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에서 되살아난 마교의 꿈
하북팽가의 장로 팽선이 마교 교주에게 묵사발이 난 사건으로 인해 곤혹스럽기는 서문세가의 가주, 벽력도객 서문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림맹에서 회답이 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전령을 보냈으면 빨리 답변이 와야 할 거 아냐!”
서문길의 질책에 총관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무림맹까지의 거리가 있는데, 어찌 그리 빨리 회답이 오겠습니까. 최소한 1주일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서문길은 도저히 짜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꽝!
“젠장, 우르르 몰려와서 별의별 헛소리를 다 해 대는데, 그걸 앞으로 1주일은 더 참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냐?”
서문길은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팽선 사건이 벌어진 직후, 양양성에 있는 한다하는 명숙들이 모두 다 그를 찾아와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 옳은지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모두 다 중구난방이라는 데 있었다.
교주의 횡포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마교와 싸울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심지어 그동안 팽선이 거들먹거리던 것이 눈꼴시렸다고 묵사발 난 게 고소하다며 씹어 대는 사람까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마교 교주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주제에 자신에게만 몰려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으니, 서문길로서는 울화가 치밀 만도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배분이 딸린다는 점도 있었지만, 마교와 관계된 일에 앞장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처럼 막강한 문파와는 될 수 있으면 개인적인 원한은 지지 않는 게 상책이다. 정과 사로 나뉘어 싸울 때야 대충 세력전을 하는 선에서 끝날 수가 있지만, 문파 대 문파가 된다면 마교와 싸워 살아남을 수 있는 문파는 단 하나도 없다. 화산파 같은 대문파도 하루아침에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서문길은 이 모든 걸 무림맹에 떠넘긴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말고 교주와 만나 얘기라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답답한 소리! 무림맹에 기별을 넣은 이상, 맹의 결정에 따라야지. 내가 교주와 만나 얘기를 나눈다고 해서, 무슨 해결 방안이 생기겠는가? 자칫 그 불똥이 우리 가문에 튀면 어쩌려고 하는가. 생각 좀 하고 말을 하게!”
서문길의 질책에 총관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서문길도 서문길이었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명숙들을 상대해야 하는 총관 역시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아버님이 계셨어야 하는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서문길은 아버지인 수라도제를 떠올렸는지 살짝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 가 버린 수라도제지만 서문길은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의 벽을 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무공을 연마하다 보면 어느 순간 벽을 느끼게 되고, 그 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무공이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된다.
화경의 고수가 벽을 넘는다면 현경이지 않겠는가. 만약 서문길의 바램처럼 수라도제가 현경의 고수가 된다면 무림사가 요동을 칠 게 분명했다.
* * *
양양성의 서문길로부터 긴급 보고를 접수한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다급히 모여 대책 회의를 가졌다. 아직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한 것이 아니었기에 회의를 주재한 것은 맹주가 아니라 그의 오른팔인 청호 장로였다. 사실, 아직 정확한 내막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맹주가 직접 나서서 회의를 주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교주가 그런 짓을 한 저의(底意)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수개 장로.”
청호 장로의 질문에, 공수개 장로는 대답하기가 몹시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글쎄올시다. 아직 본방에 요청해 놓은 정보가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렇다면 언제쯤이면 정확히 알 수 있겠소이까?”
“그건 저도 잘…….”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백량 장로가 답답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개방만 믿고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무영문 쪽에도 정보를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공수개 장로는 그 말을 꺼낸 백량 장로를 확 째려보기만 했을 뿐, 뭐라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 개방보다 무영문의 정보의 질이 좋다는 것은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무영문 쪽에는 이미 부탁해 뒀소이다.”
청호 장로가 대답했지만 백량 장로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주절거렸다. 골수까지 정파인 백량 장로인지라 처음부터 마교와의 협력 관계를 반대했다. 금나라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대세에 밀려 입을 다물고 있던 그에게 이번 사건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가 있겠소이까? 보나마나 마교 놈들이 이번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연극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건 아닐게요. 그자는 장인걸과 철천지원수지간이 아닙니까? 원수를 갚으려면 본맹과 힘을 합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그자도 잘 알 텐데, 뭣 때문에 동맹을 파기하는 행동을 했겠습니까?”
그래도 백량 장로는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글쎄요. 아마 장인걸 쪽에서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청호 장로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간의 원한을 잠재울 만한 매력적인 제안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제안이라니요.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놈이 어떤 제안을 한다고 해도 교주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거외다. 서로 간에 쌓인 원한이 얼마나 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자, 생각들 해 보시오. 마교가 지금껏 꿈꿔 온 것이 바로 무림일통(武林一統) 아니겠소? 장인걸은 그 꿈을 이뤄 줄 능력을 지니고 있소. 그놈이야 천하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테니, 무림쯤은 뚝 떼어 마교에 줘 버릴 수도 있을 거 아니오.”
