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장로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뭔가 그자가 손을 썼던 것은 분명합니다. 안 그러면 태상문주님께서 그때 그토록 큰 내상을 입으실 이유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대장로의 말을 들은 서문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두 분이 그냥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말이지요.”
“흠,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느 정도였지요?”
서문길의 예리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주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대장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신(老臣)이 대결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시간을 잰 것이 아니니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노신이 기억하기로는 천천히 숫자를 셌을 때,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오십 정도를 셀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가주님께서도 서로 간에 뭔가 내력 대결이 있었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시는 모양이신데…, 그 짧은 시간에 내력 대결을 펼쳤고, 그 결론이 났다는 것은 너무 심한 억측이 아니겠습니까?”
「께서도」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봐서 대장로도 그런 의심을 해 봤었던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서문길과 대장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문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리고 대장로는 그때의 일을 가주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기에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자신이 뭔가 빠뜨린 것이 없는지 회상하고 있었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대장로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참, 태상가주님께서 정신을 차리신 후 노신을 불러 질문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교주와 태상가주님께서 대치하고 계실 때, 뭔가 기파(氣波) 같은 것이 느껴지더냐 하는 것이었지요. 노신이 그런 것은 못 느꼈다고 말씀 올렸더니, 그렇다면 옷소매가 떨리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외형적 변화라도 없었느냐고 물으셨죠.”
“그래서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사실 두 분은 잠시 서로 노려보고 계셨을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표정을 일그리시며 그만 나가보라고 하시더군요.”
“흠, 그렇다면 아버님은 그때 그자와 뭔가 내력 대결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내력 대결을 하셨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만, 태상가주님께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입을 다물고 계시는데 노신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서문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어찌되었건, 갑자기 태상가주님께서 쓰러지시는 바람에 그 일은 그냥 묻혀졌습니다. 태상가주님을 치료하고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교주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지요.”
이때,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총관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총관은 대장로와 가주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용건을 밝혔다.
“가주님께서 대장로님과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렇듯 방해를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
“무슨 일인가?”
“예, 무림맹에서 급전(急傳)을 보내왔습니다.”
“급전이라고?”
총관이 건넨 서신을 읽은 서문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
여기까지 말한 서문길은 대장로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현재 그의 아버지인 수라도제는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 아버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까지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대장로가 조언했다.
“그렇게 급박한 일이라면, 각 단체의 원로들과 상의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찌되었건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그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게 좋겠군요.”
서문길은 대장로에게 치하한 후, 총관에게 명령했다.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게.”
“옛, 가주님.”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모
총관이 물러간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양양성에 무리를 이끌고 파견되어 있는 거대 문파들의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서문길에 비해 나이뿐 아니라 배분마저도 훨씬 높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모든 세력들 중에서 서문세가의 세력이 가장 컸고, 서문길은 그 가주였기에 그가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게 된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사이좋게 들어온 것은 무림의 원로고수들인 종리영우와 제갈기였다. 종리영우는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 있는 사위를 보고 따뜻한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노부를 불렀는가? 아무래도 사적인 일은 아닌 듯한데…….”
“일단 앉으시지요. 장인어른.”
제갈기와 종리영우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서문길은 좌중을 둘러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에 가득 차 있어 젊은 나이에 대문파를 이끌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무림맹으로부터 긴급한 서신이 도착했기에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긴급한 서신이라는 말에 좌중에 앉아 있는 수장들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어렸다.
“현재 금의 일부 병력이 본대와 떨어져 나와 회남(淮南) 인근에서 도강(渡江)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방을 대표해서 자리에 앉아 있던 부운걸개(浮雲乞쾬) 장로는 서문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개방으로부터 그런 비슷한 내용의 정보조차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장인걸이 풀어놓은 편복대와 중원무림의 첩보조직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뜬금없는 정보가 튀어나온 것이다.
적이 파 놓은 함정일까? 아니면 연막인가? 그도 아니면 진짜? 부운걸개 장로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부운걸개 장로는 조금 미심쩍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말투는 공손했다. 자신이 서문길보다 연배가 높다고 하지만 상대는 거대방파를 이끄는 주인이었고, 자신은 개방의 장로일 뿐이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게 정확한 정보입니까? 제가 맹의 정보력을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이 놈들의 농간일 수도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부운걸개의 말에 서문길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아마도 정확한 것일 겁니다.”
