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 호법원의 비애
은편패왕(銀片覇王) 여문기(呂文起).
그는 마교 서열 17위에 올라 있는 가공할 고수다. 더군다나 우호법이라는 마교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인 그가 요즘 들어 팔자에도 없는 속칭 ‘개고생’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뇌전이 번뜩이는 하늘에 흡사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굵은 나뭇가지에 몸을 기댄 채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비록 나뭇잎이 우거진 나무라고는 하지만 빗물은 거침없이 그의 몸에 두른 기름먹인 얇은 양피지로 만든 우의(雨衣)를 따라 흘러내렸다. 깊게 눌러쓴 삿갓 위로 빗물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물론, 이 정도 빗물쯤이야 내공으로 간단히 튕겨 낼 수 있겠지만, 잠을 자면서도 내공을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우의를 입고 있는 것이다.
곧 여명이 밝아올 시간이건만, 구름이 워낙 두텁게 끼어 있어 아직까지도 주위는 칠흑과 같이 어두웠다.
“우호법님.”
낮은 목소리였지만, 여문기의 단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뜨기 전에 사방에 기파(氣波)를 쏘아, 주변의 기척을 점검했다. 주변에 대한 점검을 끝낸 후에야―물론 거기에 소모된 시간은 거의 찰나라고 할 만큼 짧았다―방금 자신의 잠을 깨운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특이 사항이라도 있나?”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여문기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휴대하기 편한 것은 좋았지만, 우의를 너무 얇게 만들어 놨기에 조금만 방심해도 찢어지곤 했기 때문에 주의를 요했던 것이다.
“경비는?”
그가 데리고 있는 수하들은 2교대로 한 무리는 자고, 또 한 무리는 지금 경계를 서고 있는 중이다.
“예, 반 시진 전에 교대했습니다, 우호법님.”
여문기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빗줄기가 요란스럽게 쏟아져 내리면 인기척을 감지하기 어렵기에 그만큼 경호가 어려워진다. 물론 상대방도 자신들처럼 마기를 풀풀 날린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정파 나부랭이나 살수들이 마기를 풍길 리 없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위치는 마기 때문에 상대에게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기 때문에 더더욱 힘든 경호가 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근접해서 경호하는 것이라면 쉽겠지만, 이런 식으로 먼 거리에서 경호를 하다 보니 아무리 무공이 높은 여문기라 해도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이때 누군가가 천천히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커다란 빗소리에 섞여 철벅철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낮게 들려왔던 것이다. 경비를 서고 있는 부하들도 그걸 느꼈는지 순식간에 장내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잠시 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여문기는 난처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접근해 오는 이가 바로 현천검제였기 때문이다. 아마 현천검제는 자신의 접근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궂은 날씨에 수고가 많구먼.”
돌아가라고 부탁한 것이 며칠 전인데, 여문기와 그의 수하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이렇듯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어 소연은 이들의 존재를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가씨를 경호하는 일이 저희들의 임무인데,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새벽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르신.”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꼭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해야 하겠는가? 자네도 정말 답답한 사람이구먼.”
그 말에 여문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시더라도 그냥 눈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허허, 나는 교주의 사제일세. 그리고 소연이는 교주의 딸이고. 그런 내가 소연이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호위는 필요 없다고 한 건데, 설마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가?”
화경급 고수의 실력이 못미더울 리 없다. 여문기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지라, 제발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사정이라고? 무슨 사정 말인가?”
하지만 여문기는 현천검제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여문기의 수하 중 하나가 현천검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속하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윗사람들 간의 대화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것은 아주 실례되는 행동이다. 특히나 마교와 같이 상명하복이 철저한 곳이라면 더욱 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대화가 진행된다면 자신의 상관만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그는 나중에 여문기에게 묵사발이 날 각오를 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말해 보라는 듯이 현천검제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땅바닥에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발밑은 물이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속하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가씨를 양양성까지 안전하게 모시라는 대호법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현천검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론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으니 자네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겠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우호법이 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걸세. 말하기 곤란한 뭔가가 있는 것인가?”
여문기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땅바닥에 부복해 있던 부하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호법께서는 이번 호위를 완수하는 것이 호법원을 중흥시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천검제도 한 문파를 다스려 봤던 사람이다. 그리고 눈치도 빠르다. 그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어찌된 일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직이란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느냐에 따라 그 위상과 세(勢)가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의 호법원은 거의 존재 가치마저 희미한 상황이다. 막강한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호법원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묵향이다.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된 묵향으로 인해 호법원은 기나긴 암흑 속으로 잠겨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호위할 당사자가 없어졌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문제는 묵향이 돌아오고 나서도 그게 계속되었다는 거다. 자신보다 약한 놈들이 경호를 하겠다고 나서니 묵향의 성격상 용납할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거치적거리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묵향이었기에 호법원은 그저 밥만 축내며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호법원에게 소연의 존재야말로 한 줄기 서광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들로서는 현천검제가 아무리 호위를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부탁을 해도 받아들일 형편이 아니었다. 만약 호위를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호법원은 정말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까지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 결국 괴물 같은 사형이 문제였군.”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여문기를 바라보던 현천검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는 자네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었군. 본의 아니게 자네에게 심적 부담을 주어 미안하게 되었네.”
이렇게 해서라도 세력을 유지해야 하는 자괴감에 여문기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르신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 호위를 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러니 자네들 편한 대로 하게. 다 이해했으니까 말이야. 그럼 수고들 하게.”
