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2화 (53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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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을 떠난 묵향과 만통음제는 관도를 따라 의창(宜昌)까지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 장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강삼협(長江三峽)의 장관이다. 경치만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배라도 한 척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유람이 되겠지만, 묵향은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옥화무제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에 시간 내에 만현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창에서 만현까지 육로를 이용해 달려갔다. 그 길은 절벽의 중간을 뚫어 내놓은 것이었기에 경치는 멋있을지 몰라도, 담이 작다면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한 가닥 길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절벽이요, 그 반대편은 천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 싯누런 흙탕물이 마치 황룡이 용트림이라도 하듯 웅장한 기세로 흘러간다. 절벽 위쪽에서 작은 돌조각이라도 아래로 떨어지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운 것이 사실이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한순간에 잊혀질 정도로 황홀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습니까, 형님. 꽤 근사하죠?”

풍류를 즐기는 만통음제인 만큼, 중원 곳곳에 경치가 좋다는 곳치고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물론 여기도 몇 번씩이나 와 봤었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지만 묵향의 표정을 바라보니 그는 이곳에 처음 와 본 듯했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 만통음제는 마치 이곳에 처음 와 본 듯 장단을 맞춰 줬다.

“호오, 정말 아름다운 곳이로구먼. 그런데 동생은 이런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나?”

경치를 둘러보며 흡족해하는 만통음제의 모습에 묵향도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마교의 정보 조직도 때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하 놈들 보고 양양성 근처에 경치가 괜찮은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여기를 권하더군요. 관지 녀석의 말로는 처음 시작되는 경치가 그러니까 뭐라더라? 하여튼 그런 게 있는데, 세 가지 경치가 순서대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라 어떤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대로 시간 내서 구경해 볼 만은 하죠?”

묵향다운 말에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 지으며 절경을 감상했다. 사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곳이 서릉협(西陵峽)의 절경이고, 계속해서 무협(巫峽)과 구당협(瞿塘峽)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인들이 붙여 놓은 그런 명칭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위의 경치에 반응하여 가슴 가득 솟구쳐 오르는 이 진한 감동이 더욱 중요한 것이거늘.

더군다나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자신을 위해 마교의 정보 조직까지 움직인 것 같아 그 마음 씀씀이에 만통음제의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다.

“세 가지 경치면 어떻고, 여섯 가지 경치면 어떤가? 이 아름다운 경치보다 훨씬 좋은 동생이 있는데 말일세.”

말을 잠시 멈춘 만통음제는 품속에 손을 넣어 술병을 꺼내며 환히 웃었다.

“허허, 그리고 여기 술이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

“물론입니다, 형님.”

두 의형제는 호탕하게 웃음과 술, 그리고 서로 간의 추억을 나누며 만현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점쟁이와 사이비 도사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민심이 워낙 흉흉한 데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사이비 도사나 점쟁이에 의지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금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여 약탈을 벌이는 바람에 크나큰 곤욕을 치룬 하남성의 대도시들 중 하나인 낙양(洛陽).

과거에 일어섰던 대 제국들의 황도였던 낙양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하고 화려했다. 그런 낙양의 뒷골목에는 수십, 아니 수백 군데가 넘는 점을 쳐 주는 점집이나 도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 바로 태을복술원(太乙卜術院)이다.

태을복술원을 운영하는 태을진인(太乙眞人)은 화산에서 수십 년 동안 도를 닦아 천기를 읽고, 인생의 길흉화복을 빤히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낙양의 고위 관료들도 점을 치기 위해 줄을 설 정도라는 그는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점괘를 뽑지 않는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태을복술원에 들어가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손님들이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은 넓은 방에 앉아 향긋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계집종이 다가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태을진인의 방에 들어가면 방 한쪽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원시천존의 족자가 걸려 있고, 한 손에는 불진을 든 태을진인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주역과 산통이 놓여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산통 옆에 지필묵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을진인이 말을 건네자 손님으로 들어온 중년 부인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일반 점집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이다. 형형색색 무서운 귀신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도배된 벽에 위압적인 모습으로 지성을 보이라는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도를 닦아서인지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을 훔쳐보며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낀 중년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딸아이에게 맞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궁합이 어떤지…….”

