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6화 (492/930)

한편, 팽대성에게 수작을 부린 묵향은 진팔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얼큰하게 술을 퍼마신 탓인지, 아니면 애송이들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은 탓인지 그의 마음은 흥겹기 그지없었다. 묵향의 말을 빌리면 남의 불행은 곧 자신의 행복이었으니까. 그것도 특히나 원한이 있는 상대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라, 웬일이래? 이렇게 늦게 나타나다니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늦게 나타나자 한 대라도 적게 맞게 되었기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 열심히 수련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구먼. 제법이야.”

‘당연하지. 한 대라도 적게 맞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팔은 가능한 한 무표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상시라면 이 상태에서 곧바로 진팔과 비무를 시작했을 묵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기운 때문인지 평상시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차 한잔 줄 수 있겠느냐?”

“예, 교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연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묵향은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지금은 우아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녀를 곁에서 계속 지켜본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만난 것이었기에 묵향이 느끼는 소연의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제 제대로 된 짝만 하나 구하면 모든 게 완벽하겠구나. 정말 너 같은 딸을 둬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이게 딸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적인 심사일까? 어떤 녀석이 괜찮은 배필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묵향의 뇌리에 갑작스럽게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과거 여자의 모습이었을 때, 아르티어스도 이런 생각을 했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남자인데 말이야.’

생각을 고치며 묵향은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한테 듣자 하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다면서?”

묵향은 소연의 배필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소연의 안색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 일그러졌다. 매파 노릇을 해 오는 만통음제에게 그토록 정중히 거절했건만, 그게 먹히지 않자 본인이 직접 수작을 걸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하는 소연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예,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소연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미소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 행운아가 누군지 내게 알려 줄 수는 없겠나?”

“죄송합니다, 교주님.”

소연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묵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소연은 차를 묵향에게 가져다준 다음 벌레를 피하듯 서둘러 자리에서 떠나 버렸던 것이다. 홀로 찻잔과 함께 남겨진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원했구나. 만족할 줄 알았어야 했거늘…….”

한꺼번에 차를 쭉 들이켠 묵향은 옆에 세워 놓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손아귀 가득 몽둥이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묵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떠올랐다. 그녀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진팔은 희생양이었다.

‘뭐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날 진팔은 평상시의 두 배는 더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덫에 걸린 옥대진

묵향이 장인걸을 슬며시 끌어들여 무림맹과 개방 그리고 7룡4봉을 상대로 장난질을 시작했을 때, 장인걸은 자신을 이용하여 장난질을 할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또한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잘난 인물이었기에.

사실 장인걸은 지금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와 무림맹의 이간질이었다. 그것을 위해 장인걸은 천마혈검대 고수 다섯 명을 선택하여 은밀히 불러들였다.

“본좌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다섯 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하명하시옵소서.”

“이것을 읽어 보거라.”

장인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 뭉치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천천히 날아올라 부복하고 있는 고수들 앞에 놓였다. 그것은 편복대주가 그동안 조사하여 장인걸에게 올린 무림맹에 소속된 각 문파들의 정보였다. 장인걸은 그들 중에서 별로 강하지 못한 군소문파 몇 군데를 선택해서 살생부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는 너희들이 공격해야 할 문파들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문파들을 멸문시킬 필요는 없고, 마교의 소행이라는 증거만 남겨 두면 된다. 알겠느냐?”

“마공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이다. 가급적이면 정파 쪽에 많이 알려진 초식들을 사용하도록 하거라. 자, 즉시 출발하라.”

“존명.”

다섯 명의 고수들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발하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인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인걸은 마교가 본격적으로 개입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흐흐흣, 그래. 마교도의 사명은 마도천하를 이룩하는 것. 묵향 네놈은 본좌를 위해 정파 놈들과 피 터지도록 싸워야만 해. 그동안 본좌는 마도천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세인들의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 주도록 하마.”

장인걸은 자신이 중원의 패권을 쥐기만 하면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도록 짓밟아 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묵향이라는 놈도 함께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장인걸이었다.

모두들 꿍꿍이속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다 보니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개방은 개방대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남양의 정보를 끌어 모아 그것을 무림맹에 전달해 주느라고 바빴고, 무림맹은 그 정보들을 취합하여 비밀리에 공격 작전을 완성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그사이에 끼여 있는 옥대진은 한편으로는 개방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어 마교보다 먼저 남양을 칠 계획을 짜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덫을 놓고 있는 묵향은 느긋하게 진팔을 족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덫의 중심에 서 있는 장인걸은 정파와 마교의 이간질에 정신을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마교 교주가 통보했던 2주일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수라도제에게 무림맹주의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태상문주님,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도착했다고? 그런데…….”

수라도제는 총관의 손을 슬며시 훑어봤다. 그런데 총관의 손에는 그 어떤 서신도 들려 있지 않았다. 총관은 수라도제의 의중을 눈치 챘는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님께 직접 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들라고 하게.”

