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진 후, 수석장로는 다시금 자신의 집무실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을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문짝을 때려 부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들어갔던 패력검제가 살아서 나왔다는 것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에게 무지막지하게 깨지기는 했지만, 뒤처리(?)를 비교적 깨끗하게 해 놓은 상태였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수석장로가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패력검제 옆에 앉아 있는 제법 무공이 높아 보이는 여고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패력검제와 함께 천마동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면, 처음에 그가 가지고 들어갔던 관 속에 저 여인이 들어있었음을 간단하게 추리할 수 있었다. 수석장로가 봤을 때도 완전히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교주의 사제를 교주의 아버지는 순식간에 고쳐놓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관 속에 들어있는 시체마저도 살려냈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 수석장로였다.
이때 서로 간에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패력검제였다. 그는 여기저기가 결리는 모양인지 몸 곳곳을 주물러대며 입을 열었다.
“여기 조용히 운기조식할 만한 곳이 있으면 안내해 줄 수 있겠소?”
“아, 교주님의 부탁을 받고 먼 길을 오셨을 텐데, 내가 너무 무심했었던 듯하구려. 수하들에게 편히 지내실 만한 거처를 마련하라고 이르겠소이다. 한 며칠 푹 쉬면서 노독(路毒)이나 푸시지요.”
“편의를 봐주셔서 고맙소이다.”
수석장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왕지륜!”
“옛, 찾으셨습니까? 수석장로님.”
“손님들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해 드리거라.”
“옛.”
왕지륜은 패력검제와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왕지륜과 함께 손님들이 나간 후, 수석장로는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에게 숙소를 안내해 준 것은 그로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젠장. 그렇다면 교주께서는 그놈을 죽이려고 그 안에 집어넣으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잖아.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처리를 결정할 사항이 아닌 듯 해. 군사와 상의해 봐야겠군.’
“어서오십시오. 수석장로님.”
군사가 건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수석장로는 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패력검제가 본교를 방문했다는 얘기 들었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수석장로님께서 별일 아니라고 연락하셨지 않았습니까?”
수석장로는 그가 천마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군사에게 별일 아니니 신경 끄라고 연락을 보냈었던 것이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조금 일이 틀어졌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사의 의문에 수석장로는 그간 경과된 일련의 사정들을 밝혔다.
“수틀린다고 철영 부교주님을 묵사발내신 분이 아니신가. 그런 분께서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그를 그냥 보내 주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군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본 뒤 반론을 제기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 부순 것이 아닐까요?”
“노부도 혹 그런게 아닌가 하여 호법원에 물어봤네. 그런데, 그곳에 경비를 서던 자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굉음을 들었다고 증언했다네.”
“그렇다면 진짜로 부순 모양이군요.”
“확실하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자가 그곳에서 살아서 나왔기에 문제라는 걸세. 정파의 최고수들 중 한 명이 본교의 사정을 훑듯이 다 관찰해 버렸는데 가만히 살려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이점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오며 본교의 내부를 관찰했다고 해 봐야 얼마나 봤겠습니까? 패력검제는 교주님의 신물을 지니고 본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런 만큼 혹시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희들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뒤처리는 교주에게 맡기자는 의견이었다. 유약한 군사의 성격처럼 조금은 복지부동적인 의견이었기에 탐탁치 않게 느껴졌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교주가 신물까지 줘가며 일을 맡긴 자인데, 이쪽에서 어떻게 처리해 놨다가 나중에 교주에게 크게 꾸지람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옳은 듯도 하구먼.”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 사실을 부교주님께 보고해 두는 것이 좋겠지요. 아무리 부교주님께서 본교의 일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하지만, 그래도 교주님께서는 부교주님께 대리를 맡기셨으니 말입니다.”
“그게 가장 좋겠군.”
“수석장로님. 패력검제 같은 인물이 본교를 방문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수석장로님께서는 패력검제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금 놓치고 계신 듯합니다.”
군사의 말에 수석장로는 아차 싶었다. 군사는 마음이 좀 심약한 것이 문제였지, 그 능력만큼은 아주 쓸 만한 인물이라고 수석장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놓쳤다고? 그게 뭔가.”
“예. 패력검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관을 하나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마동에서 나올 때는 웬 여자와 함께 나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여자를 놓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수석장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 점을 인정했다.
“그러고 보니 천마동에서 나왔을 때, 웬 여자를 함께 대동하고 있었지. 노부가 보기에 제법 쓸 만한 실력을 닦은 고수처럼 보이더군. 그런데 그 여자가 왜?”
“그 여자가 관 속에 들어 있다가 나온 것을 보면, 이미 죽었었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의 상태에 본교에 들어왔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관 속에 넣어서 가져왔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 그렇겠지.”
