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괴물과의 조우(遭遇)
교주전용의 연공실. 그 입구에는 「闡魔洞(천마동)」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곳까지 패력검제를 안내해 준 황색수실의 무사는 천마동 앞을 경비하고 있던 무사들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두터운 강철문이 열린 후, 그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희들이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니, 그 다음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수고했네.”
황색수실의 무사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한 후, 패력검제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패력검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연공실이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연공실은 나타나지 않고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힌 동굴만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연공실은 총타의 가장 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곳까지의 통로가 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혈의 안쪽으로는 단 한 점의 빛조차 없어,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다. 아마도 교주 정도 되는 고수만이 사용하는 곳이라 무공 수준이 낮은 자들에 대한 일체의 배려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둠도 패력검제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었다.
한동안 동혈을 따라 내려가던 패력검제는 엄청난 마기를 느꼈다. 제법 실력 있는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마교의 지존이 연공을 하는 장소로 들어가는 통로가 아닌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연공 중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 외인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해 놨을 것이다.
어쩌면 동혈을 이렇게 어둡게 해놓은 것도 하나의 눈가림일 수도 있다. 이런 암흑 속에 기관진식을 설치해 놨다면 그 효과는 배가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동굴 저 안쪽에서 강렬한 마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요소요소에 고수들까지 배치해 놓은 모양이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침입자들은 연공실에 도착도 하기 전에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여기에 수석장로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침입한 것이었다면, 아무리 패력검제가 화경에 달하는 고수라고 할지라도 이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동혈 안쪽의 대비는 강력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던 음산하기 그지없는 강렬한 기운들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패력검제의 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드디어 연공실에 도착한 것이다. 철문을 두드리려던 패력검제의 머릿속에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 안에 시체라도 잔뜩 들어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세인들은 암흑마제가 지금의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천인공노할 악마적인 대법들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그가 잡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 또한 그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냉동시켜 운반한 다음, 치료하여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그런 해괴망칙한 소리는 이번에 처음 들어봤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의 악마적인 의술을 지닌 자라면, 못할 짓이 뭐가 있겠는가.
두근두근.
패력검제는 가슴이 뛰는 것을 참으며 철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뭐야. 이거 혹시 저 위에서 통과해 왔던 것처럼 이 문 뒤에 또 다른 동혈이 연결되어 있는 건가? 젠장! 그렇다면 좀 더 세게 두들겨야겠군.”
탕! 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동혈을 울리며 퍼져나갔지만, 그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로 문을 때려 부숴야 하나? 그러다가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 안에서 연공 중이라면 그 충격에 주화입마를 당할 것이 확실한데……. 아니, 그자가 의생이라면 연공 중일 리가 없잖아. 뭔가 시체라도 하나 놔두고 해부하고 있는 중이겠지. 제발 좀 들어라. 얼마나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기에 이 큰 소리를 못 듣는단 말이냐!”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계속해서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어떤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할 수 없다. 때려 부수라고 했으니 부숴야지. 아마 이럴 줄 알고 부수라는 말을 한 것이겠지.”
그는 손을 쓰기에 앞서 철문이 어느 정도 두께로 제작된 것인지 먼저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그 두께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고, 문을 파괴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내공만 쓸 생각이었다. 그래야 안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아마 3촌은 족히 되는 철판인 듯한데……. 이거 전력을 다해도 부서질지 장담을 못하겠군. 이런 난제가 마지막에 가로막고 있는 줄 알았다면 검을 가져오는 건데 그랬어.”
이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교주에게서 배운 대법. 그것은 극한의 빙공인 만큼, 대법을 이용하여 강철을 얼린 후 충격을 가하면 의외로 간단하게 철문이 파괴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 빙공이 얼마나 강철을 냉동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힘을 쓸 일이 발생했기에, 패력검제는 우선 등에 지고 있던 관부터 옆에 내려놨다.
“크헙!”
패력검제는 기마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철문에 장심을 붙이고 내력을 운용했다. 그에 따라 예의 그 현상. 즉, 그의 손이 투명하게 빛나며 그 속에 있는 혈관까지도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철문이 냉각되기 시작했다.
