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4화 (530/930)

다시 시작되는 비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항상 정문 앞에는 두 명의 무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비 무사의 제지를 받지 않고 그냥 들어가려니 아무래도 찝찝한지, 조령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한 상태로 봤을 때, 며칠 전까지 5백여 명이 넘는 문도들이 북적거렸던 장원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온 자가 겨우 50여 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조차 중상자가 태반이니…….”

장원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암울한 탓인지, 조령은 선뜻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마냥 머리통만 대문 안쪽으로 집어넣어 두리번거리며, 혹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쟈타르의 경악성이 들렸다.

“아, 아가씨!”

“왜?”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서던 조령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젊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조령은 본능적으로 솟아오르는 공포심에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이 장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게 불쾌했는지 사내는 퉁명스레 말했다.

“이봐, 꼬맹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따위로 말을 걸었다면 그녀는 아마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령은 상대가 자신을 모멸적인 말투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 앞에만 서면 흡사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찍소리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 왜 그러세요?”

“들어갈 거냐?”

조령은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닌데요.”

젊은 사내는 아마 그런 조령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들어갈 거 아니면 빨리 비켜.”

조령이 화들짝 놀라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는 별 괴상한 계집을 다 보겠다는 듯 그녀의 아래위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쟈타르는 젊은 사내의 등장이 불안하게 느껴졌는지 조령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교주도 진 소협을 만나러 오신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렇다. 방금 그녀가 만난 젊은 사내는 바로 마교의 교주 묵향이었다. 그녀와 묵향과의 첫 대면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그녀는 지금도 묵향 앞에만 서면 두려움에 질려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응, 빨리 돌아가자.”

묵향이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오고 가던 천지문도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마 전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때, 자신들을 구해 주기 위해 달려와서 보여 줬던 그의 가공할 신위. 그 전에 껄렁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그날 보여 준 묵향의 가공스런 무공은 천지문도들 가슴속 깊이 공포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진팔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묵향의 물음에 천지문도들 중 한 명이 다급히 앞으로 나서서 진팔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

“저, 저쪽에 있을 겁니다, 교주님.”

묵향이 진팔이 있다는 방에 가 보니 그는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형제와도 같이 지내던 수많은 동문들이 죽음을 당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흠모했던 사저마저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넋이 빠질 만도 했다. 초췌한 안색에 허옇게 부르튼 입술이, 그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진팔에게 연민의 눈빛이라도 보내 줄 만하건만, 묵향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전투 이후 처음 보는군. 몸은 괜찮나?”

“어,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평상시에 묵향을 보는 진팔의 눈은 얼마간의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원망이 뒤범벅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 묵향을 마주 보고는 있지만 진팔의 두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주춤 묵향 곁으로 다가섰다.

소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잘못되었다는 대답을 교주가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묻자니 두렵고, 묻지 않으려니 답답했다. 진팔은 복잡한 눈빛으로 묵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채 입만 뻐끔거렸다.

묵향이 소연의 문제로 자신을 두들겨 팬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어디 하루 이틀 맞았는가? 온몸이 노곤해 질 정도로 두들겨 맞아도, 아니 그러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만 무사하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진팔이었다.

묵향은 그런 진팔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예전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이 약을 먹었는지 감히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성질 같아서는 사지를 부러트려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소연이 아끼는 사제인지라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진팔이 왜 이렇게 멍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아마도 소연의 생사에 대한 근심 때문일 것이다. 묵향은 이미 소연이 회복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진팔에게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옆에서 소연을 지키라는 뜻으로 귀찮은 무공 대련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소연이의 힘을 빌려 목숨을 연명하지 않았는가. 소연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 주어 진팔이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진팔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도록 놔두려는 것이다.

물론 비무를 가장한 구타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묵향은 시치미를 뚝 떼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내자식이 겨우 한 번 죽을 뻔했다고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서야 쓰나. 이럴 때일수록 모자란 자신의 무공을 갈고 닦는 게 좋아. 빨리 가서 대련할 준비를 갖추고 나오너라.”

그런 묵향이 진팔은 너무나 고마웠다. 언제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자신이 실의에 빠져 있자 일부러 찾아와 이렇듯 따스하게 배려를 해 주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다고 죽은 사문의 제자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앞으로 남은 전투를 위해 무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비무를 해 주겠다니. 어쩌면 자신의 무공을 높여주기 위해 비무를 해 준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 진팔이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여기까지 말하던 진팔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묵향의 매서운 눈매를 보니, 대련을 안 하겠다는 말을 하면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뒤따를지 뻔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준비하고 나와!”

고마움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묵향에 대한 공포심이 진팔을 휘감았다. 진팔은 정신없이 방 안에 나뒹굴고 있던 목검 한 자루와 자신의 애도를 주워들었다. 그게 바로 대련에 필요한 준비물이었으니 말이다.

묵향은 대련에 앞서 진팔이 가져다 준 목검을 잡고 한 가지 검법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물었다.

“이 검법을 본 적이 있느냐?”

묵향이 펼쳐 보여 주고 있는 초식을 보던 진팔은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확실히 진팔도 알고 있는 검법이었다. 천마혈검이 아니라 목검으로 펼쳐서 그런지 패도적인 맛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팔이 이 검법을 몰라볼 리 없었다. 자신에게 한없는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 줬던 검법이었으니까.

