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5화 (531/930)

진팔은 침상 위에 엎어져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이 워낙 욱신거리며 쑤셔 대니 다른 잡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금창약이 안 발린 곳이 있나 살펴보자 온통 시퍼렇게 멍든 것이 자신의 몸이지만 가관이 아니다.

“끄응…, 그 새끼는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마교 교주 아니랄까 봐 어찌 그리 악독한지. 아이고, 내 팔자야.”

하소연을 해 봐야 소용도 없겠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는지라 그저 끙끙거리며 앓아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잘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과거 여자들의 가슴을 꽤나 울렁거리게 만들었을 법한 수려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사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중년 사내는 침상에 누워 있는 게 소연이 아니라 진팔이라는 것을 알자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표정은 곧 짜증 어린 것으로 바뀌었다. 금창약을 바르기 위해 웃통을 벗어 젖힌 그의 온몸은 차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푸르죽죽하게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진팔은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년 사내가 바로 자신의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임연(任燕) 사형. 그런데 여기엔 갑자기 어쩐 일로…….”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곱지 않은 어조로 물은 것이었건만, 진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도 천지문도의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중차대한 일에 어찌 손놓고 방관만 하겠습니까. 당연히 발 벗고 나선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임연은 진팔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봤다. 비록 무공이 높기는 했지만 진팔은 결코 천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있음으로 인해 천지문에 분란만 조장될 뿐이다. 절정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것은 어느 문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임연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지문의 후계 구도 때문이었다.

만약 진팔이 문주가 될 야심이 있다면, 어쩌면 임연은 진팔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봤을 때 진팔은 전혀 문주가 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문주가 될 혈통을 타고 났고,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벌어진 문파 내의 심각한 분열이었다. 장손이 문파를 이어야 한다는 고루한 원로들과, 격변하는 무림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문주의 자리를 이어야 한다는 젊은 제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으로 천지문은 지독한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

진팔은 문주가 되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렸다. 일문을 맡기에는 좀 부족한 형을 밀어내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을 따르는 젊은 제자들을 설득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주 자리를 둘러싼 내분 속에서 고민하던 진팔이 내린 결론은 훌쩍 떠나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진팔이 문파를 떠나던 날 벌어졌던 문 내의 혼란을 임연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장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비열한 수단을 써서 진팔을 내쫓았다며 소장파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 격한 대립 양상을 보인 소장파와 노장파 간의 감정의 골은 회복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그런데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던 진팔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소장파들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었지, 만약 진팔이 이곳에서 크게 위명을 떨치고 본가로 귀환한다면 잠잠했던 소장파가 절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문주직을 둘러싸고 유혈 사태로까지 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문이 그런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면, 저놈은 또다시 도망칠 게 분명하다. 마치 이 혼란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그럴 바에는 욕심 많고,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현 문주가 진팔보다 백배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임연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진팔을 썩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그이다 보니, 진팔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고을 리 없었던 것이다.

“뭐? 사문의 일에 발 벗고 나섰다고? 젠장! 너하고는 할 말이 없으니 소 사매를 불러오너라. 사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은 문주는 임연을 이곳으로 급히 파견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함이다. 임연으로서는 골칫덩이인 진팔보다 책임자인 소연을 찾는 게 당연했다.

“사저께서는 지금 여기에 안 계십니다.”

대답을 하는 진팔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임연의 질문으로 인해 소연의 생사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임연으로서는 진팔이 인상을 쓰자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사형인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기 없다고? 그럼 빨리 기별을 넣어 내가 보잔다고 전하거라.”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교주가 사저를 치료한다고 데려간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말입니다.”

임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까지 소연이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일이야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연이 부상을 입었다면 양양성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했어야지, 왜 마교 교주가 그녀를 데리고 갔단 말인가? 임연으로서는 진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교주가 소연을 데려갔다니…, 자세히 말해 보거라.”

주저하던 진팔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마교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는 임연의 표정은 점차 분노로 인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을 씻어 버리라고 파견된 자들이, 되려 마교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피해는 피해대로 입은 상태에서 이런 결과라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정파의 명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건만 전혀 무의미한 희생이 되어 버렸으니, 이걸 문주에게 어떻게 보고하면 좋을지 임연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답답한 듯 실내를 맴돌던 임연은 갑자기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젠장, 마교의 도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했어야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하면 끝이냐? 왜 쓸데없이 마교와 엮이느냔 말이다.”

임연이 계속 신경질을 내자 진팔도 끝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마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양양성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임연이 이번 전투에서 죽은 수많은 제자들과 소연의 생사에는 별 관심도 안 보이며, 문파의 평판이 나빠질 것에만 신경을 쓰니 진팔의 화가 폭발한 것이다.

“사형은 처참하게 죽은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사저가 어떻게 됐는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깟 무림의 평판이 동문들의 목숨보다, 사저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떠는 진팔의 모습에 임연은 당혹스러웠다.

“그, 그게 아니라. 내 말 뜻은 피를 흘리고도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만약 교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교주가 도와주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합니까? 사형이 한번 그렇게 해 보시죠. 씨알이나 먹혀 들어가는지.”

흥분한 진팔은 마교도들이 기거하는 숙소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놈의 교주는 저리로 가면 있습니다. 잘난 사형께서 가셔서 한번 따져 보시죠. 도움 따위 줄 필요도 없었는데 왜 도왔냐구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데려간 사저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쌓인 것이 폭발하듯 외치는 진팔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질책을 당하고 있는 임연은 적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질책을 당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는 건가? 임연은 당혹스러운 가운데 머리 꼭대기로 열기가 뻗치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사문에 큰 피해를 입혀 놓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사형에게 따지느냔 말이다.

“지금 네가 사형인 나에게 대드는 것이냐?”