태을진인은 붓에 먹물을 듬뿍 찍으며 다시 물었다.

“상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태을진인은 선이 들어온 상대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각은 물론이고 상대가 거주하는 주소까지 꼼꼼하게 계속 질문하며 기록해 나갔다. 어느 정도 질문이 끝나자 기록된 종이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따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길일을 택해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점괘를 뽑아야 하기에 10일 정도 후에야 점괘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년 부인은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반 점집은 방울 몇 번 흔들고, 정성부터 보이라며 돈을 요구하는 게 관례인데 태을진인은 뭔가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딸아이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길일까지 택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점을 치겠다니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저, 복채는 얼마나 드려야 할지…….”

불진을 흔들며 눈을 감고 있던 태을진인이 그 말에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허, 도를 깨쳐 부귀영화가 한줌의 티끌처럼 보이는 빈도에게 복채라는 말을 하시다니……. 속되고도, 속되도다. 무량수불.”

그 말에 황급히 중년 부인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 좁은 여인네의 말인지라 새겨듣지 마시고, 진인님의 도력에 감복하여 저의 정성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때서야 태을진인의 찌푸려졌던 안색이 조금 펴졌다.

“무량수불, 부인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밖으로 나가시면 총관이 있으니 그에게 말씀하시지요.”

중년 부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중년 부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태을진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방금 전에 기록한 봉투를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고 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자리에 걸터앉은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점 한 번 보는 데 얼마라고 말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수작이다. 점집이나 도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군데를 다녔겠는가. 척 봐서 돈푼 꽤나 있게 생긴 사람들은 적당히 그럴듯한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 물론 날로 그냥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밖의 총관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방금 나간 중년 부인은 앞으로 자주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태을진인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다음 손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호화로운 복장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인이 자리에 앉자 태을진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왕 대인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점괘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차, 얼마 전에 친 점괘를 받으러 오셨군요.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자리 옆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수백 통이 넘는 봉서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태을진인은 빠르게 봉서들을 뒤져 왕대인의 것을 찾아냈다. 물론 왕대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여진 서랍 안이었다.

“허허, 점괘가 아주 잘 나왔습니다. 왕대인의 운이 이제야 상승세를 타는가 봅니다. 무량수불.”

점괘가 잘 나왔다는 말에 왕대인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봉서를 받아 든 왕대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낙양 인근에서 가장 신용도가 뛰어나다나는 낙양전장에서 발행한 은자 50냥짜리 전표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허허, 뭘 이런 것을…….”

“태을진인께서 애써 점괘를 잘 뽑아 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점잖게 사양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태을진인은 어느샌가 탁자 위에 놓인 전표를 집어 품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봉서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 점을 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태을진인은 봉서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본 후,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 경우는 길일이 언제일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일단 오늘 밤 천기를 짚어 본 후, 점괘가 나오면 그때 댁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복채(卜債)는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허허, 이 바닥의 가격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점괘가 잘 맞는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그 말에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전표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점괘의 선금 은자 천 냥이오. 점괘가 흡족하게 잘 나온다면 잔금으로 은자 천 냥을 더 드리겠소.”

은자 천 냥이면 동전으로 따졌을 때 무려 19만2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태을진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왕대인이 바로 앞에 앉아 있기에 그 정도 감정 표현에 그쳤던 것이다.

“호오, 잘 알겠습니다. 왕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확실하게 점괘가 나오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용건이 다 끝나자 왕대인은 지체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태을진인은 봉서에 왕 대인의 이름을 기록한 후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큰 건이 걸렸기에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밖을 향해 다음 손님을 모시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며 새파랗게 질린 시종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웬 손님께서 진인을 뵙겠다며 막무가내로, 큭!”

이때, 웬 커다란 손이 나타나 시종의 머리통을 붙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우당탕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한의 얼굴을 본 태을진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재빨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총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게. 오늘 영업은 끝이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태을진인은 문밖으로 나가 나뒹굴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곧 차를 내오고, 총관에게 말해 주위에 사람들이 얼씬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을 하라 전하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은 태을진인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후다닥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예, 나으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태을진인이 방 안으로 돌아와 보니 장한은 거대한 도(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라도제 대협.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왕림하셨는지……?”

