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0화 (506/930)

흑풍대는 갑작스런 출동 준비 때문인지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에서 관지를 찾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만통음제는 이놈 저놈 붙잡고 물어서 결국은 관지를 찾아냈다.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팽선의 위치를 물어보는 만통음제에게 관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저희들도 그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모실 테니 함께 움직이시면 편리하실 겁니다. 어르신.”

“아니, 노부는 위치를 알아야겠네.”

꼭 알아야겠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관지는 무영문으로부터 통보받은 팽선의 마지막 위치를 만통음제에게 알려줬다.

“남양 방면으로 서서히 진격하며 금 세력을 압박할 것이 분명한 만큼, 그들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대답한 후 관지는 만통음제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어찌 보면 이번에 할 말이 만통음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도 대단히 수준 있는 고수들이 존재하는 만큼, 단독 행동을 하시는 것 보다는 저희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그런 염려까지 해줄 필요는 없네. 노부의 안전이 위험할 정도로 놈들의 세력이 강하다면, 질녀의 생명 또한 위험할 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노부는 먼저 갈 테니, 그리 알게.”

만통음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돌아서며 경공을 전개해 버렸다. 만통음제는 점점 더 가속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전속력으로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성문이 점차 가까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성벽 위로 뛰어오를 작정인 모양이다.

“질녀라니…, 질녀가 누구지?”

곧이어 관지는 만통음제의 질녀가 누군지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서 만통음제 대협과 의형제를 맺으셨다고 마화에게 들었으니, 소 소저가 질녀가 되겠군. 그런데 소 소저의 생명이 위험하다면서 왜 혼원패권에게로 달려가시는 거지?”

관지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연이 팽선 일행과 행동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관지로서는 만통음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이 다가오자 서문세가의 호위무사들은 긴장하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주님.”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순간 묵향은 이놈을 박살내 버릴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수라도제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이 앞에서 다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묵향은 성질을 참으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일단 기별이나 넣거라. 쓸데없는 잡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호위무사의 말은 전과 똑같았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질이 나기 시작한 묵향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호위무사를 다그쳤다.

“뭣이? 이놈이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잡소리 하지 말고 기별이나 넣어 보라는데, 왜 네놈 따위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냐?”

호위무사는 묵향의 살기에 압도당해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여, 연락을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묵향은 호위무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거렸다.

“정녕 네놈이 죽고 싶다는 것이냐?”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때, 뒤쪽에서 호위무사보다는 조금 더 높은 신분을 지닌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러다가 그는 호위무사의 머리통에 가려져 있던 교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헉! 교, 교주?”

묵향은 더 이상 하급 무사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그놈을 놔준 다음, 경악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는데, 저놈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야. 자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무사도 방금 전의 그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태, 태상문주님을 만날 수 없소.”

묵향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안 그러려고 했는데……. 몇 놈 잡아 죽여야 그놈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태, 태상문주님을 만나 보실 수는 어, 없을 거요.”

이쯤 되자 묵향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떻게 모두들 한결같이 만날 수 없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란을 일으킨다면 수라도제가 곧바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수라도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묵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무사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수라도제가 있기는 있는 거냐?”

“무, 물론 계십니다. 하지만 교주를 만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제기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떤 놈이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묵향은 수라도제가 있는 저 내실 안쪽으로 강렬한 투기(鬪氣)를 쏘아 보냈다. 만약 수라도제가 저 안에 있다면 무슨 일인가 하여 튀어나올 정도로 지독한.

곧이어 넓은 장원의 여기저기에서 서문세가의 무사들이 저마다 중도(重刀)를 뽑아들고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 수라도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서문길은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투기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허억!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마시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지만, 서문길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 투기는 씻은 듯 사라졌지만, 서문길은 진저리 쳐지는 그 강렬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서문세가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투기를 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아버님이?’

이렇게 생각한 서문길은 지체치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투기가 느껴졌던 정문 쪽으로 다가간 서문길은 자신이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잠시 한탄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아니라 누군가 딴 사람이 서문세가 식솔들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허참, 아버지 말고 그 누가 있어 그토록 엄청난 투기를 발(發)한단 말인가?’

확실히 상대의 투기가 엄청나긴 엄청났던 모양이다. 서문세가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고수로 통하는 사촌 형 서문료(西門了)가 두려움에 질려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세히 보면 그의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을 정도니 상대가 준 위압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문길은 짐짓 목소리를 엄중히 하여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서문료가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지만, 문주였다. 그렇기에 그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교 교주가 태상문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여…….”

상대가 마교 교주라는 말에 서문길은 흠칫 놀랐다. 탈마의 고수라고 하더니 과연 엄청난 기세였다. 칠룡의 동기들과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상대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듯, 상대 또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포권하여 예를 갖추며 자기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본인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이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아버지를 뵙자고 하셨소이까?”

그 즉시 상대에게서 반응이 왔다. 교주는 서문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가주라고?”

순간 상대의 표정이 변했다. 냉막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어찌나 부드럽게 바뀌던지 그 변화를 지켜보는 서문길이 다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호오, 수라도제에게 이런 훌륭한 아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구먼. 크흐흣. 내 사실은 한 가지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씀이야.”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속 보인다고 해야 하나…….’

상대의 반응으로 살펴 보건데,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속 보이게 행동을 하다니. 서문길은 그것을 보고 상대의 속셈이 너무나도 얄팍한 듯하여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상대는 자신의 표정 변화에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자신이 그렇게도 만만하게 보이나 싶어 내심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교주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이목이 좀 많은 듯하니, 어디 조용한 곳이 없을까?”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전의 그 투기로 인해 정문 근처에는 서문세가의 무사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것도 단단히 무장을 갖춘 상태로 말이다.