“대들도록 만든 사람이 누군데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에이, 빌어먹을!”

씹어뱉듯 외친 진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임연은 절룩거리며 뛰쳐나가는 진팔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무능한 놈 같으니. 무공만 높았지 머리를 쓸 줄 모르니 저 모양이지.”

임연은 시비를 불러 차를 한 잔 내오라고 이른 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한참을 노력해야 했다. 천지문이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얼마나 노력했던가. 마교의 주구라는 소문에 노골적인 무시를 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말이다. 임연 역시 동문들의 희생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피를 흘리고도 정파로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마교의 주구라는 오해가 더욱 깊어질 듯하니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부끄러워해야 할 진팔이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다니. 임연은 너무도 불쾌했다.

차를 마시던 임연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밖에 대고 외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데리고 온 제자들 중 한 명이다.

“찾으셨습니까? 장로님.”

“너는 빨리 이번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제자를 찾아 노부에게 데리고 오너라.”

“옛.”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척 보기에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허일평(虛一平)이 들어왔다. 이곳에 파견된 1대제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임연은 질문을 던졌다. 본가에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피해 상황과 이번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전투가 벌어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망자가 얼마나 되느냐?”

허일평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망자보다는 생존자의 수가 훨씬 계산하기 쉽습니다, 장로님.”

그 대답에 임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인원이 사망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큰 피해를 당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표정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저까지 포함하여 46명이 돌아왔습니다, 임 장로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연은 뺀 숫자일 것이다.

“…….”

임연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니. 이때, 임연은 방금 전에 진팔이 왜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심한 피해를 당한 그에게 찾아와서 문파의 위명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만 떠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그중 24명은 워낙 상태가 중하여 더 이상 전장에 투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장로님.”

“도대체 어떻게 싸웠기에 그렇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단 말이냐? 상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쯧쯧, 그래 어찌 된 일인지 소상하게 말해 보도록 해라.”

“임 장로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만, 강이 가로막혀 있어 몸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허일평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과정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보고를 듣는 동안 임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천지문의 제자들은 완전히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내몰아졌다는 것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진팔의 말처럼 만약 마교 교주가 무시무시한 신위를 보여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전멸을 당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보고를 마친 허일평을 내보낸 후, 임연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은 그렇게 머리가 나쁜 사내가 아니다. 정황을 가만히 따져 봤을 때, 정파놈들은 치졸하게도 차도살인의 계책을 써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 확실했다. 아마 진팔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만큼 자신들이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본문에 보고하지 못한 듯싶었다.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천지문에 증거도 없는 심증만으로 보고해 봤자 욕만 먹을 게 뻔했지만.

“젠장, 그런 새끼들을 위해서 피 흘려 싸울 필요가 있을까?”

현 천지문의 문주인 진수는 진팔의 형이다. 그는 실리보다는 헛된 공명심(功名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동생인 진팔의 영향이 컸다. 일문의 문주로서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에게 무공에서 밀린다는 점. 그것도 문주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의 도법까지 익히고도 그 모양인 만큼,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문내의 젊은 제자들에게서 무공이 고강한 진팔을 문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판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공 말고 다른 부분에서 그가 동생보다 뛰어난 구석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뭔가 눈에 띄는 업적을 빨리 이룩해 문도들에게 문주로서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임연이 그게 집착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진팔을 그렇게 질책해 놨으니, 이 일을 어쩐다? 거참 난감하구먼.”

씁쓸한 마음에 자리를 맴도는 임연의 머릿속에는 이미 진팔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어떤 식으로 문주에게 보고를 해야 할지 복잡하기만 했다.

묵향의 풀리지 않는 분노

최근 묵향은 아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처음 팽선이 작전을 제대로 세운 것인지 조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많아질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묵향이다.

개방과 무영문, 그리고 서문세가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몽땅 모으니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문제는 그걸 조사하다 보니 뭔가 미비한 부분이 있어 그에 따른 추가 자료를 요청하게 되었고, 덕분에 챙겨 봐야 할 자료의 양은 단숨에 두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빌어먹을!”

팔자에도 없는 문서 검토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자 묵향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쭉 자료들을 훑다 보니 아무래도 팽선이 뭔가 수작을 부린 냄새가 어물어물 나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기에는 팽가를 비롯한 정파의 피해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팽가가 세운 작전을 그대로 믿기에도 뭔가 뒷맛이 찜찜했다. 팽가로 쫓아가 사실대로 불라고 몇 대 손보면 좋겠지만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묵향이지만 지금은 정파와의 협조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팽가 놈을 향해 달려가 개 패듯 패 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래저래 묵향으로서는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진팔까지 족치며 기분 전환을 꾀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젠장, 형님을 찾아가서 술이나 마실까?”

마음이 동하자마자 묵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만통음제가 묵고 있는 숙소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가다 보니 짜증보다 더한 감정이 슬슬 고개를 치밀었다.

문득 묵향은 왜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자료를 찾고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흠∼, 그런데 내가 왜 팽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증거를 찾아야 하지?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히 있잖아? 무엇보다 감히 소연을 죽음에까지 몰고 간 것만으로도 두들겨 맞아야 할 죄가 되거든.’

지금까지 묵향이 언제 증거 따지면서 살아왔던가. 물론 팽선을 아무 증거도 없이 조져 버린다면, 한동안 무림맹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언제는 그런 뒷일까지 걱정하며 화산파를 멸문시켰던가.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쓸데없이 이런 거 잡고 계속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묵향은 만통음제의 거처로 향하던 발길을 팽가가 머물고 있는 쪽으로 돌렸다. 기왕 생각난 김에 그동안 쌓인 짜증도 풀 겸, 팽선이나 가볍게 주물러 주러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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