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6화 (502/930)

3일 후, 해질 무렵 팽선이 지휘하는 일단의 무림인들이 금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양양성을 출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팽선의 요구대로 천지문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천지문은 이번 작전의 참가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지문주가 이만큼 큰 출혈을 감수하며 무림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마당에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소연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팽선이 거느린 3천5백의 고수들은 작전의 성격이 워낙 기밀을 요하는 만큼, 아주 은밀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밤에는 이동하고 낮에는 그늘에 숨어 휴식을 취하며 이동하자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목표 지점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후 4일이 지나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몇몇 노고수들의 눈앞에 드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고, 그 강 너머로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넓은 평야와 산들이 보였다.

“맹에서 보내온 정보가 맞다면, 놈들의 조선소는 이 강 맞은편에 있을 거외다.”

팽선의 손짓에 따라 공격대로 차출되어 온 각 문파 수장들의 눈길이 일제히 강 건너편으로 돌려졌다. 그들 중에는 천지문의 소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하들은 모두들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각 지파의 수장들만이 이곳에 모여 적진을 정찰하며 앞으로의 작전을 토의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강 건너편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준 다음, 팽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개방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저 일대는 적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져 있다고 하오. 거기다가 여기에서 3일 거리에 3만에 달하는 금의 대부대가 주둔 중인 만큼, 혹 생존자가 있어 원병을 청한다면 곧장 이리로 대군이 달려올 거라는 말이오. 그런 만큼 육로로 저곳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노부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 말에 황보세가의 황보열 장로가 토를 달았다.

“그렇다면 강을 건너 기습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 많은 인원을 태울 만한 배를 어디서 구하시겠소?”

팽선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한 후 자신이 생각해 둔 계책을 말했다.

“물론 그렇소. 그런 만큼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병법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면서 팽선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는 강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우선 노부가 일단의 세력을 거느리고 저 멀리 우회하여 이 지점을 공략하겠소. 그렇게 되면 자연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는 금군들의 이목은 그곳으로 집중될 것이 아니겠소? 그때, 이곳에 매복하여 기다리던 매복조가 야음(夜陰)을 틈타 도강하여 배를 불태우고, 조선공들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구출하여 탈출하는 것이오. 매복조로 5백 정도만을 남겨둔다면 그들이 사용할 배를 구하기도 손쉬울 것이라는 것이 노부의 생각이외다.”

팽선은 주위를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혹시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최대한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 말에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노부가 생각하기에는 그 작전이 매우 좋을 듯하외다. 하지만 누가 매복조를 이끌 것인지…….”

그 말에 팽선은 좌중을 쓱 훑어봤다. 그러자 모두들 팽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복조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가장 막심한 피해를 당하는 곳도 매복조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악의 경우 몰살당할 가능성마저 있는 상태에서, 사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만큼 어리숙한 인물은 여기에 없었던 것이다.

한 순간 팽선은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입을 열었다.

“천지문에서 맡아주겠느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송류 장로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건 불가하오.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어찌 천지문 따위에게 맡긴다는 말씀이시오?”

그 말에 팽선은 비꼬듯 대꾸했다.

“호오, 그렇다면 도장께서 가시겠소이까?”

팽선의 그 말 한마디에 송류 장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천지문을 대신해서 그곳에 죽으러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네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가고 싶지 않다면 솔직히 의견을 밝혀도 무방하다. 워낙 위험한 임무인 만큼 누구도 천지문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야.”

물론 이 질문은 팽선이 던진 미끼였다. 강제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상대를 꼬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놔야 자신도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발뺌하기 편하고, 또 상대에게 자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사지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악의적인 의도에서 보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상대에게는 그걸 숨겨야만 했다.

팽선이 던진 미끼를 소연은 덥썩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임무를 성공리에 이끈다면 천지문의 위상은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또, 거절한다면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천지문에 대한 비난에다가 ‘비겁자’라는 조항이 하나 더 덧붙여질 우려까지 있었다. 그것을 뻔히 알기에 소연은 상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연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제 공격을 시작하는 것입니까?”

“노부는 전 세력을 이끌고 홍택호 쪽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송군(宋軍)의 도움을 받아 적들의 대비가 약한 곳에 도강할 생각이다. 도강과 동시에 회남을 향해 최대한 속도를 내어 진격해 들어가며 놈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야.”

팽선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아마도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금군과 그들을 돕는 마교놈들이 그 보고를 받고 이동을 시작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들이 노부가 거느린 세력과 충돌했을 때쯤, 자네가 움직이면 될게야. 그러니까… 노부가 도강한 다음 삼 일 후 밤에 움직이는 것이 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네.”

팽선은 지도에서 시선을 거둬 소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이제부터 홍택호로 이동하여 그 일대를 책임지고 있는 한세충(韓世忠) 상장군과 접촉할걸세. 만약 그가 전폭적인 협조를 해 준다면 빨리 도강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를 설득하는데 조금 시일이 걸릴 수도 있을 게야. 그리하여 구체적인 도강 날짜가 잡히면 곧장 자네에게 전령을 보내어 통고할 것이니, 이쪽이 도강한 날부터 시작해서 삼 일이 지난 후 야음을 이용하여 행동을 개시하면 될 게야. 그때까지 자네는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매복하는 한편, 도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기다리게나. 알겠는가?”

소연은 포권하며 대답했다.

“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원패권 대협.”