“이건 본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인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이라는 거다. 천마혈검대원들이라면 필히 이 검법을 익히지. 너도 이번에 한 놈 상대해 봤으니 약간은 눈치 챘겠지만, 도가 계열의 검법들과는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검법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해.”

묵향은 진팔이 관찰할 수 있도록 느릿하게 다섯 번 정도 천강혈룡검법을 펼쳐 보여 주며, 검법의 초식과 변초가 어떤 것인지 알려줬다.

“전체적인 초식들의 모양은 기억할 수 있겠느냐?”

“예, 그런대로…….”

“그럼 이제부터 본좌는 천강혈룡검법만으로 너를 공격하겠다. 재주껏 막거나 피해 보거라. 그렇게 둔한 놈은 아니니 며칠 두들겨 맞다 보면 이 검법을 상대할 방법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팔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삼류검법이라도 묵향의 손에서 펼쳐지면 막기가 힘들다. 그런데 몇 번 본 것만으로 마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라는 천강혈룡검법을 막으라니. 당연히 진팔로서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고수들인데, 파훼법이라도 가르쳐 주신다면 몰라도…….”

묵향은 기가 막힌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파훼법? 웃기고 있군. 동등한 실력쯤 되어야 파훼법이 통하는 거다. 수많은 초식들 중에서 어떤 게 날아올지도 모르고, 또 어떤 식의 조합으로 공격해 올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파훼법을 알아봐야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네가 할 일은 이 초식을 피하는 것을 머리통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일이야. 그 후에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이후 진팔은 시도 때도 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뻘건 장검을 들고 미친 듯 맹공을 퍼붓는 마인. 막을 방법도, 막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무력했던 그 순간이 하나의 공포로 각인되어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천마혈검대원들이 펼치던 검법은 가공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떠올리며 상대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무력감은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악몽을 꾸면 당시에 느껴지던 그 지독한 공포와 무력감이 떠올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자 묵향이 펼치는 검법은 그자가 펼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목검으로 천천히 펼쳐서 그런지 패도적인 맛이 하나도 없었고, 신기하게도 공포나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팔에게 있어서 마교 최고수라는 묵향이 펼치는 검법이 그때 그자가 펼친 것보다 훨씬 더 만만하게 보인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막상 한 수 교환해 본 뒤 진팔은 깨달았다. 묵향 쪽이 훨씬 더 수준 높은 검식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자의 검은 소연과 함께 어떻게 막거나 피하는 게 가능했었지만, 이번 경우는 아예 그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련을 하던 진팔은 서서히 가슴속에 차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 공포의 원인은 무력감에 치를 떨어야 했던 천강혈룡검법 따위가 아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저히 반항조차 해 볼 수 없는 묵향의 존재 때문이다. 비무가 끝날 때까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허우적거려야 할 거라는 원색적인 두려움, 그리고 왠지 이런 고통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는 절망감이 합쳐진 공포였다.

그리고 이런 재수 없는 예감은 의외로 잘 들어맞았다.

빠각!

“크으윽!”

“조금 전에 말했지? 도가의 검법과 그 궤를 달리한다고 말이야. 자, 빨리 일어서!”

마음은 이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새 묵향에 의해 길이 잘 들어 버린 진팔의 몸은 생각과는 달리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괜히 꿈지럭거리다 더 매몰차게 두들겨 맞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퍽! 퍽!

우당당탕.

기를 쓰고 막는다고 막아 보지만 목검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유유히 진팔의 애도를 헤집고 들어와 여지없이 두들겨 댔다. 그럴 때마다 진팔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널브러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은 세 시진에 걸쳐 지속되었고, 진팔은 차라리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들겨 터져야만 했다.

“아이고…, 흐윽…….”

땅바닥에 큰 대(大)자로 사지를 벌리고 볼썽사납게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진팔은 온몸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교주와 대련을 하지 않다가 해서 그런지 몸이 아직 적응을 못 해 더욱 아팠다. 예전에 매일같이 두들겨 터질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차라리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치기 어린 생각마저 들었다.

진팔이 절망감에 한숨을 내쉬든 말든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소연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야 진팔은 아무 쓸모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뒀을 뿐이다. 진팔의 몸이 회복되고 안 되고는 묵향의 관심 밖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소연이 살아났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다. 완쾌한 소연은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고, 그녀를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할 사람은 천지문에서는 진팔밖에 없다. 그런 만큼 놈을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련에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진팔을 몰아붙였다. 물론 두들겨 패다 보니 개인적인 감정까지 이입이 되어 힘이 조금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요 근래 묵향은 뭔가 수상쩍은 팽선의 혐의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일 짜증나는 문서를 뒤적이고 있다 보니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상태였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분명 구린 냄새가 솔솔 나는데 딱히 이거다 하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짜증은 진팔과의 비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맞는 진팔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묵향은 그동안 쌓인 짜증이 이래도 안 풀리자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를 쓰고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을 해도 시원찮을 놈이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니 쌓인 짜증이 폭발을 했다.

누워 있는 진팔이 채 일어서기도 전에 목검이 날아갔다. 이런 놈은 무공을 배우기 전에 근성부터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목검을 휘둘렀다.

“꾸에엑∼∼∼.”

그날 진팔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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