“그는 이곳에 오면서 교주님의 신물을 가져왔고, 또 어르신께 그녀를 치료받게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수석장로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군사는 말을 이었다.
“어르신이 그녀를 순순히 치료해 줬고, 또 문짝을 부순 것까지 용납하신 것을 보면 그녀는 패력검제가 아닌 교주님과 상당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어르신께 치료를 받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주님께서는 웬만한 경우에는 절대로 어르신께 치료를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야 수석장로는 군사가 왜 그녀를 언급했는지 이해했다. 수석장로는 경악성을 내지르며 외쳤다.
“허억! 자네 말이 옳구먼.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저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교주님께 매우 소중한 여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자네는 빨리 호법원에 달려가 그녀를 경호하라고 요청하게. 그리고 더불어서 패력검제의 감시도 병행해야겠지. 그자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기서 무슨 못된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예. 수석장로님. 호계악 대호법님께 제가 직접 가서 부탁하겠습니다. 교주님의 정인(情人)이실지도 모르는데,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장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나는 이 일을 부교주님께 아뢰겠네. 그분도 정파에서 성장하신 분이시니, 패력검제를 만나 그녀가 누군지 좀 알아보라고 부탁드려야겠군.”
“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석장로의 보고를 받은 초류빈은 어이가 없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을 만난지가 언제인데, 이번에는 제령문의 문주가 본교를 방문했다니. 그것도 교주의 청으로 그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교주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떤 술수를 부렸기에 패력검제가 그런 수고를 한 것이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초류빈이 알기에도 교주는 당금 무림에서 그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다. 게다가 그는 중원 최강의 문파라고 할 수 있는 마교의 교주가 아닌가. 그가 말로는 중원일통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만, 언제나 그런 위험은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던 초류빈이었다.
물론 교주가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 야욕(野慾)을 부린다고 해 봐야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초류빈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고, 또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림일통(武林一統)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무림의 역사가 말해 주지 않는가. 무림일통에 도전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림사상 최강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고수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지금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번만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초류빈이었다. 어쩌면 교주는 지금 무림일통 작업을 소리 소문 없이 진행 중인지도 몰랐다.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속적으로 외부의 고수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교주가 의형으로 삼았다고 들은 만통음제를 비롯하여, 사제라는 현천검제.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패력검제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결국 교주는 역사상 최초로 무림일통을 이룩한 위대한 고수로서 역사에 우뚝 설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이것이 피를 통한 정복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다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일통은 일통이니까.
“젠장. 입으로는 아니라고 그렇게 떠들면서, 뒷꽁무니로 그런 얄팍한 짓거리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어쩔 수 없지. 교주의 그 시커먼 속을 알고 있는 내가 나서야겠어. 패력검제가 완전히 교주에게 넘어간 것은 아닐 테니까, 아직은 가능성이 있겠지.”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다시 한 번 하늘을 봤다. 수석장로의 말로는 패력검제가 휴식도 취할 겸 운공조식을 할 조용한 장소를 원했기에 그를 귀빈들이 기거하는 숙소로 안내했다고 했다.
“지금쯤 찾아가면 되려나? 아니야. 그것보다는 내일 일찍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사람이 들어 있는 관을 등에 지고 만 리 길을 달려왔다고 했으니, 지금 찾아가 봐야 헛것이겠지.”
초류빈은 다음날 아침 일찍 패력검제와 의문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물론 그가 패력검제를 만나려는 이유는 수석장로의 요청대로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주의 야심찬 무림일통 계획에 훼방을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내실에서 붉은 옷으로 곱게 차려입은 예쁘장한 소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제법 물이 오른 몸매로 봐서 16세는 넘은 듯 보였지만, 그녀의 앳된 얼굴로 봤을 때 절대 20살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녀였다. 초류빈은 이곳에 처음 와 보는지라 그녀가 여기에 배치되어 있는 하녀인지, 아니면 이곳에 투숙 중인 손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배치된 시녀인가?”
갑자기 낮선 인물이 급히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초류빈을 자세히 살펴봤다.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것을 보면, 무사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이곳 마교에서 웬만큼 무공을 익힌 자라면 음산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지 않던가. 그런데, 이 청년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옷조차도 남루한데다, 무척 젊은 얼굴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
그녀는 재빨리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고 빨리 나를 따라와요.”
“……?”
행여 누가 볼세라 재빨리 초류빈을 끌고 나온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초류빈을 향해.
“이제 됐어요. 이봐요. 새로 온 일꾼인 모양인데 이렇게 마구 돌아다니다가 걸리면 경을 친다구요. 이곳은 본교를 방문하는 특급손님들을 위한 숙소에요. 저기 커다랗게 마영각(魔迎閣)이라고 써져 있잖아요. 그것도 안 읽었어요? 아니면 글자도 못 읽는 거예요?”
