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과 진팔은 각기 구역을 맡아 문도들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다. 조금이라도 적들에게 밀리는 곳이 있으면 그들이 달려가서 도왔기에 처음 얼마 동안은 천지문이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 둘이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기는 해야겠지만,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소연은 큰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한 놈을 해치운 다음 재빨리 저 뒤쪽에 포진하고 있는 마인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소연과 진팔이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저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저 뒤쪽에서 따분한 얼굴로 서 있는 마인들. 그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듯한 그 엄청난 마기만으로도 그들이 엄청난 강자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 여덟 명이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만약 움직인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저들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빈틈이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길 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이곳에서 살아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훨씬 우세하다 보니, 그들은 한 번씩 큰 기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소연의 감각에 뭔가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흡!”
다급히 경악성을 내지르며 소연이 몸을 옆으로 트는 순간, 그녀가 위치하고 있던 곳으로 시뻘건 강기다발이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소연이 급히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장대한 핏빛 혈검을 든 흑의무사 한 명이 다가와 있었다.
“클클클, 내 일 검을 피하다니, 제법이야. 제법 감춰 놓고 있는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그래봐야 나를 좀 더 즐겁게 해 주는 정도겠지만.”
마인은 뱀이 핥듯 끔찍한 시선으로 소연의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는 음탕스러운 시선으로 소연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본 후, 음흉스럽게 중얼거렸다.
“훌륭하군. 극상품이야. 크흐흣.”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동료들을 돌아봤다.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움직임. 소연은 이 틈을 노려 공격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포기하고 방어자세를 갖췄다. 아무래도 뭔가 꺼림직한 생각이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마인은 다시금 시선을 소연에게로 가져간 후,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자, 관중들을 위해 눈요기감부터 선물해야겠지? 흐흐흣.”
마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하루아 장군이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놈들의 반항은 제법이었다. 아마도 이 상태대로 간다면 놈들을 전멸시키는데 최소한 한두 시진은 걸릴 것 같았기에 시간은 넉넉했던 것이다.
천마혈검대는 수십 년 전부터 중원 최강이었고, 마교 내에서 호법원을 제외한다면 가장 우수한 고수들만의 집합체였다. 거기에다가 장인걸의 마교 이탈 후 , 수십 년 동안 인원 충원 없이 계속 유지되어 왔기에, 개개인이 극마 직전에 이른 최강의 고수들만 모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단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그의 무공은 천마혈검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4척이나 되는 천마혈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소연을 압박해 들어왔다. 아무리 소연이 뛰어난 고수라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실전 경험이 적은데다가, 상대는 그녀보다 실력도 높을뿐더러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의 노장이었다. 그렇기에 둘 간의 대결이 시작되자 소연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소연에게는 한 가지 기회가 있었다. 적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소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놈의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소연의 옷이 조금씩 그 여파로 인해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토록 치욕스러운 일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었던 소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소연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줬다. 조금씩 조금씩 옷이 찢겨져 나가며 그녀의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고, 상대는 그걸 즐기고 있었다. 무수한 공방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작은 상처조차 없었다. 그것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사제. 기회는 단 한 번이야. 이놈을 없앤 후 곧바로 탈출한다.>
소연의 전음에 진팔은 약간 난처한 어조로 답해 왔다.
<그, 그렇다면 동문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쩔 수 없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전멸이야. 최소한 너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가야지.>
<사, 사저…, 그건……. 제가 남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될 말. 그건 내 몫이야. 1대 제자들에게 지시를 해라. 이놈을 쓰러뜨린 후 그때가 기회라고 말이야. 나는 남은 제자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놈들을 저지하겠다.>
소연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고, 진팔은 그녀를 막을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저 마두를 쓰러뜨렸을 때, 얻을 수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놈들이 동료를 잃은 충격에 잠시 우왕좌왕할 때, 그때가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사저와 자신이 말다툼하는 것으로 보낸다면 탈출은 불가능. 서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도 일부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지금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어느덧 진팔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사저께서는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시는군요. 좋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 내 사랑이여.’
<명을 따르겠습니다, 사저.>
진팔은 주위의 적병들과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 슬그머니 상대의 공세에 밀리는 척 하며 마인을 향해 조금씩 접근해 들어갔다.
