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4화 (540/930)

옥화무제가 돌아간 뒤, 묵향은 그녀가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골치만 아파질 뿐…….

묵향은 양양성에 돌아가는 대로 군사에게 연락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에 대한 해답을 만통음제로부터 얻어 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만통음제는 운기조식을 한 후, 묵향과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슬쩍 물어봤다.

“무림맹에서 곤륜파로 꽤나 거물을 파견한 모양이던데, 무슨 일이라고 형님은 생각하십니까?”

“거물이라…, 무림맹 장로급 정도의 핵심을 말하는 건가?”

“예, 대충 그 정도인 모양입니다.”

묵향의 대답에 만통음제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다른 문파라면 몰라도 곤륜파에 그 정도 거물을 파견한 게 사실이라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

“어떤 일 말입니까?”

“곤륜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림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 말일세.”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십니까? 곤륜파야 오랜 옛날부터 무림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강인한 문파였는데요.”

만통음제는 손까지 내저으며 묵향의 말을 부인했다.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전혀 그렇지 않아. 곤륜파는 그 규모와 전력에 비해,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 그 이유가 뭐겠나?”

그건 묵향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인 제공을 한 게 다름 아닌 그가 몸담고 있는 마교였으니까. 십만대산에서 가장 가까운 정파의 거대문파가 곤륜파다. 그렇다보니 곤륜파와 마교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마교가 무림일통을 외치며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당하는 문파 역시 곤륜파였다.

물론 잃는 것이 큰 만큼, 얻는 것 또한 많다. 곤륜파만큼 마교의 무공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문파도 없었고, 고수들 간의 실전 경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곤륜의 도사들은 마교도들과 싸우며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쭉정이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형국이다 보니, 곤륜파는 살아남는 데 급급해서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무당파에 버금가는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도 9파1방에 끼지도 못했을까.

“그야 당연히 본교 때문이죠. 맨날 우리한테 줘 터진다고 다른 데 한눈 팔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걸세. 그래서 그런지 곤륜파는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지. 다른 문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일 뿐더러, 그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곤륜파는 오래전에 멸문당했겠지. 문도들의 평균 수명이 곤륜파만큼 낮은 문파도 없으니 말이야.”

묵향은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끈질기기가 바퀴벌레보다 더한 놈들이죠. 본교에게 그토록 오랜 세월 짓밟히고도 살아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곤륜파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그 이유를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본교에서 건드리지 않으니까 힘이 남아도나요?”

되는대로 말한 거였지만,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만통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이토록 흥미를 보이며 경청하자 설명해 줄 맛이 났던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요 근래 수십 년 동안 마교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냈고, 그 덕분에 소모전을 한 번도 치루지 않은 곤륜으로서는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 버린 거지.”

“흐음…,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곤륜파가 남아도는 힘을 바탕으로 중원으로 그 세력을 넓혀 올 거다, 이 말씀이로군요.”

“그렇지! 동생 말이 맞아. 하지만 곤륜은 정도를 걷는 것으로 알려진 문파가 아닌가? 그런 만큼 생각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겠지. 다른 문파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자면 아무래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우리는 댁들의 영역을 침범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이런 명분을 무림맹이 제공해 준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호오, 얘기가 그렇게 연결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곤륜에 사람을 보냈다는 게 바로 곤륜이 밖으로 나올 명분을 제공한다는 거로군요.”

“이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구먼. 물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정확하게 드러나겠지만 말일세.”

“흠, 곤륜파라…….”

예정에도 없던 곤륜이라는 거대 문파의 개입이 현 전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묵향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묵향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상 진회의 눈물

묵향이 만통음제와 예정에 없던 유람을 하고 있을 때, 대송제국의 재상 진회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 물론 그의 경우는 유람이 아니라 지방 순시를 위해 남쪽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망해 가는 제국의 재상이라고 해도,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분이다. 그렇기에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황도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행하는 무리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문관들을 중심으로 잡일을 맡을 시종들, 몇십 대에 달하는 수레, 거기에다가 이들의 호위를 담당할 5백에 달하는 병사들까지. 지방 순시를 위해 움직이는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것은 바로 악비 대장군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절강성(浙江省)의 항구도시인 항주(杭州)를 둘러볼 목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자리 잡고 있는 남경보다는 항주 쪽이 금나라의 침입으로부터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근시일 내로 항주로 천도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악비를 피할 겸 항주를 직접 봐 두려는 것이었다.