“무영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영문이라는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은 흡사 소태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중원 최고의 정보단체라는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그 정확도는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정보 판매를 업으로 하는 자들인 만큼, 그 진위(眞僞)를 철저하게 가렸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것으로 먹고 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부운걸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무영문에 개방이 뒤쳐졌다는 것이 아닌가.
이때, 그의 장인인 종리영우가 끼어들었다.
“허, 그거 큰일이로구먼. 그래 놈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하던가?”
그 물음에 서문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회남 인근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조선소에서 불철주야(不撤晝夜)로 함선들을 건조 중인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소라면 봄이 될 때쯤에는 최소한 3만 정도의 인마(人馬)를 수송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거라고 무영문은 추측했답니다.”
그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이 변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3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무영문의 정보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부운걸개 대협.”
“허∼, 무림맹에서 긴급서신을 보낼 만도 합니다. 기실 그곳에서 도강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남경까지는 지척이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황룡무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이라면 왜 교주를 빼고 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부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구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 제갈기가 버럭 외쳤다.
“그놈을 불러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황룡무제 대협. 회하(淮河)의 도강을 막기 위해 송군과 연합하여 몇몇 무림명숙들이 힘을 보태고 있소. 아무리 놈들의 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방어선이 쉽사리 뚫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실 황룡무제에 비해 제갈기의 연배가 훨씬 높았고, 또 지닌 바 세력도 월등하게 컸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화경급 고수였기에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무림에서 높은 배분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갈기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패검천령 대협의 말씀이 옳다고 보오. 오랑캐들은 수전(水戰)에 약하지 않소? 그놈들이 몰래 도강한다면 몰라도 이미 그 의도가 들통난 이상 그곳에서 도강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부운걸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오랑캐들이 수전에 약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놈들의 뒤에는 흑살마왕과 그 졸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앞서서 길을 뚫는다면 회하에 주둔 중인 송군들 만으로는 도강을 막아 내기에 역부족일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부운걸개 장로의 지적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과반수가 공동파 인근에서 흑살마왕이 거느린 집단과 피튀기는 접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기에 상대가 지닌 전투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여기 모인 인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종리영우가 먼저 대답해 왔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듯하구먼. 그렇다면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 조선소는 물론이고 놈들이 건조하고 있는 배들을 몽땅 다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합니다. 이때, 배를 건조하는데 도움을 준 장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작전이 될지도 모르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교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부운걸개의 지적에 황룡무제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려했지만 혼원패권(混元覇拳) 팽선(彭詵)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황룡무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긋한 표정으로 손을 슬쩍 들며 끼어들었다.
“뭐하려고 마교놈들과 합작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이번 작전은 노부가 맡겠소이다.”
팽선의 자신감 넘치는 제의에 이곳에 모여 있는 다른 이들은 모두 다 반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혼원패권 장로께서 맡아주시겠소이까?”
팽선은 하북팽가의 장로였다. 그가 나선다는 말은 양양성에 와 있는 하북팽가의 전력(全力)을 투입하겠다는 뜻이니 이곳에 모인 다른 인물들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살마왕이 도강을 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중요 거점에 휘하의 고수들을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만큼, 그들을 뚫고 들어가서 불을 지르려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희생을 팽가가 앞서서 책임지겠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반응과 달리 얼굴색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팽선과 함께 이곳에 파견되어 온 하북팽가의 또다른 장로인 팽지량(彭志亮)이었다. 그는 다급히 팽선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아니, 대성이를 죽인 금나라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아우 마음은 내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이 큰일을 덜컥 떠맡겠다고 나서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아마도 팽지량은 가주의 아들 팽대성이 금군들에 의해 참살당한 일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팽선은 뭔가 복안이 있는 듯 자신감 있게 대답해 왔다.
<형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본가에 누가되지 않도록 처리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좋은 묘수가 있다면 한번 해 보게.>
동료의 묵인을 얻어내자 팽선은 좌중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곳에는 지금 3만 금군과 흑살마왕이 파견한 일부 고수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팽선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팽선은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그곳에 본가의 세력만 이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이 사실인데…, 그 인선을 저에게 일임해 달라는 것입니다.”
팽선의 제안에 종리영우가 찬성했다.