“예. 여기는 좀 어수선 하니 안으로 드시죠.”

서문길은 교주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는 하녀를 불러 차를 가져오라고 이른 후, 교주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 오셨다니…,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번에 팽모(彭某)라고 하는 자가 금을 치기 위해 고수들을 이끌고 움직였다고 들었네.”

“예.”

“그런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본좌가 찾아온 것이지.”

일단 상대가 왜 찾아온 것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그래야만 뭔가 협상을 해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서문길은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점이 미심쩍으신 겁니까?”

“자네도 생각해 보게나. 장인걸이 바보도 아닌 바에야 지금 그가 양동작전을 쓰려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나?”

이번 작전에 대해 마교 쪽에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주가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에 서문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도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교주는 그런 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어디서 들었는지는 상관없지 않은가? 쓸모도 없는 것을 괜스럽게 따지고 들어봐야 양쪽이 서로 피곤하기만 한 것을. 그러니 그건 그냥 넘어가고, 사실인지 아닌지만 말해 주게.”

“방금 하신 말씀이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본좌가 한 팔 힘을 보태고자 하네.”

‘힘을 보태준다고?’

하지만 서문길은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오랜 세월 무림에서 최강의 위치를 유지한 절대적인 고수였다. 수많은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무림에서 그런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힘만 강해가지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임을 서문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상대의 속을 떠봤다.

“힘을 보태신다 하심은?”

“흑풍대에게 일러 팽모를 도와주라고 일렀네. 그리고 형님도…, 아니 만통음제 대협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 만큼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양동작전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일세.”

서문길은 교주를 빤히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걸 교주도 눈치 챘는지 곧바로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본좌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일세. 자네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일을 본좌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여기 오기 직전에 명령을 내려놨으니 1시진도 안되어 모두들 출발할거야. 그리고 자네와 얘기가 끝난 후에는 황룡무제한테도 찾아가서 한 팔 거들라고 청할 생각일세. 자네는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장인걸 같은 자를 상대하는 데는 괜히 이런저런 꼼수를 쓰는 것 보다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한방에 끝내버리는 것이 훨씬 좋거든.”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노회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길도 그 나름대로 일문을 이끌 체계적인 교육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이용하여 저들이 역으로 양양성으로 치고 들어온다면 그 일을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적기가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내 그것도 생각해 봤네. 저들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움직여 온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고수들만으로도 충분히 며칠 정도는 버텨낼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장인걸이 직접 온다면…….”

“여기에는 본좌도 있을 거고, 패력검제와 수라도제도 남아 있을 텐데 그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서문길의 흥미는 급격히 떨어졌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하고 얘기하기가 심히 껄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그 얘기는 됐습니다. 교주님께서 혼원패권을 돕겠다고 하시는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실 얘기는 그것뿐이십니까?”

서문길의 시큰둥한 대꾸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본좌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양동작전이 필요 없어진 만큼, 그에 따른 후속조치도 취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일세.”

반쯤 폐인이 되어 있는 아버지 생각에 서문길은 교주를 상대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작전의 책임자는 혼원패권입니다. 제가 그의 작전에 간섭할 이유가 없고, 또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서문길이 그렇게 나오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서문세가는 양양성에 파견되어 있는 전체 무림인들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고 알고 있네. 그런데 천지문 따위를 뒤로 돌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말인가?”

“저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면 혹 모를까, 저에게는 양양성의 지휘권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만…….”

서문길은 더 이상 묵향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때, 교주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치솟는 분노를 한껏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참인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는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장담하시더니, 이제는 이유 없는 협박이라니요. 뭔가 감추고 계시는 것이 있는 듯한데, 그걸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셔야 제가 돕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주는 처음에는 「어쭈? 제법인데?」 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문길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이어 그 표정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감히 이딴 것이 내 말에 토를 달아?」라고 말하는 듯 분노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매서운 표정에 찔끔한 서문길은 감히 눈을 마주보지도 못했다.

교주는 살기어린 어조로 외쳤다.

“더 이상 해 줄 말은 없다. 그 망할 놈의 금나라 오랑캐 새끼들보다 먼저 네놈이 저세상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해라.”

교주는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더 이상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참내, 이건 아버지보다 더 지랄 같은 사람이로구먼.”

서문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어떤 일이 교주같은 냉철한 인물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일까?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의했다. 일단 서문길로부터 방금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듣고 난 대장로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노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열쇠는 천지문이 쥐고 있는 듯 하군요.”

“천지문이라구요?”

“예.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교주가 여기에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주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천지문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천지문인지, 아니면 그 문도들 중의 일부만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기 와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천지문의 진팔이라는 청년과 교주가 매일 같이 비무를 해 줬다는 것 말입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을?”

“노신은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양쪽의 권위를 다 세워주면 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혼원패권에게 서신을 보내어 마교에서 제안한 작전은 이러이러하고, 또 그쪽에서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여 동참하기로 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런 다음 혼원패권에게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겁니다. 혼원패권도 그리 멍청한 인물은 아닌 만큼, 즉각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릴 겁니다.”

대장로의 말은 제법 타당성이 있었다. 아무리 혼원패권이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거대문파인 서문세가 가주의 청(請)-이 경우에는 요청을 빙자한 명령이나 다름없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서신을 작성하여 혼원패권에게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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