슬쩍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는 현천검제를 향해 여문기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며칠 전 장인걸의 수하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장인걸의 수하라고?”
“예,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만으로 봤을 때, 결코 저의 밑이 아닌 듯했습니다. 아마 천마혈검대 소속의 어떤 녀석이었겠지요.”
“그런데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놈은 꽤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서 화살을 몇 대 날리고 도망쳤습니다. 수하 셋을 보내 놈을 추격했지만 도중에 놓치고 말았죠. 혹, 놈들이 어르신이나 아가씨께도 그런 식의 공격을 가할지 모릅니다.”
“알려 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런 공격에 당할 내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사실 현천검제 정도 되는 고수를 그런 얄팍한 기습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여문기 정도의 고수에게도 그딴 공격은 먹혀들지 않는데, 어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소연의 옆에는 또 한 명의 화경급 고수가 동행하고 있지 않은가. 장인걸이 천마혈검대 전체를 투입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소연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상황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래도 여문기가 얘기를 꺼낸 것은 혹시나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현천검제가 약간의 경각심만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여문기는 만족이었다.
이진덕의 똥배짱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던 진곡추는 고개를 갸웃하다 이진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당한 실력자들이야, 안 그런가?”
“제 실력을 다 드러내 흔적이 남은 게 아니므로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제가 보기에는 거의 신검합일급에 다다른 고수들처럼 보이는군요.”
진곡추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보기에 흉수는 몇 명 정도겠나?”
“최소한 20명은 넘을 겁니다. 물론 그보다 더 적었는지도 모르지만 칠웅방 같은 대문파를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멸문시키려면 그 정도 숫자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미리 도망칠 만한 길목을 다 틀어막아 완벽하게 포위망을 형성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흠, 그렇다면 역시 거대문파가 개입해 있다는 소리가 되겠군.”
“그런데 그 정도로 강대한 문파가 왜 혈겁을 일으켰을까요? 저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형님은 혹시 아시는 거 없습니까? 칠웅방이 어느 거대문파하고 원수를 졌다든지 하는 소문 말입니다. 요즘 저희 무영문에서는 무림 쪽에 투입할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진곡추는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배배 꼬며 생각에 잠겼다. 수염을 꼬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진곡추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다른 문파와 뭔가 문제가 있어서 이런 혈겁이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지.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일부러 몇 명 살려 줘서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사방에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하잖아? 그런데 이건 마치 비밀이 새 나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완전히 몰살시켰어. 그 이유가 뭘까?”
맞는 말이었다. 문파간의 다툼은 어지간해서는 몰살까지 가지 않는다. 만약 한 문파를 멸망시킨다면 무림에 공표를 해서 우리의 힘이 이 정도라고 과시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때 무공을 모르는 노약자까지 몰살을 시킨다면 너무 잔인하다는 강호의 비판을 들을 게 분명했다.
진곡추는 시체들의 상처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랑캐들의 개가 되어 있는 그 마교놈들이 저지른 일이 아닐까?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에 약간씩 드러나 있는 흔적들이 아무래도 마공을 익힌 놈들의 소행인 것 같거든.”
“그건 아닐 겁니다. 장인걸 패거리가 요 근래 여기저기에서 혈겁을 일으킨 이유는 정파와 마교 간의 이간질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예상도 못했던 거죠. 그렇기에 장인걸 패거리가 혈겁을 일으킨 곳에는 마공의 흔적들이 확실하게 남아 있죠. 사실 그놈들도 정통 마공을 수련했으니, 흉내 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
진곡추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 이진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마공의 흔적들은 너무 작위적입니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놈들이 자신의 소행을 마교나 장인걸 패거리에게 떠넘기기 위해 어설프게 마공을 사용한 것 같다는 거죠.”
“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이렇게 그 둘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허겁지겁 거지 몇 명이 달려왔다.
“타주님! 있습니다, 있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흉수로 짐작되는 수상한 마교 고수들이 이 근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보고에 진곡추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흉수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방금 천영분타로부터 들어온 전갈인데, 이쪽으로 이동 중인 마교 고수 열한 명을 확인했답니다.”
“열한 명이라고?”
보고를 하는 거지의 얼굴에는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수색 작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2주일 동안 단서를 찾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천영분타에서 들어온 전갈이 반가울 만도 했다.
“예, 이틀쯤 전에 이 근처를 통과했다고 하는데요. 혹시 그들이 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요?”
진곡추는 이진덕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흠, 자네 쪽에서 들어온 정보는 없나?”
“글쎄요. 저는 형님하고 계속 같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한번 총타에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제 임무는 이 지역의 정보를 취합하여 위쪽에 보내는 것이다 보니…….”
“그렇다면 그쪽으로 직접 가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어쩌면 흉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진곡추는 보고를 올린 거지를 향해 다그쳤다.
“놈들이 발견된 위치가 어디라고 하더냐?”
거지는 재빨리 천영분타에서 받은 전서를 보며 마교 고수가 발견된 장소를 진곡추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급히 덧붙여 말했다.
“관도(官道)에서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하니 서두른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진곡추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허, 참나. 그놈들 마교도들 맞어? 아니면 마교도로 위장하고 있는 다른 놈들이야?”
그 말에 이진덕도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놈들이 진짜 마교도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죠. 마교도들은 총단을 나서는 순간, 그때부터 전력 질주를 통해 최단 시간에 목적지로 이동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니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드는데요.”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여기서 고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일단 우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빠르겠지. 자,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