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어찌 되었소? 황상 폐하의 윤허는 받았소?”
악비 대장군의 물음에, 유광세 상장군은 고개를 떨구며 풀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송구스럽다니, 설마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이상하구려. 재상께서 옆에서 도와주셨다면 충분히 윤허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본관은 예상했었는데…….”
유광세 상장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북진을 반대한 것이 바로 그 망할 재상 놈입니다.”
악비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소장이 어찌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악비는 유 상장군에게 의문스런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본관이 귀관에게 분명히 말했지 않았었나? 먼저 재상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이야.”
“소장을 의심하시다니 참으로 서운합니다, 대장군. 소장은 틀림없이 대장군께서 명하신대로 재상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재상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허락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황상 폐하 앞에 서서 그렇게 소장의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유 상장군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노성을 터뜨렸다.
“젠장! 그런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해대는 망할 새끼는 즉시 모가지를 비틀어놨어야 하는데…….”
“말이 지나치구먼. 그래도 그분께서는 일국의 재상이 아니신가. 그분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겠지.”
악비는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유 상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유 상장군은 황제 앞에서 망신을 당했을 때가 떠오르는지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만약 그렇다면 그 전날 소장에게 북진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 줬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해 줄 시간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물을 먹이는 것을 보면 그놈은 틀림없이 오랑캐놈들에게 뇌물이라도 받아 처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억측은 입에 담는 게 아닐세.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한다? 이제 봄이 코앞에 닥쳤는데 말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황상께 간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지원 따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치고 올라가면 어떻겠습니까? 금과 싸워서 승리만 하면 모든 허물은 묻혀질 겁니다.”
악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상 폐하께서 북진을 불허하셨는데, 병사들을 움직였다가는 곧바로 항명죄에 걸린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처음부터 황상 폐하께 간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소장을 다시 한 번 더 남경에 보내주십시오. 충분히 자료를 준비하여 북진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면 재상도 더 이상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닐세. 그것보다는 본관이 직접 재상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재상만 잘 설득시킬 수 있다면,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아낼 수도 있겠지.”
“그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놈이 뇌물을 받아먹은 것이 확실하다면, 대장군께서 곤경을 당하실 수도 있음이옵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뇌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게. 내가 예전에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생각이 올곧은 훌륭한 분이셨다네. 그분은 결코 뇌물 같은 것에 흔들리실 분이 아닐세. 알겠는가?”
전전긍긍(戰戰兢兢)
산들바람을 맞아 찰랑거리는 드넓은 홍택호를 가르며 일단의 수군 전선들이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다. 3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을 호송하는 선단(船團)인 만큼, 그 규모가 작을 수는 없었다. 크고 작은 전선(戰船)들을 모두 합해 50여 척에 달하는 대선단이다. 역풍(逆風)이 불고 있었기에 썩 항해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만, 전선의 좌우에 수십 개씩 지네발처럼 달려 있는 노들이 기운차게 움직이며 전선을 앞으로 내달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상장군을 만났는데, 모든 게 예정대로라고 하오. 아마도 잠시 후면 목적지가 보일 거외다.”
황보열 장로가 다가와 전하는 말에 팽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소식이구려. 그렇다면 잠시 후면 상륙할 수 있겠소이다.”
“참, 천지문에는 전령을 보냈소이까?”
팽선은 그런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르다 뿐이겠소. 출발하기 전에 전령을 보냈소. 오늘 상륙할 테니, 사흘 후에 행동을 개시하라고 말이오. 그 외에 개방으로부터 입수한 중요한 정보들까지 모두 다 전달했으니 잘 해내겠지요.”
그러면서 팽선은 슬쩍 미소지었다.
물론 복수라는 중차대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전달해 줄 팽선 장로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륙 지점부터 시작해서 적들의 움직임 등등…, 모든 것을 조금씩 틀리게 해 놨기에 천지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를 안고 막심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크흐흐흣. 전멸이라…….”
팽선의 말에 황보열은 안색을 달리하며 질책했다.
“아직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무슨 불길한 말씀이오?”
하지만 팽선은 태연자약하게 변명했다.
“노부의 말은 놈들을 전멸시키면 흑살마왕이나 금 황제놈의 안색이 어찌 변할까 궁금하다는 뜻이었소.”
“하하핫, 옳은 말씀이외다. 아마도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장면이겠지요. 그걸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
물론 통한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망할 계집이 죽어나가는 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때, 장수 한 명이 다가와 군례를 올린 후 팽선에게 전했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으니, 상륙 준비를 하시랍니다.”
사실 그건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필요 이상의 친절이었다. 별도의 치중대(輜重隊)를 필요로 하는 군대와 달리 무림인들은 각자 필요한 건량(乾糧)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있어서 이곳에 상륙하라는 통보만 해 줘도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착한 것인가?”
