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7화 (543/930)

“대장,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수하의 목소리에 임충은 억지로 눈을 떴다. 새벽녘까지 퍼마신 술이 아직까지도 그의 뒷골을 울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구, 머리야.”

임충은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주전자가 텅 빌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자 그제야 겨우 좀 살 것 같다.

“무슨 일이냐?”

“소진(蘇振) 교령이 대장을 찾습니다.”

소진 교령이라면 이번에 악비 대장군을 수행하고 황도에 온 장수들 중 하나다. 양양성으로 출발하는 날이 정해지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악비가 볼일을 모두 마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꽤 오래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돌아가나?”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수하와 함께 서 있는 소 교령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넓은 근육질의 몸매라서 그런지 푸른색의 전포(戰袍)가 아주 잘 어울렸다.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그의 사나운 눈매 때문에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황도까지 같이 오는 동안 몇 번 말을 섞어 보니 꽤나 괜찮은 사내였다.

임충은 소 교령을 보자 히죽 웃으며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득득 긁었다.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몸이 찌뿌둥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구려, 소 교령. 같이 해장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소 교령은 창백한 안색으로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임 대인.”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소 교령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임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행방불명되셨소이다.”

너무나도 충격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상대의 말을 믿기 힘들었던 것일까? 임충은 멍한 눈으로 소 교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농담도 아주 과격하게 하시는구려.”

‘생긴 것만큼이나’라는 말이 생략된, 임충의 농이었다. 하지만 소 교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농담이 아니올시다. 대장군께서는 어제 오후에 10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입궁하신 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시단 말이오.”

“오랜만에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늘어지게 술이라도…….”

말을 하는 임충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악비 대장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소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주셨을 것이오.”

창백한 소 교령과는 달리 임충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대송제국의 심장부인 황도다. 그리고 악비 대장군은 대송제국을 지탱하는 실세 중의 실세가 아닌가. 오랜만에 입궁한 악비 대장군에게 잘 보이려고 당연히 사람들이 줄을 설 테고, 그러다 보면 연락을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황궁에 사람을 보내 보면 알 것 아니오. 어제 대장군은 누구를 만나러 입궁하신 거요?”

“병참감 왕천(王仟) 장군을 만나러 가셨소. 봄에 공급해 줄 보급품 문제 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으니, 양양성 사정에 밝은 고위급 장교를 보내 달라고 왕 장군에게서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오. 대장군께서는 그런 일이라면 당신께서 직접 왕 장군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며 입궁하셨소.”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냐는 듯 임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병참감? 그렇다면 그자에게 가서 문의해 보면 알 수 있겠구려. 대장군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본관은 방금 전에 왕 장군과 만나고 오는 길이외다. 괴이하게도 왕 장군은 대장군을 만난 적도 없을 뿐더러, 대장군께 사람을 보낸 적도 없다고 말씀하셨소.”

임충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군. 그렇다면 왕천이라는 자가 보냈다는 심부름꾼은 어디에 있소?”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행방이 묘연하오.”

그제야 임충은 사태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젠장,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인심 쓰는 척하면서 마화에게 양보하는 거였는데…….’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한동안 끙끙댔지만,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책임자는 자신이다. 할 수 없이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자 방금 전에 소 교령을 안내해 온 수하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봐, 백인장보고 이리 오라고 해.”

“존명!”

얼마 지나지 않아 제11백인대장 왕덕(王德)이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천인장님.”

임충은 왕덕에게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빨리 대장군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누군가 대장군을 접대한다고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남경 안의 제법 이름 있다는 술집은 몽땅 다 샅샅이 뒤져 보란 말이다.”

“옛.”

“대신 대장군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내색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알겠나?”

“수하들에게 주의시키겠습니다.”

“그리고 혹 사람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연락을 보내 자네 백인대의 남은 인원 50명도 이리로 합류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왕덕을 내보낸 후, 임충은 소 교령에게 말했다.

“자네는 그 심부름꾼을 찾아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찾아내야 해. 알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임 대인.”

소 교령까지 황급히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은 임충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마름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그의 속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대장군은 과연 납치된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누군가 고위급의 인사와 은밀한 곳에서 만나 밀담을 나누고 있을까?

‘하루! 하루 동안 전력을 다해서 찾는 거야.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교주님께 연락을 넣는 수밖에.’

내심 그렇게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찝찝했다. 괜히 실종되었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악비 대장군이 어디선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나면 자기만 교주에게 왕창 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젠장, 아주 재수 더럽게 걸렸어.”

