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9화 (525/930)

이진덕이 영안문 혈사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을 나온 지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지나갔지만, 좀처럼 혈겁의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이진덕은 진곡추에게 철썩 들러붙어 그가 좋아하는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며 정보를 빼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속이고 정보를 빼돌리는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단서라고 잡히는 것도 없었고, 중원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혈겁들과의 연관성도 찾기 어려웠다. 이진덕이 진곡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혹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극진방(戟塵幇)이 멸문당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두 사람은 수하들을 이끌고 극진방이 있는 곳을 향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이윽고 극진방에 도착하자, 담벼락 밖으로까지 피비린내가 물씬하게 풍겨 왔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무림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는 하지만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수하들에게 장원 내부를 뒤져 흉수가 남겼음직한 단서를 찾게 한 뒤, 두 사람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시체들을 한 구씩 세심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사인(死因)은 전과 거의 비슷해.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모양으로 봤을 때, 한밤중에 기습을 당한 것 같아. 물론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는 있었던 듯한데, 결국은 그냥 밀려 버렸군. 흔적으로 봤을 때, 흉수들과의 실력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데다가 숫자까지도 저쪽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

시체를 엎어 놓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진곡추는 내원 쪽을 힐끗 바라봤다. 내원 역시 시체들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흠, 내실 쪽은 제법 격렬한 저항을 한 흔적이 보이는군. 아마 그때쯤 자고 있던 인물들이 깨서 합류한 것이겠지.”

진곡추의 말에 이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사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흉수는 완전히 다른데요. 영안문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들은 꽤나 고수들인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영안문이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까지 말한 진곡추는 극진방 방주 조태식(趙太殖)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 방주 정도 되는 실력자를 없애려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극진방의 방도들 외에 흉수의 시체는 단 한 구도 없다는 사실이야.”

상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이진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진곡추에게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형님, 아우하면서 말이다.

진곡추의 성격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겨우 2주일 만에 형님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진덕의 피나는 노력의 승리라고 봐야 했다. 워낙 게으른 진곡추다 보니 몸에 이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고, 술과 개고기를 대접할 때마다 진곡추의 몸에서 옮겨 오는 이 때문에 온몸을 벅벅 긁어야 하는 끔찍함까지 웃으며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체를 모두 다 가져갔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아마 그게 정답이겠지.”

“그렇다면 흉수는 몇 명 정도가 아닌 상당한 세력의 문파일 확률이 높겠군요.”

잠시 그동안 일어났던 혈겁을 생각해 보던 진곡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이 정도 문파를 몰살시키려면 상당한 세력을 보유한 자들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 극진방을 칠 만한 규모의 문파들을 수배해서, 그들의 인원 이동을 알아보면 흉수를 파악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동생은 서로가 서로를 몰살시켰다고 생각하는 겐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대 방파에서 고수들을 투입해 혈겁을 일으킨다는 가정보다는 그게 더 현실성 있는 추리 같은데요?”

여기까지 말한 이진덕은 조태식의 시체에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상흔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상처들은 요 근래에 생긴 상흔들로서, 치료가 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도 어디선가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후, 근처의 실력 있는 의생을 불러 치료를 받았겠죠. 그런데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싸웠으니, 본 실력을 다 발휘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이진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곡추는 옆에 서 있는 거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예?”

“너는 빨리 이 인근에 있는 의생들을 수소문하여, 2주일 전쯤에 극진방에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는지 알아봐라.”

“옛.”

거지가 달려 나가고 난 후, 진곡추는 이진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 말대로 극진방이 영안문을 쳤다고 가정하세. 그런데 왜 쳤을까? 이 두 문파는 인접해 있지 않기에 서로 싸울 이유가 거의 없어. 더군다나 한밤중에 기습해서 상대편을 몰살시킬 정도로 원수질 일은 더더욱 없었지.”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최우선일 듯 합니다.”

“흠, 하지만 또 다른 제3의 세력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으니, 거기에 따른 조사도 병행해야겠지.”

“물론이죠, 형님.”