<지금!>
소연의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은 마인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퍼부었다. 앞과 뒤에서 공격이 가해진 만큼, 마인이 아무리 그들보다 몇 등급 윗줄에 놓이는 고수라고 해도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움직임을 그는 해 보였다. 핏빛 장검이 마치 단검이나 되듯 기쾌하게 움직이며 그의 앞뒤로 두터운 보호막을 형성한 것이다. 붉은 천마혈검이 마인의 앞뒤를 빠른 속도로 휘돌며 움직였기에, 순간 그 사내의 전신이 붉은빛에 가둬진 듯 보였다.
카캉!
완벽해 보였던 소연과 진팔의 회심의 일격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튕겨낸 후 마인은 음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흐흣, 이런 난장판을 수없이 헤쳐 나온 노부가 저놈의 움직임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는 줄 생각했었느냐? 크흐흐흣. 정말 요즘 젊은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상대는 실력도 고강했지만, 실전 경험은 진팔과 소연의 것을 합해놓은 것보다 몇 배는 된다. 마교라는 철혈의 세계에서 이만한 위치에 올라선 강자인 만큼, 이런 한 수에 걸려 저세상에 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소연의 표정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크흐흣. 그래, 좋은 표정이야. 암,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하지만 관객들은 처음의 그 모습을 더 좋아하겠지.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계집에게서 더 이상 무슨 구경거리가 남아있겠나. 그렇다면 내가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 줘야겠는 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핏빛 검은 진팔을 노리고 뱀의 혓바닥처럼 민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마혈검은 그 길이가 4척이나 되는데다가 두께 또한 중검처럼은 아니었지만 보통 검보다는 조금 두꺼운 형태를 지닌 검이었다. 상당한 무게를 지녔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검은 너무나도 화려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성격은 개차반이었지만, 지닌 바 무공 하나 만큼은 엄청난 인물이었다.
검기와 검강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팔은 몇 번씩이나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만약 요 근래에 마교 교주에게 받은 특훈(?)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저세상에 갔을 것이다. 이때, 옆에서 소연이 끼어들어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인의 검은 그녀가 공격에 가세하는 것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려한 움직임을 그려냈다.
한동안 숨 돌릴 틈 없는 접전이 전개된 후, 마인은 마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할 여유가 필요하다는 듯 잠시 뒤로 물러서서 소연의 몸매를 감상했다. 그제서야 소연은 깨달았다. 이제 허벅지까지 드러난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놈이 얼마나 교묘하게 옷을 잘라냈는지 한쪽 유방까지 반쯤 드러나 있었다.
“사, 사저.”
진팔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웃옷을 벗으려는 찰나 마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멈춰! 누가 네놈의 볼품 없는 옷을 벗어주라고 했나?”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다시 한 번 마인에게로 뛰어들었다. 상대가 아무리 백전의 노장이라고 하지만, 계속 싸우다보면 언젠가는 빈틈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포기하면 결국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적들을 상대로 진팔과 소연이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팽선 패거리쪽의 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엄청난 병력이 사방에서 몰려들며 치열한 접전이 전개된 것이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울리고 있었고, 그 결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며 듣기에도 섬뜩한 비명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동원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병들이 사방에서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팽선 장로는 하북팽가의 고수들과 함께 몰려드는 금군들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팽가의 대부분의 고수들은 중도(重刀)를 이용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지만, 일부 권법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은 패도적인 권법을 이용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고, 팽선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압!”
퍼억!
푸르스름한 강기를 내포하여 강철만큼이나 단단하게 변한 팽선의 권이 병사의 갑옷을 관통하여 몸속 깊이 틀어박혔다. 팽선이 주먹을 뽑아내자, 그의 손은 진득한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팽선은 손에 묻은 피를 슬쩍 핥으며 살기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흣, 안 그래도 목이 말랐었는데 너무나도 달콤하구먼.”
그 흉칙한 모습을 보고 팽선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물론 이것은 적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다. 피를 먹는 것을 좋아할 리 없는 팽선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전황은 너무나도 안 좋았다.