팽선은 상륙 지점 근처를 꼼꼼히 살펴봤다. 역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저 멀리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기마병 몇 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식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훗, 순찰병들인가?”
순찰병들은 조용히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이쪽에서 상륙함과 동시에 본대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어쩌면 저들 중에 한둘은 벌써 이 근처에 송군의 전선이 떴음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래그래, 놈들도 제법 잘 하고 있구먼. 저 정도 준비는 해 두고 있어야 성동격서가 통하지. 놈들이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다면 이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광대놀음일 테니…….”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사부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팽조는 그렇지가 못했다. 팽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부에게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
맹한 팽조의 얼굴에 팽선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쯧. 너는 알 것 없다.”
무림맹 3천 고수들의 도하 작전은 너무나도 싱겁게 성공했다. 그들의 도하 시간이 워낙 짧은 것도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적병도 나타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것은 금 제국의 국경 방어 방식이 송 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농경과 상업에 치중하고 있는 송의 경우 외적이 침입해 들어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경선 안으로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국경선에는 언제나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정수의 방어 병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에 치중하는 금의 경우, 국경선은 거의 비워 두고 있었다. 영토는 넓고 인구는 적으니 그 엄청난 국경선 전체에 걸쳐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적이 침공하면 그때 병력을 끌어모아 침입한 적을 확실하게 응징한다. 아니 응징하는 정도가 아니라 침입한 국가를 역으로 쳐들어가 다시는 쳐들어올 생각조차 못하도록 아예 끝장을 내놓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평상시에 국경선을 지킨다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는 매우 경제적인 방어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의 피해가 크겠지만 말이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지금부터 최대한 놈들의 눈에 띄게 행동해야만 하오.”
“알겠소.”
소연은 안으로 겨우 1장 남짓 파고들어간 비좁은 토굴 속에 앉아 이것저것 자신이 취합해 놓은 정보들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다. 매일 밤, 진팔을 보내어 강 건너편의 적진을 살펴보기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딘가에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조심스런 진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저. 혼원패권 대협께서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진팔의 목소리에 소연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과연 토굴 밖에는 진팔과 함께 낮선 인물이 서 있었다. 흑색무복을 입은 그는, 입구를 위장해 놓은 나뭇가지들을 치우며 토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소연을 향해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런 상대를 향해 전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 합니다. 워낙 사정이 이렇다보니 행색이 누추함을 용서하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본인은 팽소량(彭素梁)이라 하오.”
팽소량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듯 토굴 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니, 놀랍소이다. 완벽하게 위장을 하고 있기에 여기 진 소협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주위를 계속 돌아다녔었소.”
하지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놀라움을 담고 있다기보다, 지금껏 상대의 위치를 찾지 못해 고생하도록 만든 것에 대한 짜증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팽소량도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고, 천지문도들도 완벽히 위장한 채 숨어 있다 보니 오랜 시간 서로가 술래잡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진팔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팽소량은 이 근처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느라고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있었던 것이다.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혼원패권 대협께서 은밀하게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셨기에…….”
물론 팽소량으로서도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원패권 장로의 명령대로 행동했다는데 그걸 어찌 야단치겠는가.
“아, 그걸 탓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다만 이렇듯 훌륭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 꺼낸 말이었소.”
팽소량은 품속에 넣고 온 두툼한 밀서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장로님께서는 정확히 약속된 날짜에 움직이셔야 한다는 것을 재삼 당부하라고 전하셨소. 그리고 개방으로부터 입수된 최신정보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비밀을 요하는 정보들까지 함께 동봉되어 있는 만큼,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후에 서신을 불태우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오.”
소연은 밀서를 품속에 넣으며 팽소량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혹 저들의 눈에 띌 우려도 있으니 안에서 얘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팽 대협.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시면서 몸이라도 좀 녹이시지요.”
팽소량은 방금 전 소연이 기어 나왔던 토굴 입구를 힐끔 바라봤다. 시커먼 구멍만 뚫려있었기에 내부가 얼마나 넓은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구를 아주 작게 뚫어놨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여기 서 있는 진팔이나 소연처럼 바지에 흙을 묻힐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팽소량은 옷을 버려가면서까지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빨리 돌아가서 장로님께 서신을 전달했음을 전해야만 하오. 이곳을 찾느라고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한 만큼, 소 소저의 친절을 사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구려.”
팽소량의 속도 모르고 소연은 오히려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팽 대협. 오히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잡고자 한 저의 잘못입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팽소량은 돌아서려다가 멈칫 다시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밀서에는 저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될 내용들이 많이 있소.”
소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읽은 후, 바로 태워 버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팽소량은 혹시라도 눈을 밟아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건너뛰며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