“옛.”

잠시 후 실내로 안내되어 온 전령은 수라도제에게 인사를 건넨 후,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어 바쳤다.

수라도제가 봉서에 찍힌 봉인을 보니 무림맹주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수라도제는 서신을 쭉 읽어 본 후, 그때까지도 부복하고 있던 전령에게 말했다.

“맹주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전하게.”

“옛, 그렇게 전하겠나이다.”

전령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총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황룡무제와…….”

여기까지 말하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처음에는 패력검제와 황룡무제에게 조력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들과 교주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봉서에는 분명히 마교 교주가 눈치 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라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아니지, 본문의 고수들 중 실력 있는 자를 열 명만 추려 놓게. 경공술과 은잠술이 뛰어난 자들로 말이야.”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수라도제는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몰래 양양성을 떠났다. 혹여나 마교 교주가 눈치라도 챌세라 몰래 양양성의 높은 성벽을 뛰어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며 말이다.

수라도제 같은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마저도 몰래 이동하는 판에, 묵향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철부지들은 태평스럽게도 모닥불까지 활활 피워 놓고 야영을 즐기고 있었다. 벌써 금의 영토에 들어선 지 며칠이 흘렀건만,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이렇듯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그 불빛은 아주 먼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그 불빛을 보며 왕정(王晶)은 무심결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설풍검(雪風劍) 왕정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이름 있는 고수들 중 하나였다. 정파의 명숙들 중의 한 명인 그가 마치 3류문파의 살수라도 되는 듯 시커먼 야행복에 복면까지 뒤집어쓰고는 모닥불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신세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강호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너무나도 미숙해!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멀리에서 철없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놈들 중에 옥대진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의 손자이기도 했지만, 공동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배경이 아무리 화려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왕정 같은 고수가 봤을 때 그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철부지나 다름없었다.

옥대진은 남양을 기습할 계획을 은밀하게 왕정에게 말했고, 그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위험도가 높은 일인 만큼 조금 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숨이 날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 청을 해 온 인물이 자신의 동문사제기도 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옥진호의 얼굴을 봐서라도 왕정은 그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어 왕정이 옥대진의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게 된 것이다.

“참자, 참아.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왕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은밀하게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도 이렇게 둘러보다가 한 놈 잡았지 않은가. 오늘 또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은밀히 자리를 옮기던 왕정은 뭔가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헛!’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리자, 방금 전까지 그가 숨어 있던 지점 근처에 서 있던 나무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박혀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왕정으로서는 상대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화살이라면 모를까, 암기를 던질 수 있는 거리라면 뻔하니까.

왕정은 기쾌한 신법을 사용하여 미지의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헛! 추귀보(追鬼步)? 자, 잠깐!”

공동파가가 자랑하는 보법이 추귀보다. 아마 상대가 그것을 알아본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놈의 요구대로 멈춰 줄 왕정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왕정의 허리에서 뽑혀 나온 그의 애검은 괴한의 목숨을 끊기 위해 파고 들어갔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같이 시커먼 복색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떨리는 상대의 눈이 극도로 당황한 듯한 그의 심경을 나타내 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왕정이 아니었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네놈은 사람을 잘못 택한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위기를 느낀 상대방이 재빨리 보법을 전개하여 왕정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상대가 방금 전에 사용한 현란한 보법은 왕정도 잘 아는 것이었다. 오늘날 명문들 중의 하나인 황보세가가 있게 해 준 보법이었으니까.

“어엇! 천왕보(天王步)? 어떻게…….”

멍청하게 서 있는 왕정을 향해 상대는 소리 죽여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크흐흐흣, 여기에 온 것이 노부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왕정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왕정이 절파검(切破劍) 장로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 말에 절파검 황보청(皇甫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례는 무슨 무례. 그래도 서로 간에 큰 사고가 안 일어나서 다행이구먼. 첫 일격에 최선을 다했었다면, 자네 시체를 볼 뻔했어. 오늘 낮에 본 놈 생각하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충 공격한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게.”

절파검 황보청이 이런 말을 할 만도 했다. 황보청은 왕정에 비하면 격이 다를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황보청 같은 뛰어난 고수가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황보룡도 목숨이 아까워 위쪽에 살짝 도움을 청한 모양이다.

황보청은 다시금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자네가 온 줄 알았다면 노부는 오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자신을 띄워 주는 말이었기에 왕정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오히려 장로님과 동행하게 되어 든든할 따름입니다.”

“그런가? 어찌 되었건 자네까지 여기 와 있는 것을 보면, 잘하면 다른 녀석들도 누군가 조력자를 불렀는지도 모르겠군. 다음부터 손 쓸 때 좀 더 주의해야겠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황보청과 왕정은 그때부터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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