언제부터인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드러나는 혈겁의 비밀

이소청(李炤淸)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었다. 그의 범 같은 할아버지는 칠웅방(七雄幇)의 방주로서, 칠웅방을 세운 일곱 영웅호걸들 중에서 맏형이었다. 그렇기에 이소청은 태어난 이후 줄곧 호사스러운 생활만을 영위해 왔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이렇듯 중상(重傷)을 당한 상태에서 괴한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헉헉헉! 나는 이제 틀린 것 같아.”

지금껏 힘든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문파에 찾아든 혈겁은 견디기 힘들 만큼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천하를 오시할 것만 같던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나머지 여섯 작은 할아버지들도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겨우 혈겁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아 이소청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무서웠다. 꿈이라면 얼른 깨고 싶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악몽이었다. 이소청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헐떡거리고 있을 때, 그를 붙잡아 일으키는 손이 있었다. 그와 함께 칠웅방을 탈출한 할아버지의 충성스러웠던 가신들 중 한 명이었다. 처음 칠웅방을 함께 탈출했던 열세 명이나 되던 무사들은 다 어디가고 이 사람 혼자만 그의 곁에 남아 있다. 그것도 왼팔이 팔목 어림에서 썩둑 잘려 나간 중상을 당한 상태로 말이다.

“도련님, 힘을 내십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헉헉, 민 단주. 조,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이소청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민 단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왼팔이 잘려나간 데다가, 적지 않은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이 매섭기 그지없다.

“언제 놈들이 쫓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이번에 놈들의 이목에 포착당하면 도련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들 일행의 움직임이 놈들에게 포착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가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수하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도 함께…….

물론 수하들 중 몇 명은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이 무척 뛰어날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이 죽었는지 확인해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길(閔秀吉)은 차라리 자신의 부하들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아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한솥밥 먹던 처지에 너무나도 매정한 심사인 듯싶지만, 그것은 현실을 직시한 그의 바램이었다.

만약 수하들이 무사히 도망쳤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누군가가 적들에게 사로잡힌다면, 그리고 지독한 고문을 당한다면……. 결국 이소청이 갈 행선지를 실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칠웅방의 마지막 남은 핏줄은 흔적도 없이 놈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막아야 했다. 아버지처럼 존경했던 칠웅방 방주의 죽음조차 외면한 채 치욕스런 도주를 감행한 것도, 당신의 마지막 핏줄을 보호해 달라는 방주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민수길은 쓰러지려는 이소청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토해져 나오는 숨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기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러던 그들의 앞에 갑작스럽게 인기척이 나타났다. 평상시 같았으면 저들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몰랐을 그가 아니었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헉!”

다급한 숨을 삼킬 때, 상대편도 이쪽에 누군가가 숨어 있음을 감지한 모양이다.

“웬 놈이냐?”

이소청은 아예 저항할 엄두도, 그렇다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오로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민수길만이 방어 자세를 갖췄을 뿐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장검은 이소청을 끌고 오느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어디에서 흘려버렸는지 사라져 버린 상태다. 그렇기에 그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짧은 단검을 뽑아들고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어둠 속에서 단검이 새파란 빛을 발하자, 상대 쪽도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을 때, 깜짝 놀란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엇! 미, 민 단주님이 아니십니까?”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민수길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단검이 마치 장검이라도 되는 듯 묵직하게 느껴져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

“자, 자네는?”

“진천위(陳千位)입니다, 단주님.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어찌 하여 이렇듯 큰 부상을 입으시고…….”

“쉿! 너무 목소리가 크네. 자네는 빨리 도련님과 나를 방주께 안내해 주게. 그리고 우리들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겨야만 할 것이야.”

“어찌 되었건 서두르시죠, 치료부터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진천위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민수길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칠웅방을 공격해 왔던 자들은 공포스러웠다.

“수하들을 시켜서 우리가 이쪽으로 오며 남긴 흔적들을 좀 지워 주게. 그게 우리만이 아니라 사해방(四海幇)을 위하는 길이기도 할 걸세.”

민수길의 말에 진천위는 피 냄새를 맡았는지 다급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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