 얼마나 세력이 강하냐에 따라 문파들의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렇기에 강한 문파들은 더욱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편으로는 약한 문파가 강성해지는 것을 철저히 억압한다. 자기가 강해지지 못하면 남이라도 약하게 만들어 놔야 자신의 강함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정파들보다도 더욱 강함을 추구하는 곳이 마교가 아닌가. 그곳의 교주가 타인의 세력이 커지도록 방치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히려 도와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야 어떻던 고급스러운 무공론이 흘러나오자 수라도제도 체면 불구하고 은근슬쩍 거기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이런 기회는 천금을 들여도 얻기 힘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거짓과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닌가.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듯, 거짓말들을 종합하여 유추하면 진실을 얻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이곳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한 꺼풀씩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며 대화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오해하면 거짓이 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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