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2화 (52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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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기가 거느린 수하 열 명은 한 번씩 저 멀리 관도 쪽을 살펴보며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경공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달려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의 속도다.

이렇게 여문기와 그 수하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관도 저쪽에서 말을 타고 이동 중인 소연 일행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에 의해 죽다 살아난 소연을 위해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그들의 이동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우호법님,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집단이 있습니다.”

“아직 놈들의 의도를 모르는 이상 일단 무시하고 계속 이동하라.”

우연히 자신들의 주위를 통과해서 지나가는 무림인들일 수도 있기에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와 여문기 일행과 맞닥뜨렸다.

‘이런 떠그랄! 진짜 마교도다.’

온몸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지금껏 업무의 특성상 몇몇 마교의 고수들을 관찰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만큼 자신을 압도하는 기운을 풍긴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기 있는 열한 명 모두가 다.

“네놈들은 뭐냐?”

무시무시한 눈빛을 뿜어내며 마교 고수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진곡추는 그 질문에 감히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질려 혓바닥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진곡추처럼 노회한 인물을 이토록 움츠러들게 만들 만큼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마교 고수들은 엄청난 마물들이었다.

이때 진곡추 옆에 서 있던 이진덕이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그가 진곡추보다 무공이 앞섰기에, 상대의 마기에 조금은 저항할 능력이 되었던 모양이다.

“저, 한 가지 말씀을 여쭐 것이 있어서 귀하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냐?”

“이틀 전쯤, 이 근처에 있는 칠웅방에서 혈겁이 일어났습니다. 혹시 그 일에 대해 아시는 것이 없는가 하고…….”

상대의 입술 끝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칠웅방? 그게 어떤 문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문파를 치기 위해 움직이기에는 우리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소연을 호위하기 위해 남은 호법원의 고수들은 모두가 다 극마급에 근접하는 거마(巨魔)들이었다. 칠웅방 따위는 이들 중 한두 명만 나서도 단번에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그건 충분히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쪽도 혈겁에 대해 조사하던 것이 있기에 귀하들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귀하들의 정확한 신분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그냥 보내 주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사실 저들 중 두어 명이 손을 쓰기만 해도 여기 모여 있는 개방과 무영문의 제자들은 일순간에 몰살시켜 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상대는 콧방귀를 뀌며 비릿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들이 천마신교에서 나왔음을 네놈은 모르겠느냐?”

“물론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장인걸의 패거리가 마교와 정파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못된 짓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은 귀하도 아실 것이 아닙니까? 그런 만큼 정확한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쪽에서도 귀하들에 대해 천마신교에 알아보기가 수월할 테니 말입니다.”

지금껏 이진덕을 상대하고 있던 마인이 뒤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이때 이진덕은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또 다른 마인이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그걸 보면 아마도 그자가 이들의 지휘자인 모양이다.

“꼭 그런 이유라면 우리들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지 않나? 본교에 알아보거라. 이쪽에 이동 중인 귀교의 고수 열한 명을 발견했는데, 과연 귀교의 인물들이 맞느냐고 말이다. 이제 됐느냐?”

호법원 소속임을 밝히는 순간, 자신들이 누군가를 호위하여 이동 중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기에 여문기는 자신들의 소속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외부에 활동 중인 귀교의 고수들이 한두 명도 아니니, 그런 식으로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진덕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언제 마교에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려면 확인될 때까지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들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마교 소속이라는 말 한마디만 듣고 그냥 물러서자니 왠지 억울했던 것이다.

그 말에 마교 고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답답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임무를 수행하려니 신분을 밝히기도 힘들었지만 자칫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혈겁의 흉수로 오해를 살 상황이지 않은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교 고수의 얼굴에 점차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엉뚱한 누명을 쓰는 것도 싫었지만, 실력도 안 되는 정파 나부랭이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예전 같으면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할 허접 쓰레기들이 말이다.

“더 이상 묻지 마라. 만약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건 네놈들에게 뭔가 다른 흑심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와 이진덕과 진곡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진덕과 마교 고수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진곡추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엄청난 살기에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애써 혀끝을 깨물어 정신을 차린 진곡추는 타구봉을 움켜쥐고 이진덕의 옆에 섰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형, 동생하며 지낸 이진덕이 아닌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화끈하게 싸우다 죽는 게 나았다. 무영문과 개방의 고수들은 그 모습에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에 늘어서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장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과 살기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마교의 고수들은 그런 진곡추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여문기가 가만히 있자 그저 살기만 짙게 뿌릴 뿐,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때 관도 쪽에서 누군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엄청난 경공에 진곡추는 내심 간절하게 소망했다. 지나가던 정파의 은거고수나 기인이기를. 그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달려오는 자에게서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새로 나타난 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들려오는 말에 진곡추의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만 알았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무슨 일인가? 이쪽에서 살기가 느껴지던데…….”

현천검제는 말을 하며 무심결에 상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설마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랴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삿갓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만으로 자신을 알아본 놀라운 눈썰미를 지닌 인물이 이곳에 끼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귀, 귀하는…….”

이때 진곡추의 귓가에 모기 소리같이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현천검제가 다급히 보낸 어기전성이었다.

《쉿, 더 이상 말을 하지 말길 바라오. 내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제발…….》

침중한 안색의 현천검제는 말없이 여문기를 바라보았다. 여문기로부터 전음으로 대충의 사정을 들은 현천검제는 진곡추를 보며 말했다.