그 말이 그럴듯한지 청호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를 처음부터 자신들과 같은 정파의 인물들처럼 생각했기에 제안의 답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파의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말이 되었다.
“허어∼, 그것 참. 그럴 수도 있겠구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다. 처음 장인걸은 자신만의 힘으로 황실은 물론이고 무림을 몽땅 다 자신의 발아래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몰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정과 사가 일치단결하여 황실을 돕자, 의외로 무너뜨리기가 힘들어졌다. 이때, 그가 꾀를 낸다. 둘 중 하나를 꼬셔서 자신과 같은 배를 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마교의 배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청호 장로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백량 장로를 바라본 청호 장로는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자신의 말이 먹혀 들어가자 백량 장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떠들었다.
“흑살마왕이나 암흑마제나 결국은 한 뿌리에서 나온 상종 못할 쓰레기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믿고 일을 벌인 게 크나큰 실수외다. 그래서 내가 그 잡종들과 동맹을 맺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거요.”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청호 장로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소리쳤다.
“자자, 조용히들 하십시다. 아직까지는 암흑마제가 배신을 한 건 아니오. 하북팽가가 큰 피해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막무가내로 일을 벌인 건 아니고 다른 이유를 댔다고 하지 않소이까?”
기세를 탄 백량 장로는 탁자를 쾅 소리 나게 치며 소리쳤다.
“흥, 천지문 말씀입니까? 겨우 그따위 하찮은 이유로 팽가를 묵사발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놈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본맹을 하찮게 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뭔가 그에 합당한 응징을 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맹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너무 과격한 주장에 청호 장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백량 장로를 바라봤다. 만약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나면 백량 장로의 말처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를 모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먼저다.
무림맹의 수뇌부라는 사람이 지혜를 모아 이 사태를 풀 생각은 없고, 무작정 무력을 통한 응징만 주장하고 있으니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청호 장로로서는 답답했던 것이다.
“응징을 가하자구요? 그렇다면 고수들을 투입하여 이 사건의 주모자인 암흑마제의 목을 베자는 말입니까? 아니면 팽가가 박살 난 만큼의 피해를 마교 쪽에 가하자는 겁니까? 참, 팽선이 폐인이 되었으니, 지금 양양성에 와 있다는 그 흑풍대주를 폐인으로 만들면 되겠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만약 진짜 그런 일을 벌인다면, 마교와 정파는 또다시 피를 피로 씻는 전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금나라라는 오랑캐를 코앞에 두고 말이다.
백량 장로 역시 머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비꼬는 듯한 청호 장로의 말에 대답을 하기 난처해지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소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 이따위 일로 마교와 반목해 봐야 결국 그들과 결별하는 결과만을 만들게 되지 않겠소? 오랑캐들과 대전을 치를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마교와 사이가 안 좋아져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소.”
이대로 꼬리를 말기엔 백량 장로 역시 싫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마교의 행동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덮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이 일을 벌인 암흑마제의 의도가 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그가 장인걸과 몰래 손을 잡은 것만 아니라면, 지금은 놈을 잘 달래서 써먹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리고 그 울분은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 두고 계시다가 전쟁이 끝나면 마음껏 푸시구려. 그게 좋지 않겠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공수개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청호 진인의 말씀이 옳은 듯 합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마교를 관찰해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길인 듯싶군요.”
공수개 장로까지 나서자 백량 장로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면서도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팽가나 팽가와 친분을 맺고 있는 다른 문파들이 이 일을 어찌 받아들일지…….”
그 일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청호 장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잠시 참아야 했다.
“그쪽은 그쪽대로 따로 손을 써야겠지요.”
잠시 궁리를 하던 청호 장로는 백량 장로의 옆에 앉아 있는 만수 장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수 장로.”
“예, 말씀하십시오, 사형.”
만수 장로는 무당파 출신으로서 청호 장로의 사제이기에 공식석상임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존대를 쓴 것이다.
“자네는 팽가주에게 가서, 봄이 되어 전쟁이 재개되면 마교도들을 가장 앞에 세워 막대한 피를 흘리게 만들 테니 지금은 노화를 풀라고 설득 좀 해 주게.”
무림맹의 수뇌부 중 가장 팽가주와 허물없이 지내는 이가 만수 장로이기에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공수개 장로가 조언을 던졌다.
“팽가의 경우 하북에서 쫓겨나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맹에서 약간이라도 지원을 해 준다면 팽가주가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호오,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려.”
어느샌가 대책 회의의 방향이 마교에 대한 보복에서 팽가주를 어떻게 달래느냐 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