일단 준비 작업이 완료되자 패력검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수를 날릴 준비를 했다. 기마자세로 선 상태에서 기를 일주천시키며 강대한 힘을 끌어모은 패력검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권법에 더해서 교주에게 배운 대법까지 복합해서 운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교주가 가르쳐 준 그 대법은 놀랍게도 자신이 사용하는 무공에 전혀 거슬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따로 움직이며 더욱 강대한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얍!”
쿠쾅!
굉음이 울리며 그 커다란 쇠문이 터져 나가 버렸다. 아무리 철문이 냉각된 상태였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나도 엄청난 파괴력이었기에 그것을 시전한 패력검제 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헛! 이게 뭐 이렇게 쉬워. 이거 생각보다 문이 약했던 모양이군.”
만약 안되면 저 위쪽의 방금 지나왔던 경비무사에게 다가가서 무기를 빌려올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패력검제는 오히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패력검제의 권 자체가 지니는 파괴력도 파괴력이었지만, 마교가 자랑하는 소수마공의 강력한 파괴력이 그에 덧붙여졌기에 가능해진 결과였다.
그냥 작은 구멍만 뚫어 놓고, 속에 질러진 빗장을 벗기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좀 커진 듯했다. 기물 파괴로 인해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교주의 부탁대로 한 것인데. 일단 일은 벌어진 것이고, 이제 당사자를 만나 교주의 부탁으로 왔음을 알리는 일만 하면 끝날 것이다.
“계십니까? 방금 전 소란을 일으켜 죄송…, 이… 이게 뭐야? 그… 금?”
패력검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공실에는 교주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태산처럼 쌓여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 덩어리. 그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황금을 본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연공실이 아니고 마교의 보물창고였다는 말인가?
패력검제는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에 손을 뻗어 황금 덩어리를 만져봤다. 차갑기 그지없는 금속성의 감촉. 정확한 것을 알아보려면 이 일부를 전장(錢場=은행)에 가져가야 알 수 있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틀림없는 황금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연공실은 딴 곳에 있는데 내가 갈림길을 놓쳤나?’
“허어, 큰일이군. 보물창고 문짝을 날려놨으니 이 일을 어쩐다?”
패력검제가 한탄하고 있을 때, 문득 그가 만지고 있던 황금 덩어리가 위로 슬쩍 움직였다.
“허억! 이, 이건 또 뭐야?”
황금 덩어리가 위로 올라가고, 그곳에는 거대하면서도 투명한 보석 덩어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는 거의 반 장이나 될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점점 더 현실성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패력검제였다. 이때,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울리는 거대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뭐냐?>
“예…, 예?”
<네놈은 뭐냐고 물었다. 왜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지?>
패력검제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하지만 그가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이 부근에 그 어떤 사람도 없음을 자신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또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혹시 어디에 기관장치라도 되어있는 건가?
이때, 패력검제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보석 덩어리를 덮고 있던 금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봤던 것이다. 꼭 사람이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어? 그러고 보니 저 보석 덩어리도 꼭 눈(目)처럼 생겼군. 거참 희한하게 만들어놨네. 그런데 왜 이딴 걸 만들어 놨지?’
패력검제가 딴생각을 하느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신경질적인 어조가 들려왔다.
<빨리 대답을 해라.>
그와 동시에 황금 덩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긍!
거대한 황금 동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공실은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식으로 기관장치를 만들어놨는지 모르지만, 그 움직임이 정말이지 패력검제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때, 패력검제의 앞쪽에 놓여 있던 거대한 황금 덩어리의 일부가 서서히 위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의 정면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패력검제의 눈에 황금 덩어리의 전체적인 모습이 잡혔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황금색 괴물의 무시무시한 얼굴 형상이었다. 물론 전설에 들려오는 용이나 이무기의 모습과 흡사한 구석도 있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괴물의 생김새는 그가 들었던 그 어떤 전설적인 신수(神獸)들의 모습과도 달랐다. 이제 틀림없었다. 이놈의 금빛 나는 거대한 덩어리가 황금 덩어리가 아닌 괴물일지도!
“크어억! 이, 이럴 수가!”
패력검제는 너무나도 놀라 혼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대답을 하기 싫다 이거지?>
앞발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괴물의 일부가 엄청난 속도로 위로 움직였다. 하지만 워낙 동혈이 좁아서 그런지 그것은 굉음을 내며 천장에 부딪치고 말았다. 천장의 일부가 부서지며 돌조각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서야 패력검제는 정신을 차렸다. 패력검제는 떠오르는 대로 정신없이 외쳤다.
