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만통음제는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했다. 흑풍대의 무사들이라면 회하를 건너는데 송의 전선(戰船)에라도 의지해야 도강을 할 수 있겠지만, 만통음제 같은 고수에게 그런 것은 전혀 불필요한 행위였다.
회하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만통음제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만통음제의 몸이 육지에서 달려가던 그 모습 그대로 강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등평도수의 경공술이었다.
물론, 경공술을 통해 매우 민첩하게 발을 움직이고, 또 일정 수준의 경신법(輕身法)을 사용하여 몸무게를 가볍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물 위를 달려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부 경공술에 뛰어난 고수들의 경우 10장(약 30m) 정도의 폭이 좁은 개천쯤은 그냥 통과할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건 폭이 좁을 때의 얘기다. 아무리 실력 있는 고수라도 수십 장이 넘는 폭넓은 강을 달려서 건넌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통음제는 자신이 화경의 고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넓은 회하를 단숨에 달려서 건너 버렸다. 만약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일대 사건이었지만 강 위를 달려가는 만통음제의 표정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만통음제는 회하를 건넌 후, 곧장 눈에 띄는 나무 꼭대기로 몸을 날렸다. 그는 나무 꼭대기에서 중심을 잡고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허어, 참. 이 근처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듣고 온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다 보니 팽선 일행을 찾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때, 저 먼 곳에 짙은 야행복을 입은 괴한이 은밀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머리까지 두건으로 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팽선 일행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수천 명이나 된다는 팽선 일행이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닐 이유가 없을 테니까.
“흐흐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먹잇감이 제발로 나타날 줄이야……. 저놈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만통음제의 신형은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기 위해 하강하듯, 녹의괴한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박덩어리처럼 둥그런 것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진팔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한겨울에 강을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요 근래 적진을 정찰하기 위해 밤마다 헤엄쳐서 건너다니느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오늘이 바로 행동을 개시하는 날이었으니까.
강기슭에 도착한 상태에서도 진팔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역시 저기 오는군.’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매일 밤, 이곳을 들락거린 결과 경비병들이 언제 순찰을 도는지는 이미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놈들은 반시진 단위로 순찰을 도니까 저들이 한 바퀴 돌고나면 그다음 경비병들이 올 때까지 반시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경비병들이 다가오자 진팔의 머리통은 슬그머니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경비병의 수는 4명이었는데, 앞에 선 하나만이 밝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그런지 그들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대충 형식적으로 훑어 본 다음 조금이라도 빨리 따뜻한 불가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경비병들이 멀어진 후, 물속에서 천천히 진팔의 머리가 떠올랐다. 진팔은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그들이 완전히 갔다고 판단된 다음에야 물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온몸에 지독한 냉기가 돌기 시작한다. 오히려 방금 전 살얼음이 맺혀있던 강물속이 더 따뜻했던 것 같을 정도다. 공력을 일주천시켜 냉기를 막아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팔은 손바닥을 세차게 비벼 조금이라도 온기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우선 손의 감각이라도 살아나야 무공을 펼치는데 수월할 테니 말이다.
‘이런 떠그랄. 오늘은 날씨가 지랄 같아서 그런지 더 추운……. 아니군. 초승달까지 완전히 가릴 정도로 구름이 잔뜩 끼었으니, 오히려 하늘이 돕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건 날씨는 좋은 것 같군.’
너무 추워서 그런지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려고 한다. 진팔은 사력을 다해 참아봤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아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크욱.”
진팔은 흘러내리는 콧물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소매로 훔치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동안 주위를 살펴보던 진팔은 행동으로 들어갔다. 작은 돌맹이를 들어 강의 중심을 향해 힘껏 던진 것이다. 저쪽에서 배를 타고 대기하고 있을 사저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파공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내력을 집어넣은 것도 아니었건만, 돌멩이는 곧바로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진팔은 곧바로 돌멩이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하나 더 던질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괜히 소리를 낼 이유는 없으니까.’
진팔이 돌멩이를 하나 더 던질까 말까 궁리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살그머니 물길을 가르는 소리가 찰그랑찰그랑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팔은 돌멩이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진팔은 아직까지 천지문의 행동이 적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그건 순전히 그의 착각이었다. 천지문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장인걸 일당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밤마다 조선소를 살피러 오는 진팔의 행동을 장인걸은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듯 즐겁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팔이 돌멩이를 던지는 것을 보고 장인걸의 입꼬리는 음흉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결실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크흐흣, 드디어 두더지들이 움직이는 것인가?”
장인걸은 옆에 서 있는 무사들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사들은 모두 장인걸과 똑같은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냉막한 표정뿐 아니라 4척이나 되는 장검(長劍)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까지 똑같았다. 그들의 몸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괴이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들은 진팔의 민감하기 그지없는 이목을 완전히 속일 수 있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이 산꼭대기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장인걸은 자신의 뒤에 늘어서 있는 4명의 무사들 중 한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왕걸(王傑) 대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편복대주의 말대로 화경급 고수가 나타날까?”
제6대장 왕걸이 여기 모여 있는 4명의 대장들 중에서 가장 선임이었기에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왕걸은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속하의 짐작이 무슨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장인걸은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네 말이 옳군. 한낱 짐작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장인걸은 슬쩍 시선을 돌려 편복대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쪽에는 쓸 만한 놈이 있다고 하던가?”
