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세가 가주 이하 무림명숙들로부터 자신의 계획을 허락받은 팽선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팽선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제자를 불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이삼 일 내로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사부님.”
사부의 지시에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장담했다. 하지만 사부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음흉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하다면? 그렇기에 팽조는 슬쩍 자신의 속셈을 사부에게 말해 그 속을 떠봤다.
“그런데 사부님.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면 그 망할 계집도 함께 끌어들여 사지(死地)로 밀어 넣는 것이 좋지 않았겠사옵니까?”
그 말에 팽선은 참지 못하고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크흐흐흣. 네 생각을 어찌 노부가 모르겠느냐? 노부의 생각도 그러하다.”
팽조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그러시다면?”
“천지문도 함께 갈 것이야. 그렇지만 너는 절대로 이 일에 대해 내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부님.”
팽선은 진중한 어조로 제자에게 말했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하려면 기밀 유지가 최대의 관건이다. 천지문은 마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절대로 그 혐의가 본가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사부님.”
그의 목소리에는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팽선과 팽조, 두 사제 간이 음흉스런 미소를 주고받으며 속셈을 토로하고 있을 때,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이번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가주님.”
“예. 번번히 대장로님께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가주님. 늙은 노신이 아직까지도 가주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문길은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대장로를 질책했다.
“아직도 정정하시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렇고, 대장로님을 청한 것은, 이번 회의에서 혼원패권 장로가 각 문파에서 5백씩, 총 3천5백의 정예를 거느리고 금이 회하를 건너기 위해 전선(戰船)을 제작하고 있는 곳을 기습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본가에서도 5백을 지원해야 하는데, 대장로님께 그들의 인선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대장로는 가주가 자신에게 조언을 청해 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원래 뒷방 신세를 져야 할 늙은이가 뭔가 일을 맡으면 자신이 아직까지도 쓸모 있구나 하며 기뻐하지 않던가. 그것을 잘 알기에 서문길은 웬만한 일은 원로들과 상의해서 처리하고 있었다.
“혼원패권이 그들을 지휘하게 되는 만큼, 그보다는 한 급 떨어지는 인물을 보내는 것이 다툼이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만큼 무공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속천(粟闡)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성격이 순후하여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회한 혼원패권은 어떻게 끌어들이신 겁니까?”
예상외의 질문에 서문길은 잠시 당황했다.
“예?”
대장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능력이 제법 쓸 만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노신이 판단하기로는 남의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서문길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가 직접 자원했습니다.”
“자원했다구요? 흐음…, 그렇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데…….”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생각에 잠기는 대장로를 향해 서문길은 무릎을 탁 치며 다급히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해하기 힘든 제안을 했습니다. 천지문을 데려가야겠다고 말입니다. 천지문이 오명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그런 것까지 신경써 줄 만큼 천지문과 팽가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호오, 그것 때문이었군요. 가주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천지문도들이 저희들과 합류하고자 도착했을 때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태상가주님께서 도중에 끼어들었기에 그 둘의 대결이 끝을 맺었지만, 그때 그 일로 혼원패권은 크게 위신을 상했다고 봐야겠지요. 이름도 없는 여아와 2백초에 달하는 드잡이질을 벌이고도 제압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노신은 생각합니다.”
“허어, 그런 일이라면 말려야겠군요.”
“가주님께서 마음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혼원패권 장로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께서도 천지문을 꽤 좋게 보고 계신 모양이던데……. 그것이 조금 걸리는군요.”
“물론입니다. 어쩌면 태상가주님의 생각도 그 팽가 늙은이의 생각과 똑같을지도 모릅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주의 의문에 대장로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처음, 태상가주님께서 천지문의 합류를 허락하셨을 때, 그분께서도 쓰레기 같은 천지문을 그런 용도에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 뒤에 천지문도들 중의 일부와 친밀한 것처럼 행동하셨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뒤에 마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신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을 때, 뒤탈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그때 일은 소연을 좋게 본 수라도제가 그들의 참여를 거부하는 원로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떠든 것이었지만, 대장로는 그것이 수라도제의 본심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길의 안색에는 약간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속과 겉이 다를 수가 있다니……. 더군다나, 아버지의 그런 노회한 속셈을 곧바로 눈치 챈 것을 보면 대장로도 보통은 넘는 너구리라고 서문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런 만큼 가주님께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시면 됩니다. 만약 일이 잘못 틀어져도 그 잘못을 팽가에 뒤집어씌우면 그만일 테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가주님께서는 황룡무제 대협과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만.”