혼원패권 팽선이 거느린 세력과 분리되어 천지문도들만 남게 되자, 모두들 소연에게 의문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도들을 대표하여 진팔이 소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희들은 저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질문에 소연은 팽선에게 지시받은 작전을 설명했다. 그 말에 진팔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만약 놈들이 이쪽에 충분한 세력을 남겨둔다면 사지를 향해 스스로 걸어서 들어가는 꼴이 되는 게 아닙니까?”

“혼원패권 대협의 말씀에 따르면 흑살마왕을 추종하여 함께 행동하는 세력은 예상외로 많지 않다고 하셨다. 쓸 만한 고수들의 수는 2천 정도. 양양성 인근이나 남양에 배치해 놓은 수를 감안한다면 이곳에는 많아 봐야 1백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이상의 고수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혼원패권 대협이 행동을 개시하여 그들의 시선을 끈다면 다급히 그쪽으로 이동해 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거라. 이번 일이 성공하건 혹은 실패하건, 가장 중요한 일을 떠맡았던 본문이 더 이상 멸시받는 일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본문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게야. 알겠느냐?”

확신에 찬 소연의 말에 진팔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문도들에게 내일부터 이 부근을 돌면서 쓸 만한 배가 있으면 끌어 모으도록 하거라. 큰 배는 필요 없고 작은 배가 좋겠구나. 그편이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강 건너편이 적진인 만큼 이쪽의 움직임이 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할 것이야.”

“예, 사저.”

마화의 걱정거리

한참 동안 연무장에서 진팔을 기다리고 있던 묵향은 드디어 짜증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옆에 앉아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만통음제가 지루한지 나지막히 하품을 한 후 은근히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묵향의 속을 긁었다.

“우형이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야반도주를 했을 게야.”

“그토록 협박을 해 놨…….”

그 말에 뒤쪽에 서 있던 마화가 성깔어린 눈매로 묵향을 바라보며 다그쳤다.

“협박이라니요?”

그 말에 묵향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야.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협박씩이나 하면서까지 놈을 가르치겠냐?”

마화는 묵향의 변명을 못들은 척 천지문도들이 기거하는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 소저도 안 나오시는 것을 보면 천지문에 무슨 일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묵향은 내심 궁금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허락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가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예, 교주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마화가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묵향에게 보고했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어젯밤 출발했다고 합니다. 비밀을 요하는 작전인 듯 그 행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다면 내일 수련은 하지 못하겠다고 전갈을 보내는 것이 예의일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비밀 작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묵향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만통음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당연한 거야. 질녀는 추근덕거리는 자네를 썩 좋게 보지 않고 있을 테니 말하지 않았을 테고, 진팔이 그놈이야 이 기회에 지옥과도 같은 수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자네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그냥 내뺀 것이겠지.”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놈! 돌아오기만 해 봐라. 본좌가 그냥 놔두나. 감히 보고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내빼?”

이빨을 뿌드득 갈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가 묵향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밀 작전이라면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놔둬도 상관없을까요?”

“괜찮겠지. 그 아이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놈도 옆에 있잖아. 거기에다가 그런 비밀스러운 작전에 천지문만 보낸 것도 아닐 텐데 뭐가 걱정이야.”

묵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천지문이 지닌 실력이 어떻든 일단 천지문은 정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문파였다. 신뢰하지 않는 그들에게 단독작전을 줘서 내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건 그렇고 선물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으니 물건이 제대로 왔는지 한번 가 볼까.”

선물이라는 것은 물론 묵향의 지시로 대별산맥에 도착한 마교의 주력부대를 말함이다. 그 말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늘 밤 가 보시겠습니까?”

마화의 질문에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만통음제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선물이라니……. 혹시 술인가?”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관심을 보이실 물건은 아니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건 그렇고 오늘 할 일이 없어졌는데 함께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묵향이 만통음제와 함께 음악을 논하며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 마화는 천지문이 수행 중이라는 비밀 작전이 뭔지 알아보러 동분서주 했다. 묵향은 양녀인 소연과 진팔의 실력을 믿기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 버렸지만, 마화의 입장은 달랐다. 뭐니뭐니 해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그녀의 안위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화가 그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양성에 모여 있는 무림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서문세가의 고위층 인물들이 마교도인 그녀를 아예 상대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묵향이 서문세가 사람들을 상대로 드잡이질을 해 놨으니 그들이 냉대를 해도 할 말은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리저리 궁리하던 마화가 발길을 돌린 곳은 묵향과 친분이 있는 황룡무제의 처소였다.

“금군이 회남 인근에서 도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했었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이번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구태여 귀교의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교주에게 이번 일을 통보하지 않기로 합의했었소. 뭐, 혼원패권 장로가 큰소리치고 간 만큼 실패하지는 않을 테니 귀교에서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하구려.”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기습 작전에 동원된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뭐 같은 배를 탄 처지인데 못 알려 줄 것은 없겠지요. 하북팽가의 고수 5백을 주축으로 하여 3천5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소.”

솔직한 대답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예. 이렇듯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룡무제 대협.”

“무슨 말을……. 교주 같은 냉철하신 분이 그토록 격노하셨던 것으로 보아 노부가 알지 못하는 뒷사정이 있는 듯한데…, 오히려 정파를 자처하는 이쪽에서 속 좁게 나가는 것 같아서 노부가 되려 교주를 뵐 낮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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