장인걸이 말하는 「그쪽」은 팽선 쪽으로 가 있는 제7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쪽에서는 아직까지도 화경급 고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하옵니다.”
“흐음, 역시 나타난다면 이곳인가?”
장인걸은 좀 더 안력(眼力)을 돋워 칠흑과도 같이 어두운 강물 위를 쏘아봤다. 과연, 수십 척에 달하는 배들이 살금살금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기대가 되는 도다. 과연 몇 놈이나 올 것인지……. 기왕이면 수라도제가 왔으면 좋겠군. 크흐흐흣.”
편복대주는 팽선이 이끄는 세력의 상륙 정보를 듣자마자 곧바로 이것이 놈들의 계책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잘하면 대어를 낚을 듯한 예감이 들었기에 그는 지체치 않고 장인걸에게 달려갔다.
“교주님, 이번에 대어(大魚)를 낚을 수 있을 듯하옵니다.”
대어라는 말에 장인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대어라고?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무림맹에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상당한 규모의 세력이 홍택호의 상류 쪽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보내왔사옵니다. 회하 강변을 둘러보고 있던 순찰병들이 그들을 발견했다 하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놈들이 노리는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지?”
편복대주는 품속에서 널찍한 지도를 꺼내어 장인걸이 잘 볼 수 있도록 펼쳤다. 그런 다음 그는 상륙 지점에서 적이 움직일 만한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들의 행동에 관해 구체적인 보고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에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유추해 본다면, 현재 저들이 상륙한 곳에서 움직일 만한 곳은 서주(徐州)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옵니다.”
서주는 화북평원의 운송의 중심이자 중요한 상업도시였기에 그곳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한다면 금 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장인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서주라고? 놈들이 그리로 움직여서 뭘 하겠다는 것일꼬?”
만약 장인걸이 진짜 군부의 장수라면 서주를 구하겠다고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인걸은 원래가 뼛속까지 무림인이었다. 지금은 일이 워낙 꼬이다 보니 팔자에도 없는 대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군인들의 움직임보다는 무림인의 행동양식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사파라면 혹 모르지만, 정파놈들은 결코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점을 말이다.
“그렇기에 속하가 군사적인 관점이라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만약 상륙한 대상이 송군이었다면 서주로 직행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수하들의 보고대로 이들이 송군이 아니라 무림인들이라면 서주를 공격할 이유가 없습지요.”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본좌도 이유를 모르겠구먼. 왜 저들이 저토록 드러나게 행동하는 것인지 말이야. 아무리 허접한 놈들이라도 순찰병 따위에게 발각될 정도라면, 그게 무공을 배운 놈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송군 놈들이 변복(變服)을 하고 진군하는 것은 아닐까?”
“속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즉시 편복대 제14대를 그곳으로 급파했사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수하들의 보고도 받지 않고 교주님께 달려온 것이옵니다.”
“그래 그것이 뭔가?”
“속하의 짐작으로는 이곳이 들통난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만…….”
편복대주가 가리킨 곳을 본 장인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회하를 건널 군선들을 건조하고 있는 조선소가 있는 곳.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장인걸은 노성을 터뜨렸다.
“본좌가 그토록 비밀을 유지하는데 만전을 기하라고 재삼 명했건만, 일을 어찌 처리했단 말이냐?”
편복대주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노화를 거두시옵소서, 교주님. 오히려 이것이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이옵니다.”
「기회」라는 말에 장인걸의 얼굴에 슬쩍 흥미가 떠올랐다.
“기회라니? 무엇이 말이냐?”
“저자들이 치려는 것이 조선소가 맞다면, 그곳에 상륙한 것도 무림인이 확실할 것이옵니다. 송군 떨거지라면 몇만 명이 상륙한다 해도 감히 조선소를 넘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림인이고, 또 조선소를 넘본다고 가정한다면 한 가지 문제점이 있사옵니다.”
“뭔가?”
“바로 거리이옵니다. 만약 저들이 직접 이곳을 칠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먼 곳에 상륙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목표 지점까지의 거리가 400리에 달하지 않사옵니까? 그자들의 전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단숨에 치고 들어올 만한 거리는 절대로 아니옵니다.”
장인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어딘가 계략이 숨어있다는 말이로구먼.”
편복대주는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예. 속하가 판단하기로는 그것들이 감히 교주님을 상대로 어설픈 성동격서의 계책을 쓰고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장인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편복대주가 펼쳐들고 있는 지도를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대응책도 마련했겠지?”
“예. 전갈을 받자마자 조선소 부근을 은밀히 수색하라고 수하들에게 일러두기는 했사오나, 보고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일대에 소수의 정예가 치고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속하는 아마도 그 기습조를 지휘하는 자가 최소한 화경급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사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만 조선소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옵니다.”
편복대주가 아뢰는 계책을 듣고 있는 장인걸의 안색에는 음흉스런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본좌의 생각도 그대와 같도다. 화경급의 고수라……. 크흐흣. 안 그래도 놈들에게 뛰어난 고수가 많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잘 되었구나. 이 기회에 몇 놈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