그렇게 말하는 임충의 안색은 마치 소태라도 씹은 듯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 * *

순시 행렬이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南昌)을 이틀거리쯤 남겨 놓았을 때 진회는 행렬에 합류했다. 몰래 빠져나간 것이었기에 다시 합류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 교령에게 연락을 넣자, 그는 인근에서 가장 큰 주루(酒樓)의 이름을 알려 주며 그곳에 준비를 해 두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곧이어 가짜 재상의 화려한 행차가 원청루(園淸樓)를 향했다. 재상께서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원청루에 들러 가벼운 다과를 즐기며 경치를 감상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병사들이 원청루 주변을 완벽하게 에워싼 후,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그런 다음 원청루 안을 샅샅이 뒤져 그곳에 있던 손님들까지 모두 내보냈다. 그런 소란 통에 가짜가 진짜로 교체되었고, 재상을 따라 밖으로 나가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20여 명의 병졸들도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화로운 관복으로 갈아입은 진회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암행 순시를 해 본 결과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굶주려서 뼈만 남은 유랑민, 식량이 없어 자식들을 팔아 버린 부모, 어떤 곳은 심지어 서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기까지 했다. 전쟁의 와중이라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진회가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시종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섭 대인이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섭평(聶平)이라면 중서(中書)에서 재상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존재다. 즉, 재상 진회가 황성을 비운 지금, 그가 가장 강력한 실권자라는 말이다.

“섭평이? 그래,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대인께 독대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독대를? 이상한 일이군. 심부름을 온 자가 독대를 청하다니…….”

무슨 일인가 하여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경치 구경을 핑계로 여기 와 있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자에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예, 곧바로 사람을 보내겠사옵니다.”

원청루는 3층으로 이뤄진 큰 규모의 주루였다. 진회는 3층에 자리를 잡은 뒤 간단한 요리와 술을 들었고, 1층과 2층은 병사들이 자리 잡고 일절 잡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상태다. 그런 만큼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나이 지긋한 문관이 올라왔다. 진회는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자는 바로 섭평의 총관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진회는 눈짓을 하여 병사에게 나가 보라고 지시한 후, 총관을 반겨 맞이했다.

“자네는 이 총관이 아닌가. 그래, 무슨 일로 독대를 청했느냐?”

“예, 섭 대인께서 이 서신을 재상께 급히 전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이 총관은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봉서를 꺼내어 진회에게 바쳤다. 서신을 전하는 데 자신의 가장 충복이라고 할 수 있는 총관을 보낸 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진회는 봉서를 뜯은 후, 재빨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사실이냐?”

하지만 이 총관은 고개만 더욱 깊게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봉서 안의 내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서 섭평에게…….”

진회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총관을 통해 구두로 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밖에 대고 외쳤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시종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그는 섭평에게 전할 내용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서찰을 단단하게 봉인한 후, 이 총관에게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자네는 지금 즉시 달려가서 이것을 섭평에게 전하게. 최대한 빨리 전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하겠사옵니다.”

이 총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인을 모시면서 지금처럼 동요하고 계신 모습은 처음 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도에서 보내온 급전일세.”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했습니까?>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은 곧 금군이 재차 군사를 일으켜 쳐 내려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이 말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내 소문을 들으니 무림에 적을 둔 인물들은 경공술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익혀 말보다도 빨리 달린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가?”

<단거리만을 달린다면 말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겠지만, 장거리를 달리면서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휴∼ 그렇다면 이 총관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하는가?”

<대인께서 방금 전에 경공술에 대해 물으신 것이 혹시 서신을 얼마나 빨리 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였네.”

<그것이라면 이 총관보다 최소한 4일 먼저 황도에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회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일을 벌 수 있다니…….

“그게 사실인가?”

<예, 저희들은 말이 달리지 못하는 지름길을 달려갈 수 있으니까요.>

“그럼 내 자네에게도 서신을 부탁해야겠구먼.”

진회가 서둘러 밀서를 한 통 작성하자마자, 어디선가 흑의복면을 한 인물 하나가 흡사 바닥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하듯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참지정사 섭평에게 전하게.”

“예.”

흑의복면인은 밀서를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은 후 진회에게 물었다.

“이걸 섭 대인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최대한 빨리 전해 주기만 하면 되네.”

“예,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진회를 경호하기 위해 이곳에 배치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경호대주가 직접 그 밀서를 품에 지니고 황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경공 실력이 가장 뛰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