서문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한때 같은 칠룡(七龍)에 들어있었으니까요.”
“먼저 그분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도의 안내를 받고 들어오는 서문길을 본 황룡무제는 급히 일어서서 그를 마중했다.
“오오, 어서 오게나. 낮에 봤을 때는 회의 석상이라 인사도 제대로 못했구먼.”
황룡무제의 환대에 서문길은 활짝 미소지으며 응대했다.
“아닙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형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우선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이렇게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러고 보니 한 10년 정도 되었나?”
서문길은 과거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예. 형님 결혼식 때 뵙고, 그 후에는 저도 일이 많다 보니…….”
“그렇겠지. 자네가 가주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네. 집안에 일이 많다보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한때 서운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저도 가주가 되어 보니 알겠더군요. 틈틈이 무공 수련할 시간을 내기도 빠듯할 정도인데, 일일이 인사치레 하러 다니기는 더욱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들을 낳으셨다는 말은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들 얘기가 나오자 황룡무제의 얼굴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들 하나만 낳았겠나? 아들 딸 합해서 넷일세.”
“한참 재미있으…….”
서문길은 말을 시작했다가, 곧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에는 그의 부인도, 자식들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룡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뭐, 나라가 어려운데 어쩔 수 있는가? 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잔 해야지?”
황룡무제의 명령에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전시 중이라 그런지 뛰어난 명주(名酒)는 없었지만, 급히 마련한 것 치고는 꽤나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뱃속에 술이 조금 들어가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한동안 한담이 이어지다가 서문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며칠 후에 삼절군이 온다고 하더군요.”
“나도 오늘에야 알았네. 뭐,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 한잔은 나눠야겠지.”
과거 그가 아무리 실력을 인정받아 칠룡에 꼽혔었다고 하지만, 강호상에도 엄연히 신분의 차이라는 것이 있었다. 같은 칠룡이라고 해도, 황룡문이라는 작은 문파의 제자와 9파1방으로 대표되는 거대문파 무당파 제자의 신분과 같을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신분을 떠나 소탈하게 어울렸던 서문길에 비했을 때, 능소천은 황룡무제와 그렇게 친하지 못했다.
“참, 패력검제와는 친분이 좀 있으십니까?”
“패력검제? 그와는 여기 있으면서 좀 얘기를 나눴었지. 서로 간에 인연도 좀 있었고 말일세.”
“그렇다면 한번 자리를 좀 마련해 주시죠.”
“왜?”
“아버지께서 일이 좀 있으셔서 한동안은 제가 여기를 맡아야 할 듯합니다. 그런 만큼…….”
아마도 이곳 양양성에서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나가려면 이곳에 있는 화경급 고수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물어 온 것이었건만 황룡무제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뭐 그 사람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아주 진중한 인물이라, 쓸데없이 중간에 나서서 초 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여기서 생사를 같이 해야 할 사이인데, 통성명은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여(呂) 형이 살아계셨다면 통성명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죠.”
여 형이라면 과거 제령문의 대제자 여정(呂靜)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칠룡에 꼽혔었지만, 묵향의 칼아래 목숨을 잃은 비운의 고수였다. 서문길은 바로 그 여정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뭐 과거 칠룡에 꼽혔었다가 죽은 이가 어디 그 하나뿐이던가? 내가 칠룡으로 꼽혔었을 때, 만났던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망자만 셋에 행방불명이 둘일세.”
칠룡이라는 단체 자체가 빈자리가 나오면 재빨리 채워지기에 한 시대의 7룡이라고 해서 꼭 7명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빈자리가 나오는 형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결혼해서 빠지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죽어 버린 경우다. 물론 행방불명은 조금 경우가 틀린데,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그래도 행방이 묘연하면 사망한 것으로 판정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그러고 보니 탈명도(脫命刀) 형 소식은 못 들으셨습니까?”
황룡무제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그때 백씨세가에서 함께 있지 않았던가? 아마 지금 마교에 있을게 분명한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서문길은 술 한 잔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말했다.
“여기에 교주도 와 있다면서요. 그에게 안 물어보셨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보니, 그런 걸 물어본다는 것이 조금 그렇더군.”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요? 그 형 마교도라면 이빨을 갈았었잖습니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싫었던지 술잔을 입속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런대로 잘 있겠지. 어디서 그놈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아마도 그 때문에 교주에게 물어보지 못했으리라. 초류빈의 사망소식을 듣기 싫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