“자네의 제안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네. 사지에 들어가 함께 싸울 동료들인데, 서로가 손발이 맞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도(覇刀) 대협.”
모두에게 포권을 하여 사례한 후, 팽선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계획이 실패했을 때,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출하는 인원수에 제한을 두는 것이 좋겠지요. 본가에서 5백의 정예를 투입할 테니, 호명된 문파에서도 5백씩의 인원을 차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찬성했다. 사실 거대문파들의 경우 5백 명 정도의 피해라면 원통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찬성하자 팽선은 호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먼저 맹주를 배출한 무림의 태두, 무당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문파가 호명당할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무당파 장로는 즉각 허락했다. 사실 자신의 문파가 가장 먼저 호명되었으며, 그 와중에 「태두」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불려 졌기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매우 흡족해 하는 기색마저 띠고 있었다.
“허허헛, 팽선 대협의 제의는 아주 타당하다고 하겠소. 기꺼이 동참하리다.”
이렇게 말한 무당파 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칠 일 후에 삼절군(三絶君)이 문도들을 거느리고 도착한다고 하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되실게요.”
삼절군이라면 과거 칠룡에 꼽혔던 무당파 속가제자 능소천(陵紹天)을 말한다. 과거 잘생긴 그의 외모 때문에 옥면공자(玉面公子)라 불렸었던 그는 검(劍), 시(詩), 음(音), 이 세 가지에 모두 능통하고, 깊다고 하여 삼절군으로 불리고 있었다. 태극검법의 달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파의 제자로서는 특이하게도 피리와 금을 이용한 음공(音攻)에도 조예가 깊은 특이한 고수였다.
물론 무당파 장로의 말대로 그가 가세해 준다면 팽선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겠지만, 팽선에게는 그것이 별로 달가운 제안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욱 명성이 뛰어난 능소천이 합류한다면 자기는 그야말로 개털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점잔을 빼며 그의 동참을 거절했다.
“허어, 이레라구요? 물론 삼절군 대협의 동참은 참으로 큰 힘이 되겠으나, 워낙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라 이레씩이나 기다릴 수는 없을 듯하구려. 어찌되었건, 무당에서 흔쾌히 동참을 허락해 주시니 이 팽모로서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무당파 장로에게 감사한 후, 팽선은 다음으로 참가할 문파를 지명했다.
“다음으로 현재 이곳 양양성을 책임지고 계신 서문세가에서도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서문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찬성의 뜻을 밝혔다.
“대협께서 저희 가문을 무당 다음에 놓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당할 피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모두들 그 다음은 자신들의 문파가 불려지기를 원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노회한 팽선이 사람들의 관심사를 그런 식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팽선이 거론한 문파는 종남파였다. 물론 종남파의 경우 본문은 금에 의해 멸문당했지만 송류 장로가 이끄는 종남의 고수들이 이곳 양양성에 모여 있었다. 금이라면 자다가도 이빨을 가는 송류 장로인 만큼 자신들의 호명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빈도를 빼셨다면 칼바람이라도 일으킬 셈이었소이다. 빈도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혼원패권 대협.”
“무슨 겸양의 말씀을. 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종남파를 빼면 안 되겠지요.”
그 다음 팽선은 공동파 장로에게로 슬며시 눈길을 던졌다. 종남파 이상으로 큰 피해를 당한 것이 공동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동파의 장로는 팽선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그는 피해가 막심할지도 모르는 이번 작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멸문당한 공동파를 새로이 창건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고수 몇 명 잃는 것을 저토록 겁내다니……. 쓰레기 같은 말코 같으니라구. 쯧쯧, 한때 무림을 휘어잡았던 공동파의 명성도 이것으로 끝이로구먼.’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팽선이 다음으로 시선을 옮긴 인물은 사천성에서 당문도들을 이끌고 와 있던 당민걸(唐玟傑) 장로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번에 벌어질 전투는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과 싸우는 것 보다 다수의 병사들을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이까? 그런 만큼 소수로서 다수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당문에서 고수들을 보내주셨으면 감사하겠소이다.”
