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5화 (521/930)

* * *

그날 패력검제 일행은 작은 마을의 하나뿐인 객점에서 식사를 하고 가려고 들어갔다. 짙은 마기를 풍기는 여문기 일행이 패력검제의 뒤를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자 객점 안은 언제나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그들의 짙은 마기를 대했을 때, 뭔가 모를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낄 것은 당연했다. 손님들은 슬금슬금 도망치듯 객잔을 떠나 버렸다.

패력검제는 요근래 들어 늘상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때, 패력검제는 아직도 도망가지 않고 웬 사람이 객점의 구석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상에 차려진 몇 가지 요리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죽립(竹笠)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상대의 용모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만약 일반인이라면 여문기 등이 내뿜고 있는 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쳤을 테니까.

그런데, 특이한 것은 패력검제가 유심히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서 그 어떤 기척도 감지해 낼 수 없다는데 있었다. 설사 저자가 화경에 든 고수라 할지라도 미세한 기척은 감지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어간 현경의 고수쯤 된다는 것일까?

호기심을 느낀 패력검제는 쓱 일어서서 상대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괜찮겠소이까?”

“그러시구려.”

“나는 서진이라고 하오. 보아하니 형장께서도 무림에 적을 두고 계신 듯한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상대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넉살 좋게 나오는 패력검제를 관찰했다. 순간 패력검제의 눈과 죽립에 감춰져 있던 상대의 눈이 마주쳤다.

“화경의 고수?”

상대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찌 마교의 무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댁도 초류빈처럼 마교의 부교주요?”

“나는 마교도는 아니오. 그런데 탈명도(脫命刀) 대협이 마교에 있음은 어찌 알고 계시오? 그것은 나도 요 근래에나 알게 된 것인데.”

“마교도가 아니라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먼.”

혼자 중얼거리던 상대는 마교도들을 쭉 훑어보더니 그들 중 하나를 알고 있는지 아는 척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호법이 아닌가?”

그제서야 여문기도 상대를 알아본 모양이다.

“이 목소리는…, 서, 설마 어르신이셨습니까?”

여문기와 현천검제는 이미 면식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천검제가 불구자였을 때, 그의 호위를 호법원에서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날세. 이렇게 교외에서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먼.”

“몸이 쾌차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호법께서는 어르신께서 양양성으로 떠나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어르신을 만나 뵙게 될 줄은…….”

여문기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여문기는 상대의 정체가 현천검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 그가 양양성을 향해 간답시고 떠난게 언젠데 아직까지 이 정도밖에 못 갔을 거라고 여문기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현천검제는 양양성에 가기 싫어서 미적거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건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참, 소개해 드릴 분이 계십니다.”

여문기는 소연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께서는 교주님의 따님 되십니다.”

그리고 소연에게는 죽립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어르신께서는 교주님의 한 분뿐인 사제십니다.”

“소연이 사숙어르신을 뵙습니다.”

“허허, 그래 반갑구나. 사형께 이런 질녀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먼.”

일단 청산유수로 대답을 해 놓았지만 현천검제는 곤혹스러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한눈에 척 봐도 질녀는 마인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극마에 올랐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왜냐하면 그 정도 되는 실력자들이 이토록 고강한 호위무사들을 줄줄이 달고 이동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질녀는 이 앞에 앉아있는 화경급 고수의 제자쯤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게 어찌되는 일이지? 마교의 교주가 왜 이렇게 정파쪽 인물들과 연줄을 많이 만들어 놨단 말인가?’

그리고 서로 간의 오가는 대화를 옆에서 들은 패력검제 또한 혼란에 빠져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처음에는 정파의 인물인 줄 알고 접근한 것이었는데, 교주의 사제라고? 그렇다면 상대의 정체는 극마의 고수라는 말이 아닌가. 극마급 고수가 되면 마기를 숨길 수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토록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줄은 예상도 해 보지 않았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이자도 교주처럼 탈마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서로 간에 뭔가 물어보고 싶기는 한데, 어찌 말을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난감하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현천검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형장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양양성에 가는 길이었소이다. 방금 전에 들으니 형장께서도 양양성에 가시는 모양인데, 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가시며 서로 말벗이나 하면 좋지 않겠소이까?”

이들이 매우 급하게 양양성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없는 현천검제는 재빨리 그것에 찬성했다. 안 그래도 상대의 정체 등등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서로 말벗이나 하며 길을 가자니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리다.”

일단 교주의 사제에게서 동행 허락을 받아내자, 패력검제는 재빨리 여문기에게 말했다.

“여 대협.”

“예. 무슨 일이십니까? 대협.”

“교주의 사제께서 동행을 허락하신 만큼 당신들은 교에 돌아가도 되지 않겠소?”

“하, 하지만 그건…….”