“다크가 아빠에게!”
패력검제를 깔아뭉갤 듯 덮쳐오던 괴물의 앞발은 그의 바로 코앞에서 멈칫 멈췄다. 교주가 그때 말해 줬던 「암호」가 통했던 것이다. 그것을 확신한 그는 그 다음 구절도 모두 다 정신없이 외쳤다. 처음 들었을 때 낯 간지러운 암호라며 경멸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를 사, 사랑한다고도 했습니다.”
순간 패력검제의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괴물의 입매 부분이 뭔가 슬쩍 말려 올라가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황금색 괴물의 거대한 앞발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젠장! 그래, 말해 봐라.>
그는 관을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저기에 있는 사람을 치료해 달라고 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는데, 아버지라면 고칠 수 있을 거라며…….”
<이런 젠장! 됐다. 이놈은 애비가 자기 전속 의생이라도 되는 줄 아나?>
‘애비라고? 이런 젠장. 그렇다면 교주도 저런 괴물이라는 말인가? 하기야 교주의 그 강함은 분명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니……. 그럴 수도 있겠군. 저런 괴물이 둔갑했음에 틀림없음이야.’
이런 패력검제와 아르티어스의 어긋난 만남은 미처 묵향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아르티어스가 연공을 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그 속에서 드래곤인 상태로 낮잠이나 퍼자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묵향이 그 「암호」를 알려준 것은 혹시 문을 때려 부쉈을 때 가해질 치명적인 보복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지, 이런 상황에서 그의 목숨을 살리라는 뜻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황금빛 괴물은 투덜거리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황금색의 휘황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기에 패력검제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초로의 늙은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황금 동산은 자취를 감춰 버린 후였다.
만약 그 황금 덩어리의 양이 조금 작았다면, 이 영감탱이가 기관을 이용하여 자신을 농락한 것이라고 단정지었을 패력검제였다. 사실 그런 괴물의 존재를 믿기에는 패력검제의 나이가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기관에 의해 순식간에 없애기에는 황금 동산의 양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 황금 동산처럼 생긴 괴물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쳤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이 초로의 노인이 방금 전의 그 엄청난 덩치의 괴물이 둔갑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예? 그냥 교주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왔습니다만…….”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요 근래에 ‘마스터급’이 너무 흔하게 보인단 말씀이야. 동생이라는 놈에 이어서, 수하. 그리고 이번에는 심부름꾼까지 마스터라니.”
혼자서 툴툴거리던 노인은 패력검제를 향해 명령했다.
“가져와 봐.”
“옛.”
패력검제는 저 노인으로 둔갑한 괴물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급」이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몰라도 괴물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관을 가져와서 노인 앞에 놓은 다음, 관 속에 들어 있는 소연을 볼 수 있도록 관 뚜껑까지 열어주는 친절까지 아끼지 않았다.
관 속을 들여다본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죽거렸다.
“흐음. 기가 막히구먼. 죽기 직전에 꽁꽁 얼려놨어. 지독한 놈 같으니라구. 그렇게까지 애비를 부려먹고 싶나? 그냥 죽게 놔두면 그만인데 말이야.”
이때, 패력검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초로의 노인이 손을 뻗어 소연의 가슴언저리에 가져갔을 때, 그의 손에서 눈을 뜨고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패력검제가 그 빛이 너무나도 따뜻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에 흉측하게 입을 벌이고 있던 소연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손에서 빛이 나오는 것도 믿기 힘든데, 그 빛을 쬔 상처까지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패력검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지니고 있던 모든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별것이 아닌 듯도 했다. 그런 엄청난 괴물도 살고 있는데, 그 괴물이 사람으로 둔갑하여 요망한 술법을 좀 부린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겠는가.
이윽고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소연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의 눈이 살짝 떠졌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빠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빠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이 아빠라는 것을 인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디라는 말인가? 아빠와 만났던 것이 꿈인가? 아니면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인가?
“아, 아빠는 어디에 계시죠?”
그 말에 초로의 노인이 싸늘한 어조로 대꾸해 왔다.
“네년의 아빠를 여기서 찾으면 어찌 하냐?”