안 그래도 당민걸 장로는 자신들의 문파를 호명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당가의 금지옥엽인 당소진(唐素珍)이 금나라 놈들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탓이었다. 물론 수라도제의 적절한 도움으로 그녀의 목숨은 건졌지만, 여성의 몸에 상처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가 되겠는가. 옷에 가려진 부분의 상흔이 어느 정도인지 숙부인 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기 그지없던 그녀의 얼굴 위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극심한 분노를 느꼈었다. 더군다나 4봉에 뽑힐 정도로 재색을 겸비했던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변했으니, 평소 질녀를 매우 사랑했었던 당민걸의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호명되자마자 당민걸 장로는 희색을 띠며 사례했다.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라도 맡겨만 주시오. 당문의 독과 암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겠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는 말에 자신들을 호명해 주기를 원하는 수많은 눈들이 팽선에게로 모아졌다. 내로라하는 문파들만 거론된 만큼, 호명되는 것은 그 문파의 강성함을 자랑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빠진다면 주위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시간을 끌며 이리저리 바라보던 팽선은 뜻밖의 문파를 지명했다.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천지문이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모두들 아주 뜻밖이었던지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에서 쑤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쑤근거림 정도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장년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혼원패권 대협의 결정을 노부는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소이다. 이곳에는 오랑캐들에 의해 막심한 피해를 당한 문파들이 많이 있소. 그런데 유독 몇몇 문파에게만 복수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이렇게 말을 꺼낸 인물은 얼마 전 묵향의 계략 때문에 가문의 자랑인 황보청 장로를 잃은 황보세가의 장로 황보열(皇甫熱)이었다.
물론 이것은 노회하기 그지없는 팽선이 기다리던 제안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보세가를 끼워 넣으려고 했다가는 무림에서 쓴맛 단맛 다 본 이 노고수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해 올 가능성이 컸다. 현재 팽가에서는 이번 작전에 고수를 투입할 여유가 없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일부러 금에 큰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그 힘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파들을 거의 다 지명했으면서도 유독 황보세가만을 무시함으로써 상대의 성질을 긁어놨던 것이다.
그렇다고 팽선이 덥썩 상대의 제안을 수락할 리 없었다. 그렇게 빨리 허락하면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내색을 숨기고 난감한 척 우물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잠시 상대의 속을 태우던 그가 황보열을 향해 다시 한 번 경고하며 그를 좀 더 덫을 향해 끌어당겼다.
“이번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외다. 흑살마왕도 그곳이 송을 침공하기 위한 비장의 거점인 만큼 상당한 대비를 갖춰 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외다.”
그토록 위험한 곳에 딴사람들은 다 가는데 황보세가만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다는 것인가? 매우 자존심이 상한 황보열은 더욱 인상을 굳히며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가는 복수를 함에 있어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소.”
팽모는 짐짓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휴∼,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귀 가문에서는 절파검 황보청 대협을 잃지 않으셨소이까? 가문의 자랑인 절대고수를 잃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 노부는 잘 알고 있소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 팽모가 어찌 귀 가문에 다시 한 번 출혈을 부탁드릴 용기가 나겠소이까.”
그 말에 황보열은 완전히 넘어갔다. 그 증거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안색이 눈 녹듯 풀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황보열은 상대가 자신을, 아니 황보세가를 이렇듯 끔찍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팽선을 향해 포권하며 치하했다.
“본가를 그토록 생각해 주시니 가주님을 대신하여 혼원패권 대협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겠구려. 하지만 본가에서는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절파검 장로의 복수를 포기할 마음은 없소. 그런 만큼 대협께서도 본가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정말이지 감사하겠소이다.”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어찌 허락하지 않겠소이까? 아니, 황보세가에서 이토록 복수를 원하시는 줄 알았었다면 내 처음부터 황보열 대협께 청했을 거외다.”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타협이 된 것 같자 상석에 앉아 있던 서문길이 낮게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험험, 황보세가에서 참가를 허락하신 만큼 천지문은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천지문과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 팽선은 이미 생각을 굳혔는지 완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부가 보기에 천지문은 맹에서 하는 일에 전폭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명예 회복에 나서고 있소이다. 그 작은 문파에서 5백이나 되는 고수를 양양성에 투입한 것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수라도제 대협도 천지문을 좋게 보고 계신 듯했소이다. 그렇기에 노부는 그들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소이다.”
팽선의 설득에 모두들 조금씩은 수긍하는 듯했다. 사실 수라도제가 천지문을 이끄는 소연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그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