‘5천의 금군 병사들을 물리친 후, 곧바로 후퇴했어야 했어.’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마도 놈들은 그 5천을 통해 이쪽이 지닌 전력을 저울질해 본 모양이다. 그런 다음 갑자기 수만이나 되는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해 왔다. 물론 병사들의 무공은 형편없었기에 자신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놈들은 두터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화살까지 여기저기서 날아오니 여간 상대하기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때, 팽선은 강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자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봤다. 겉으로는 금군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깊은 수준의 마공을 연성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금군 병사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저들까지 가세한다면 어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팽선은 힘껏 외쳤다.
“후퇴하라!”
하지만 아무도 팽선의 지시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방에 적병들 천지인데, 후퇴하는 것이 말만큼 쉬운 것이 아닌 것이다. 팽선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금군 병사 다섯을 해치운 후, 다른 문파의 수장들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들끼리라도 뭉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소연과 진팔, 그리고 마인의 대결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듯 보였지만, 이때 한 가지 변수가 등장했다. 토굴에 남아 있으라는 소연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왕노는 이번 기습 작전에 가담했다. 토굴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무섭다고 하면서, 불지르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으니 자신을 꼭 데려가 달라고 소연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소연은 차마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잠시의 여유 시간을 이용하여 불만 지르고 튀면 되는 임무였다. 위험도도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소연이었기에, 그녀는 마지못해 왕노의 청을 수락했었던 것이다.
지금 어딘가 구석에 숨어 벌벌 떨고 있어야 할 왕노가 바로 이 격전의 한복판을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가 천지문도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소연에게 본능적으로 의지하듯, 그렇게 그녀의 뒤에 숨으려는 듯 보였다.
찰나의 순간, 마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온 비수를 바라봤다.
“크윽!”
마인으로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일격이었다.
왕노의 비수는 마인의 심장을 꿰뚫자마자, 즉각 뒤로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원호를 그리며 마인의 가슴어림을 깊게 갈라놨다. 왕노의 비수에서 뿜어 나오는 싸늘한 검기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돌발적인 상황에 소연과 진팔은 너무나도 경악하여 왕노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도망쳤어야 하는데 말이다. 왕노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아가씨!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살수의 장기는 일격필살. 무공은 상대보다 훨씬 떨어지지만, 최대한의 기회를 노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무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런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마인에게 일격에 치명타를 가한 그는 살수의 정점에 선 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선택이 어긋났다.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탓이다. 마인은 피를 뿜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왕노의 예상과 달리 쓰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마인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가슴에 미세한 붉은 상흔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네놈도 실력을 숨긴 고수였다는 말이냐?”
왕노, 아니 흑월야사 전룡은 경악감을 감출 수 없었다. 중원 최강의 고수라던 묵향마저도 자신의 암습에 치명상을 당했었는데, 자신의 일격을 당하고도 멀쩡한 저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충 놀아줄 생각이었는데, 감히 노부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마인의 몸에서 풍기던 기운이 일변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몸에서는 살기가 넘쳤다.
“철저히 짓밟아 주마.”
괴멸(壞滅), 그리고 부녀 상봉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묵향. 그는 지금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빨리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소연이 있는 곳에 도착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양성에서 회남까지는 그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강이 몇 개씩이나 가로막고 있기에 단시간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가능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금 강이고 들판이고 가리지 않고 전광과도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병장기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아무리 묵향의 이목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토록 먼 거리에서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는 없다. 있다면 바로 내공의 고수들이 지금 격돌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묵향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직까지 소연이가 살아남아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조대삼 대장은 격전의 소용돌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은 대원들과 함께 수하 한 명이 연놈을 족치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순식간에 회하를 가로질러 오는 정체 모를 고수를 발견하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게 사람이냐? 어찌 사람이 저 넓은 회하를 단숨에 건널 수 있다는 말이냐?”
조대삼의 옆에 모여 있던 여섯 명의 수하들은 상관의 중얼거림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과연 어둠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낮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서로 간의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강물 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20여 척의 배들 가운데 다섯 척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물 위를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신법으로 달려오는 것도 모자라, 괴인은 강 위에 떠 있는 배들까지 공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본 조대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회하를 단숨에 건너는 것만 해도 도저히 믿기가 힘든 일인데,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서 그 상태에서 무공까지 사용할 수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청난 고수인 것 같습니다, 대장. 즉시 교주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서 있는 부하가 건의했지만, 조대삼은 전령을 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상대가 다가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미 전령을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니, 전령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탈출할 시간 여유조차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늦었다. 모두 각개 탈출하라!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즉시 이 사실을 교주님께 알려라.”