“이들은 이 근처에서 발생한 혈겁과는 관계가 없소.”

그 순간 진곡추의 귓속으로는 놀랍게도 또 다른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귀방에 찾아가 내 자초지종을 설명하리다.》

여태껏 뒤에 서 있던 이진덕보다 조금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었던 진곡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쪽에서 오해를 한 듯싶습니다.”

이진덕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진곡추는 재빨리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귀하들에 대한 혐의는 다 벗겨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현천검제는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고, 여문기도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더 이상 쓸데없는 충돌은 원치 않는 듯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출발하라!”

여문기의 지시에 마교 고수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남은 개방도들과 무영문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두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에 서 있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열한 명의 마인들이 뿜어 대던 기세가 얼마나 공포스러웠던지, 모두들 안색이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먹은 듯 빡세게 나갔던 이진덕의 행동 또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품속을 뒤져 작은 술병을 하나 꺼냈다.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진곡추는 피식 웃었다.

“자네도 내심 겁이 나기는 났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자네 배포 한번 대단허이. 난 그놈들의 눈을 마주 보는 것조차 겁나던데.”

이진덕은 기갈이라도 들린 듯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신 다음, 술병을 진곡추에게 건네며 말했다.

“살기를 흉흉하게 뿌려 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제 느낌으로는 저들이 싸움을 회피하는 듯해서요.”

이진덕의 엉뚱한 대꾸에 진곡추는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그놈의 느낌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건가?”

“물론이죠. 덕분에 엄청난 정보를 얻었지 않습니까?”

물론 생각 밖으로 대단한 정보를 얻기는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정보라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 아닌가?

“쓰펄! 앞으로 그딴 짓 하고 싶을 때는 너 혼자서 해. 엉뚱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저승 구경시킬 생각하지 말고 말이야.”

마교 고수들이 칠웅방의 혈겁을 일으킨 자들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마음을 진정시키려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미 칠웅방의 혈겁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죽은 줄 알았던 현천검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현천검제를 향해 마교 고수들의 입에서 나온 ‘어르신’이라는 호칭. 왜 저런 마물들이 현천검제를 ‘어르신’이라 칭하며 공경하는 것일까?

“형님, 아까 그놈들 한눈에 척 봐도 마교의 최정예들 같았죠?”

“그래, 그 정도로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은 내 머리에 털 나고 처음 봤다.”

이진덕은 은근한 표정으로 진곡추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형님, 아까 제 옆에 서서 같이 싸우시려는 형님의 의리에 정말 감격했습니다. 제가 형님을 만난 건 천생의 복인 듯합니다.”

진곡추는 멋쩍은 듯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우린 개고기를 함께 나눠 먹은 사이가 아닌가. 뭐 그런 걸 가지고.”

“참, 형님께서는 아까 그 고수를 알아보신 것 같던데, 누굽니까?”

“…….”

너스레를 떨어대던 진곡추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증거였다.

“같이 개고기도 나눠 먹은 사인데, 이러깁니까? 대체 누굽니까? 그가 누군데 도중에 나서서 중재역을 자청하신 겁니까?”

진곡추는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별거 아니라는 듯 짐짓 능청을 떨었다.

“예전에 좀 알던 사인데 뭐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고 하더군. 시간이 되면 같이 개고기나 뜯었으면 좋겠지만 좀 바빠서 나중에 보자고 하던데.”

이진덕의 안색이 딱딱하게 변했다. 마교도들이 ‘어르신’이라고 깍듯이 존경했던 정체불명의 고수.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면 아마 마기를 숨길 수 있는 극마급을 상회하는 고수임에 분명했다. 아무리 삿갓 아래로 슬쩍 봤을 뿐이지만, 그가 철영 부교주가 아니라는 것은 이진덕도 눈치 챈 상태다.

‘새롭게 등장한 극마급 고수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극마급이면 마교에서는 무조건 부교주로 임명 돼. 그렇다면 그들이 부교주님이라고 불렀어야지, 어르신이라고 부를 리 없잖아.’

물론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변장이 너무 어수룩했다. 인피면구라든지, 아니면 다른 완벽한 변장 수단도 잔뜩 있는데 겨우 삿갓 하나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진곡추 정도가 저런 고수를 예전부터 알고 있다는 말은 곧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말이다. 즉, 마교 쪽의 숨은 고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정파 쪽의 인물일지도.

순간, 이진덕의 눈동자는 진곡추를 향해 매섭게 빛났다. 어쩌면 무림을 뒤흔들 엄청난 정보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팍 온 것이다. 어르신이라는 말의 비밀은 진곡추가 쥐고 있다. 당연히 최대한 구워삶아 정보를 빼내야 한다.

“어허, 형님, 섭섭합니다. 좀 같이 알죠. 그는 대체 누구였습니까?”

“자네는 몰라도 돼.”

매정하게 대답한 진곡추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참, 거기 가기로 해 놓고 내 정신 좀 보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동생, 내가 지금 급한 볼일이 있거든. 나중에 다시 보세.”

“형님, 좀 가르쳐 주세요.”

하지만 이진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곡추는 어딘가를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이진덕은 입술을 꽉 깨물고 진곡추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두 사람이 떠나고 난 그 자리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무영문도들과 개방도들이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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