“소연이를 보호하겠다는 여 대협의 뜻은 잘 알겠지만, 이곳에는 내가 있고, 또 교주의 사제분도 계시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소? 아니면, 나나 이분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 그렇다면 아가씨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여문기는 더 이상 반론할 여지가 없자, 소연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연이라고 그들의 동행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객잔이나 객점에 들면서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켜온 장본인들이 바로 이 호법원 고수들이었다. 워낙 지독한 마기를 풍겨대다 보니, 주위에 사람이 접근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이곳은 아직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고, 또 마교의 세력권에 가까웠기에 그들의 존재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중원 깊숙이 들어가면 그것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소연은 다급히 패력검제의 뜻에 동조하고 나섰다.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그러십니까?”

여문기는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속하들은 물러가겠습니다. 평안하게 양양성에 도착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우호법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요.”

“패력검제 대협.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동행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평안한 귀로(歸路)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여 대협께서도 수고하셨소. 안녕히 가시오.”

모두들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현천검제만은 「패력검제」라는 말에 눈이 둥그래져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화경급 고수임은 짐작했지만, 설마 그가 패력검제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줄기차게 강행군을 한 후, 소연이 피로에 지쳐 잠자리에 들어가자 패력검제는 현천검제의 방을 찾아갔다. 마침 현천검제도 패력검제의 방에 찾아갈까 말까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둘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낮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패력검제 대협께서는 질녀의 사부가 되시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아이에게는 따로 천지문이라는 사문이 있소이다.”

처음부터 헛짚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현천검제는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정파의 명숙인 귀하께서 마교들과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도저히 나로서는 이유를 모르겠구려.”

“그건 나도 마찬가지외다. 교주의 사제라면서 소연을 오늘 처음 만난 듯하고, 그리고 도저히 무공수위는 짐작조차 안 되고……. 도대체 마공을 익히기나 한 것이오? 교주를 봐도 그렇고, 귀하를 봐도 그렇고…, 요즘 마교의 최상층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도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 투성이외다. 혹시, 귀하도…….”

잠시 망설이던 패력검제는 이왕에 갈데까지 갔다고 느꼈는지 하고자 했던 말을 덧붙였다.

“괴물이오?”

패력검제는 심각하게 한 말이었지만, 현천검제는 그것을 농담 섞인 비유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그의 사형은 「괴물」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존재였으니까.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핫핫핫, 무슨 그런 말씀을. 어찌 사형과 나를 견줄 수가 있겠소이까? 어쩌다가 운이 좋아 사부님과 짧은 연(緣)을 맺어 그분과 사형제가 되었지만, 나로서는 사형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소이다.”

“허어… 마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사부를 받는지 알 수 없으나, 사부로부터 짧은 인연을 맺으면 그대 같은 고수가 되는 것이오? 내가 봤을 때, 최소한 극마는 되어 보이는데 말이오.”

그 말에 현천검제는 패력검제가 자신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 오해는 현천검제가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겼으니까.

“아무래도 오해가 심하신 듯하구려. 나의 사문은 마교가 아니라오. 이유가 있어 사문을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역혈의 내공을 연성한 적이 없소. 연이 짧다고 한 것은, 과거 사형을 가르쳤던 사부님과 인연이 닿아 그분께 10년 정도 검술을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이제야 패력검제는 왜 그리 상대가 마교적인 냄새를 거의 풍기지 않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술을 배웠다고요? 내가 알기로는 마교의 검술은 역천의 내공에 그 바탕을 두고 있어 정파인들이 익히면 주화입마에 걸리기 딱 알맞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오?”

“물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무공은 내공에 바탕을 둔 패도적인 검법이 아니었소. 그냥 검의 길 정도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검을 익히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어서 어떤 검술에도 응용이 가능한 것이었소이다. 덕분에 나도 화경을 뚫은 것이었지만 말이오.”

서로 간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 화경의 고수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런데, 패력검제로서는 방금 이자가 말한 검의 길, 즉 검로라는 것에 대해 부쩍 흥미가 당김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모든 검술의 기본이 되며, 또 그것을 10년씩이나 가르친다는 말일까?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당신의 사형, 아니 교주도 익혔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사형은 사부의 정식제자였고, 무형검법의 기본틀은 그 두 분이 함께 연구해서 만든 것이었소. 내가 사부께 듣기로는 이론의 기본은 사부께서 창안하셨고, 그것을 완성시킨 것은 사형이었소. 사실, 그때 사형께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까지 연결되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사부께서는 사형이 죽은 줄 알고 그것이 실전되는 것이 아쉬워 나에게 전수하신 거요. 일은 그렇게 된 거요.”

무형검법. 형태가 없는 검법이라는 말인데, 이건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작명법이었다. 원래가 검법이라는 것은 일정한 검로를 제한하여, 그것을 익히는 자로 하여금 반복 학습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형으로 만든다면,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익힌다는 말일까?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호오, 이제야 귀하가 말씀한 사문이 다르다는 말이 이해가 가는구려. 그런데 기왕에 가르쳐 주는 거 그 무형검법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만 가르쳐 주면 안 되겠소?”

사실 무공을 남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을 패력검제였지만 이토록 염치없게 나온 것은 아마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토록 강렬했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그로 인해 현경의 경지가 개척된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방금 말했듯 그 무공은 사형의 것이오. 그렇기에 그걸 귀하에게 알려 줄 수가 없구려.”