“…….”
소연은 노인의 싸늘한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위를 주의깊게 둘러봤다. 다행히 노인의 옆에 눈에 익은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게 보였기에 그녀는 저으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소연의 의식이 돌아오자 패력검제는 그녀 쪽으로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으며 말했다.
“의식이 돌아왔으면 빨리 옷부터 입거라. 관 속에 있을게다.”
소연이 다급히 옷을 입고 있을 때, 노인은 패력검제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치료 끝났으니 데리고 가. 더 이상 열 받게 하지 말고.”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외쳤다.
“참! 저 아이는 내 아들과 어떤 관계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에 치료한 아들놈의 사제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놈에게서 느껴지던 기운하고 저 아이의 기운이 묘하게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는 말씀이야.”
“아, 그러고 보니 교주는 소연이 자신의 딸이니까 잘 치료해 달라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숨겨둔 딸인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여태껏 교주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은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참, 그러고 보니 어, 어르신께는 손녀가 되겠군요.”
패력검제가 손녀라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소연은 눈앞에 서 있는 촌로가 자신의 할아버지뻘이 됨을 알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연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미흡하시겠지만 예쁘게 봐주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하, 할아버지? 흐음, 뭔가 기분이 묘하구먼.”
사실 드래곤들의 관계에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냐하면 분가하면 그걸로 더 이상 아버지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으니까. 만날 도망치고, 또 붙잡혀 두들겨 터지는 가운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아르티어스와 아르티엔의 관계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다.
물론 소연이 손녀라고 해서 별로 바뀔 것은 없었다. 과거 아르티엔이 다크를 진정한 손자로서 취급해 주지 않았듯, 아르티어스 또한 소연을 자신의 손녀로 살뜰하게 대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유희를 즐기던 도중에 덤으로 따라온 존재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연을 막 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르티엔이 그렇게 했듯, 유희로서 소연을 자신의 손녀로서 대해줄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내 손녀라면 좀 더 제대로 치료해 두는 것이 좋겠군. 이리 와 보거라.”
하지만 소연은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다 나은 것 같은 걸요. 더 이상 아픈 데도 없는 것 같구요.”
“그래? 거참 이상하군. 여기저기 결리는 데가 있을 텐데….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안 그래도 귀찮은 김에 잘됐다고 생각하던 아르티어스의 머리에 번쩍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저것이 내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해놓고, 아들놈 앞에서 여기저기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하면 자기만 곤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다짜고짜 소연에게 다가가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더 빛을 뿌리는 순간, 소연의 몸속 깊은 곳에 잔재되어 있던 모든 내상까지 완전히 치료되었다. 아르티어스의 행동에 소연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치료마법이라는 것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해 본 그녀였으니까.
“정말 놀라워요. 어떻게 하면 손바닥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을 내실 수가 있는 거죠?”
자신의 몸 상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치료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발현되는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은 소연이었다.
치료를 끝낸 후 노인은 패력검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잘 치료해 줬어. 성심성의껏 해 줬으니 이 애비의 은혜를 결코 잊으면 안 된다고 아들놈에게 전하도록. 알겠냐?”
“옛. 확실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 봐.”
패력검제는 아르티어스의 가 보라는 명령에 나가려고 했지만, 소연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망설이는 듯 보였다. 이곳에 남아서 얘기를 좀 나누자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나가라는 것인지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덧붙였다.
“손녀도 함께 데려가게.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좀 많거든.”
그 어조를 부드럽게 한 것은 그래도 유희의 규칙상 제대로 된 할아버지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인사한 후 패력검제가 나가려고 할 때, 아르티어스는 지금껏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것이 이때 갑자기 생각났는가 하면,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문쪽으로 가자, 그들의 뒷모습을 살펴보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박살 나 버린 문짝까지 보였던 것이다.
패력검제의 등 뒤에서 으시시한 음성이 들려왔다.
“참, 자네 잊고 가는 게 있군. 다시 이리 와. 그리고 너는 먼저 나가서 좀 기다리거라. 어쩌면 얘기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예?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소연은 인사를 하고 떠났고, 아르티어스의 성질머리를 모르고 있었던 패력검제는 아르티어스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자신을 왜 부르는지도 모르고. 만약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결단코 그곳에 홀로 남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