조대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일제히 일곱 방향으로 흩어져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들 중 몇은 저 괴물같은 고수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몇 명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가소로운 것들! 소연이를 건드리고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놈들의 퇴각을 눈치 챈 묵향이 재빨리 공격에 나섰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는 일곱 개의 작은 구슬처럼 생긴 것들이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구슬들은 엄청난 속도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은 상대가 괴이하게 생긴 암기를 발사했음을 알고 재빨리 회피기동을 했지만, 구슬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목표물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들은 도저히 이 암기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모두 다 극마의 경지에 거의 근접한 고수들이었기에, 그 반격은 너무나도 매서웠다. 천마혈검을 뽑아 휘두르자 수십 개의 강기들이 불을 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검술에 매진한 검귀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르게 빛나는 구슬은 핏빛 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허억!”
경악성을 지를 틈도 없이 그들은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강맹한 검초가 순간적으로 펼쳐졌고, 그들이 쥐고 있는 혈검은 불타오르듯 붉은 빛으로 이글거렸다. 순식간에 극성의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을 통해 어검술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검법과 구슬이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크허어억!”
조대삼 대장은 비틀비틀 물러섰다. 얼마나 엄청난 폭발이었는지, 마교가 자랑하는 명검인 천마혈검(天魔血劍)은 박살이 나 버렸고, 그의 오른손까지 흔적도 없이 핏덩어리로 화한 후였다. 제8대장은 치명적인 내상까지 입었는지 무너지듯 쓰러지며 내장부스러기까지 토해 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은 편이었다. 수하들은 모두 다 그 폭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 버린 상태였으니까. 웬만한 상처쯤은 대법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번에 받은 충격은 치유력을 한참 넘어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폭발 때문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투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 와중이었던 장인걸의 수하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고, 뒤로 물러서며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천지문도들은 폭발 따위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난 적들이 다시금 공격해 올 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지독한 격전을 벌였는지,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이때,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허억! 교, 교주!”
방금 전까지 천지문의 젊은 무사와 격돌하고 있었던 천마혈검대의 고수 한 명이 묵향을 알아보고 내지른 경악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쑤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여기 모여 있는 고수들의 거의 대부분은 여진족이었기에 한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때, 묵향 또한 경악성을 지른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은 그곳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진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천마혈검대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행색은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었다.
‘진팔이만 있다? 그렇다면 소연이는?’
재빨리 주위를 훑던 묵향의 시선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소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묵향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출혈이 심했는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소연의 얼굴을 말이다.
그 순간, 묵향은 소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천마혈검대원들 한 명의 입에서 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금군 병사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아마도 그것이 여진어로 된 명령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명령이 무엇인지는 곧이어 금군 병사들의 행동으로 드러났다. 금군 병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묵향을 향해 악귀처럼 달려들었던 것이다.
묵향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소연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서 얼핏 느끼기에는 그녀의 기감이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인 것을 보면, 소연의 상태는 대단히 위중하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소연과 자신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크합!”
순간, 묵향을 중심으로 다섯 곳에서 거대한 강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과거 묵향이 검을 이용하여 대지의 기와 자신의 기를 충돌시키던 최강의 검법. 바로 그것이 검 없이 다섯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물론 묵향이 보낸 다섯 줄기의 기가 대지의 기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쿠콰콰쾅!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금군 병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의 시체는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 속에서 조각조각 찢어져 분해되고 있었다.
이 단 한 수에 금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죽음을 불사하며 묵향을 향해 달려들던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짙은 공포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금군 병사들을 공격하게 만든 후 그 틈을 이용하여 도망치려고 했던 천마혈검대원은 너무나도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순간의 시간도 자신에게 벌어주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을 향해 일격을 날린 묵향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천마혈검대원을 향해 가해 왔다. 엄청난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예의 그 작고 시퍼런 강기의 구슬. 그 밝은 빛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접근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파악하고 반항조차 잊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쾅!
방금 전까지 진팔과 소연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 있던 그는 시체도 건지기 힘들 정도로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무리 상대가 탈마급의 고수라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