분명 악비는 오랜 시간 양양성을 비워 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남방을 순시하며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게 악비의 상경 소식을 듣고 밤새워 그가 생각해 낸 가장 원만한 대처법이었다.

자신은 재상이지만 상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병권을 쥐고 있는 장수다. 뭔가 타협의 여지라도 있다면 만나서 대화를 해 보겠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런 경우 그를 없애 버리는 것이 제일 좋을 수도 있겠지만, 진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를 없앤 후의 뒤처리도 문제였지만, 진회는 악비를 아꼈기에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는 행렬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편이 그를 경호하기에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길가에는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궁핍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관도(官道) 주변에 늘어서 있는 집들의 굴뚝에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행렬 앞쪽에서 일행을 선도하고 있던 박 교령이 말을 몰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박 교령은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와 나란히 가도록 말의 고삐를 조종하며, 창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회를 향해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다음 마을에서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이 지방 태수가 이미 대인께서 편히 묵어가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하게.”

“옛, 대인.”

박 교령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행렬의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마을에 마련된 숙소에서 진회는 간소하게 식사를 마친 후, 박 교령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사옵니까?”

“들어오게.”

박 교령이 들어오자 진회는 주변을 재빨리 살펴본 다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 태수는 아주 유능한 인물인 모양이야.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

박 교령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장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은 큰 차이가 있지. 귀관은 내가 비밀리에 그들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방책을 강구해 보게.”

순간 박 교령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암행(暗行)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진회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어디선가 그의 귓가로 가느다란 목소리를 보내왔다.

<그건 안 됩니다, 대인.>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않고 마치 상대가 자기 눈앞에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나는 할 걸세.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제대로 된 선정을 베푸는 첫 번째 태수일세.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백성들을 위해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 심지(心地)가 곧은 소중한 인재를 여기에서 썩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태수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직접 그가 백성들을 위해 행한 일들을 살펴보고, 백성들에게서 그에 대한 평가를 들은 연후에야 그를 제대로 알 수가 있을 걸세. 짧은 시간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제가 그 일을 대신해 드리겠습니다.>

“내 자네를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중차대한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네. 만약 제대로 된 인물이라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황도로 불러들여 중용할 생각이니 말일세.”

<저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사형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사내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박 교령은 진회에게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자, 초조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회에게 물었다.

“정말 암행을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소중한 인재일세.”

박 교령은 진회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느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정 그러시다면 암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진회는 박 교령이 차출한 20여 명의 날랜 병사들과 함께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박 교령은 자신이 직접 진회의 호위를 맡고 싶었지만, 그는 호위대의 대장이었기에 오히려 타인들의 눈에 잘 띄게 행동해야 했다. 만약 그가 빠져나간다면 진회의 암행이 곧바로 들통 날 게 틀림없다.

그에 비해 진회는 신분이 워낙 높았던 터라 감히 그를 만나겠다고 찾아올 만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진회가 만나기 싫다고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그에게 접근해 올 수 있는 인물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 정도다. 진회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순시 행렬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암행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소에서 진회 일행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는 의문의 그림자들. 몸에 착 감기는 흑색 암행복으로 전신을 감싸고, 두건까지 쓰고 있는 괴한들이다.

“사형,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저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정말 실력 있는 자가 재상의 목숨을 노린다면, 겨우 5백밖에 안 되는 허접한 병사들을 염두에나 두겠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오히려 이건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는 한 복면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현청(縣廳)으로 가서 동정을 살펴라. 과연 그가 기대한 대로 청렴한 관리인지 자세히 확인하란 말이다.”

“옛, 사형.”

지시를 받은 복면인은 현청 쪽으로 달려가 버렸고, 남은 자들은 은밀하게 진회의 뒤를 밟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에 대비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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