“오히려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오. 그런데, 무공은 그렇다고 치고,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찌 그리 비슷하오? 사제 간이라서 그런 거요? 나는 처음 귀하를 봤을 때, 반박귀진에 도달한 현경의 고수인 줄 알았었소이다.”

현천검제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둘의 느낌이 비슷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오. 사형이야 탈마에 이르러 반박귀진에 들어간 것이고, 내가 그런 것은 하나의 심법 때문이라오. 혹시 귀하께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연성하면 이렇게 되지요.”

“헉! 그, 그것이 있었구려.”

패력검제는 이제야 자신이 태허무령심법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주와 관련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그 심법을 익히고 있으니, 이자도 그것을 익혔다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답이 나왔을 것을.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으면 기본적으로 안으로 잘 갈무리된 안정적인 기도를 보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소연과 진팔의 경우도 그들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던 것인데, 하물며 화경의 고수라면 마치 반박귀진에라도 들어간 듯 아예 정기를 느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릴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드디어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화경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구려. 참으로 놀랍소이다. 어찌, 그것을 개발한 도문에서도 아무도 안 익히는 심법으로 그토록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

“따지고 들어가면 아주 간단하오. 나는 다른 심법을 통해 화경에 올랐었고, 화경에 오른 후에 사형이 나의 본신내공을 없애버린 후 대신 태허무령심법으로 바꿔 버린 것이니까요.”

“본신내공을 없애 버리고 다른 것으로 채워 넣는다고요? 그게 가능하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모르지만, 사형에게는 가능한 모양이오.”

경악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해 이번에는 현천검제가 질문을 던졌다.

“웬만한 궁금증은 다 해결해 드린 듯하니, 이제 귀하가 대답해 줄 차례인 듯하오. 도대체 마교에는 왜 온 것이오?”

지금껏 상대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줬었기에, 패력검제도 숨기지 않고 대답해 줬다. 물론 천마동에서 웬 괴물에게 먼지 나도록 박살난 것은 빼고.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형은 정말 발이 넓구려. 정파에서 알아주던 후기지수를 수하로 두고, 한편으로는 만통음제 같은 명숙을 의형으로 두고 있으니 말이오. 그런데 이번 일에 귀하가 끼어들어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소. 마교와 제령문 사이의 은원을 알기 때문이오.”

“그 당시 그가 사부를 해친 것은 윗사람의 명령을 받고 한 것이오. 그는 자신을 깔보지 않는 자에게는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이오.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대인(大人)의 풍도를 느꼈었소.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의 청을 수락한 것이고.”

“큭큭. 대인치고는 좀 말이 거칠다는 게 흠이기는 하지요. 행동으로는 실컷 잘해 주고 그놈의 입 때문에 항상 오해를 받으니 말이오.”

이제 농담이 오가기 시작하자 패력검제는 어쩌면 양양성으로 가는 길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 교주의 사제라는 인물이 정파의 인물이라는 것도 기이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찌되었건 상대는 상당히 소탈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명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양양성까지 돌아가는 도중에 조금씩이라도 상대가 말한 그 모든 검술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기이한 검법이 도대체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작심해 보는 패력검제였다.

* * *

과연 이번 작전에서 소연이 생사의 기로에까지 가게 된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어떤 놈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묵향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 모든 일을 만들어 놓은 당사자인 팽선은 간신히 적을 따돌리고 이제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작전으로 인해 너무나도 심한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살아남은 인원은 겨우 천여 명 정도. 각 문파에서 최소한 3백 가까운 정예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적을 간신히 따돌렸기에 그 정도에 그친 것이지, 지속적으로 놈들과 싸웠었다면 전멸을 면키 힘들었을 것이다.

팽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목숨을 건진 것은 팽선이 구사한 탈출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묵향과 만통음제 같은 최강급 고수들이 뛰어들어 장인걸이 거느린 상층부를 뒤흔들어 놓은 덕분이었다. 장인걸이 거느린 주력집단의 비보를 접한 워더리 장군은 적을 계속 추격하지 않고 부상자를 수습하여 후퇴하는 길을 택했기에 팽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팽선이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그의 복이 될지, 아니면 더욱 지독한 화가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한편 묵향의 존재를 눈치 챈 장인걸은 공포에 질려 있는 중이었다. 정체 불명의 화경급 고수를 사망 직전까지 몰고 간 상태에서 등장한 묵향. 그의 등장을 눈치 챈 것이 조금이나마 빨랐기에 그는 운좋게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뒤쪽에서 퍼부어대던 푸른빛이 나는 아주 작은 구슬같은 것들.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공포는 너무나도 컸다. 다행히도 그것이 무차별적으로 주위에 떨어졌기에 피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일으킨 엄청난 폭발은 아직까지도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피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다음에 또다시 그런 구슬을 단거리에서 맞는다면? 장인걸로서는 그 뒷일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묵향이 등장했다는 말은, 곧 마교가 자신을 공격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은원에 있어서는 매우 확실하게 처리하는 묵향이 잊을 리가 없었다. 정파와 함께 마교가 연합하여 공격해 온다면? 어쩌면 무림일통은 커녕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 2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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