질문을 던지는 태을진인의 목소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기로 수라도제는 양양성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있는 수라도제는 또 누구란 말인가?

무엇보다 중원 무림을 움직이는 거물과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을진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낙양에 들렀을 때, 무영문에서 파견 나와 있던 인물이 혹시 연락할 사항이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된다고 했기에 찾아왔네.”

“아, 예. 그렇다면 무슨 점을 치시…, 죄송합니다.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태을복술원은 무영문이 정보를 사고팔기 위해 천하에 깔아 둔 지부 중 하나였다. 물론 점을 치는 시늉을 하며 점괘를 뽑아 주는 것도 무영문의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해 주는 것이다.

“노부는 소림사 내부의 정확한 건물 배치도를 원하네. 그리고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들어갈 수 있는 침입로도 알려 주면 고맙겠군.”

여기까지 말한 수라도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을진인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래 이 정도를 알아보려면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수라도제의 짓궂은 질문에 태을진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참회동까지 들어가기 위한 침입로라니……. 설마 소림사의 담이라도 넘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점쟁이를 상대로 하니 확실히 말하기 편하군. 내 의중을 그렇게 빨리 알아채는 것을 보니 말일세. 그래, 언제까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는데.”

그 말을 듣자 뭘 떠올렸는지 태을진인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직접… 가실 겁니까?”

“물론.”

“월담하지 않으셔도 대협의 신분이시라면 충분히…….”

“전에 월담을 했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그런 조언은 해 줄 필요가 없네.”

덤덤한 수라도제의 말에 태을진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천하의 수라도제가 소림사의 담을 넘었다가 붙잡혔다니 누가 그걸 정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태도였다. 이렇게까지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아무리 소림사라고 하지만, 대협께서 월담하시는 것을 알아채다니……. 정말 놀랍군요.”

수라도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세. 방장실 근처를 통과하는 침입로를 택한 노부의 멍청함 때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장실 근처가 소림사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니 말이다.

태을진인은 잠시 망설였다. 정보를 제공해야 하나? 아니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나? 만약 소림사 내의 침입로를 자신이 가르쳐 줬다는 것을 소림사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천하 무학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와 척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수라도제가 어떤 의도로 소림사의 담을 넘느냐 하는 것이다. 좋게 끝날 일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피를 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영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을진인은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의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의자 뚜껑 안에다가 머리통을 집어넣기라도 할 듯 가까이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이봐! 소림사 내부 배치도 한 장 올려 보내 줘. 대충 그려 놓은 걸로 말이야.”

그러자 놀랍게도 의자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부 배치도는 뭐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려 보내!”

잠시 후, 의자 안쪽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이 튀어 올라왔다. 아마 의자 밑의 구멍을 통해 지하 밑쪽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태을진인은 그 종이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쭉 펼쳤다. 소림사 내의 건물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배치도였다. 태을진인은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어떤 방향으로 침입하면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갈 수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기 때문인지 수라도제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지도를 잘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을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신신당부했다.

“한 가지 꼭 지켜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드린 정보가 무영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발설치 말아 주십시오.”

“염려하지 말게, 노부도 그 정도는 잘 아니까. 그나저나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는가?”

태을진인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소림사 건물 배치도 한 장을 나눠 준 것이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원본도 아니고 사본 한 장인데, 뭐가 그리 소중하겠는가. 이런 거물을 상대로 어설프게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빚으로 만들어 두는 게 훨씬 좋겠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고맙게 받겠네. 선물에 대한 보답은 다음에 꼭 하도록 하지.”

용건이 끝나자 수라도제는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수라도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태을진인은 긴장감이 풀리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튕기듯 일어난 태을진인은 의자 뚜껑을 열어젖히고 밑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봐, 문주님께 전할 특급 정보다.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

“뭐? 수라도제가 소림사에는 왜?”

“나도 몰라. 월담을 한대.”

“……!”

더 이상 밑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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