초류빈은 얼떨결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현판을 다시 한 번 봤다.
“빨리 가 봐요. 그나마 나한테 발견된 게 다행인줄 알라구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꾼들의 숙소는 저쪽이에요.”
하녀는 심각하게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는 초류빈의 표정은 이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도와준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초류빈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 귀엽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쪽 길을 가리키며 연이어 조잘댔다.
“다음부터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알았죠? 아무리 길을 잃었다고 해도 이쪽으로 오면 절대로 안돼요. 운이 없어서 각주님한테라도 들켰었다면 길을 잃었다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었을 거예요. 곧바로 뇌옥에 갇혀 고문까지 당한다구요.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맙구려, 소저. 나는 마영각이라는 곳이 그토록 흉험한 곳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설마 들어오는 사람을 모두 다 불문곡직하고 물고를 내다니. 정말이지 지옥과 같은 곳이외다.”
자기는 생각해서 말해 준 것이었는데, 상대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응대하자 하녀는 바짝 약이 오른 모양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말투까지 노인처럼 하는 것이, 꼭 자신을 어린애라고 놀리는 듯했던 것이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예요? 무조건 물고를 낸다는 말이 아니었잖아요. 수상한 사람 말이에요. 수상한!”
“그렇다면 나는 괜찮겠구려. 나는 누가 봐도 신분이 확실한 사람인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 무슨 신분이 확실하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바로 저쪽 근처라구요. 만약 그곳을 벗어난 것을 들키면 곤장 몇 대 맞는…….”
이때, 갑자기 싸늘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초류빈 또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류빈의 앞에 서 있는 소녀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냉엄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어, 언니.”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새로 나타난 여인은 각주는 아니고, 조금 계급이 높은 하녀인 듯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언니라는 하녀의 질책에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 이 사람이 길을 잃어서 가르쳐 준다고 그만…….”
“너는 그만 들어가 보거라.”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언니라는 하녀는 더욱 냉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아니, 들어가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네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겠다. 그동안 너는 네 방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거라. 알겠느냐?”
“네.”
소녀가 눈물을 훔치며 마영각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초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같은 하급고수가 지고하신 부교주의 얼굴을 알리 없었지만, 그녀는 여유만만한 상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벌벌 떨고 있어야 옳은데, 그는 싱긋이 미소지으며 아직까지도 소녀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녀는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자신이 혈화궁에서 약간 지위가 높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총타였다. 그녀보다 월등하게 높은 지위를 지닌 인물들이 널리고 널린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내가 보여주는 것 같은 여유는 그런 지위가 높은 인물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조심스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우선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물고를 내는 것은 그 후라도 늦지 않았다.
“길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디를 가는 중이신지요?”
“마영각에 가는 길이었네. 어제 본교를 방문한 남녀가 있을 텐데, 알고 있는가?”
상대의 점잖은 대답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상대는 허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교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이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녀는 고개를 조금 더 깊게 조아리며 말했다.
“예. 손님들께 어느 분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전할 필요까지는 없네.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하게.”
“…….”
이대로 이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안내해도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안내할 것인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는 안내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어쩐 일인지 호법원에서 파견된 엄청나게 막강한 고수들에 의해 호위되고 있었다. 뒷일은 호법원의 고수들이 해결해 줄 것이 분명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녀는 초류빈을 안내하며 말했다.
“손님들은 지금 안전상의 이유로 2층에서 묵고 계십니다.”
마영각 안으로 들어선 후, 그녀는 상대를 계단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녀가 그를 손님들이 묵고 있는 객실로 안내했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객실의 문 앞에 서 있던 호법원 소속 고수들의 행동을 통해서. 객실 문 앞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며 서 있던 호법원 고수들은 사내를 보자마자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뵈옵니다.”
하녀는 경악했다. 그녀는 초류빈의 행색으로 봤을 때 누군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가 부교주일 줄이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법원 고수들처럼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부교주님을 뵈옵니다」하고 외치고 있었다.
“손님들은 일어나셨느냐?”
“예.”
하녀는 원래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차를 달라고 했다는 말을 해야 했음에도 그녀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른 말을 건네 버렸다. 잘못하면 그 소녀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날아갈 우려가 있기에.
“몰라 뵙고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나이다, 부교주님. 혹, 진진이가 부교주님께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진진이라고 하느냐?”
“예. 왕진진(王珍珍)이라고 하옵니다.”
“본좌에게 실례를 저지른 것은 없었으니 안심하거라. 그리고 그 아이에게 본좌의 신분에 대해 말하여 괜한 걱정을 안기지 않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예.”
“그럼 가 보거라.”
그렇게 말하는 부교주의 안색이 매우 평온했기에 하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 목숨은 건진 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