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8화 (544/930)

섭평에게 밀서를 보낸 후, 진회는 박 교령을 불러올렸다. 박 교령은 재빨리 달려와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대인.”

“지금 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남은 모든 일정은 취소하도록 하고.”

“예? 황도로 말씀이시옵니까?”

갑작스런 진회의 명령에 박 교령은 당황한 듯 물었다. 하지만 곧이어 냉정을 되찾은 그는 진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바로 돌아가시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평소의 박 교령답지 않게 간곡하게 청해 오니, 진회로서도 그걸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남창이 바로 코앞이옵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성주(省主)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예가 아닐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듣자 진회는 난감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각 성(省)을 맡고 있는 성주들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강서성주(江西省主) 조권(趙權)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지닌 황족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찜찜한 인물인 것이다.

더군다나 조권은 재상이 순행 온다는 통지를 받고 지금쯤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뒀을 것이다. 그 준비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연회인데, 거기에 참석할 수많은 손님들에게 이미 초청장을 다 돌려놨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연회에 초청한 사람들 앞에서 재상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권세를 뽐낼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성주를 보지도 않고 황도로 돌아가 버린다면, 연회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마도 조권의 권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깔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치욕적인 일을 당한 조 성주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광분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진회는 박 교령의 조언이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지시를 내렸다.

“자네 말이 옳아. 예정대로 남창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군. 하지만 그 뒤의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곧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옛, 명대로 조치해 두겠사옵니다.”

박 교령은 절도 있게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재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재상이 갑자기 황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외적이라도 쳐들어왔다면, 자신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창에 가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아 정말 화급을 다투는 그런 중대사는 아닌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황도에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이옵니까?”

진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박 교령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섭평의 보고에 따르면, 추밀사 류태청이 그를 체포한 모양이야. 황상께 대한 항명죄로 말일세.”

추밀사라면 군부의 최고 기관인 추밀원의 우두머리다.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서와 더불어 2부(二府)라 불릴 정도니 추밀사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장수들은 자신들의 병사를 사병화시켜 버린 후, 마치 자기들이 지방의 호족이나 되는 듯 행세하고 있다. 이른바 군벌(軍閥)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추밀원의 지시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상황이다. 하지만 추밀원은 그들을 징계할 방법이 없었다.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다 말을 듣지 않는데 그들을 무슨 방법으로 징죄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상황을 더욱 장기화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금나라 오랑캐들이다. 군벌들은 모두 다 금과의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금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만 했고, 추밀원으로부터 보급 물자를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은 추밀원대로 군벌들을 혁파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방어선의 중심축을 담담하고 있는 군벌들 중 일부가 수틀린다고 금나라에 투항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송나라가 쫄딱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밀원은 말 안 듣는 군벌들을 살살 달래 가면서 뒤에서 지원만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일정을 계속 유지하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대인. 이런 중차대한 사유라면 성주님께 잘 아뢰면 그냥 넘어가 주실 지도 모를 일이 아니옵니까?”

“아닐세, 이미 섭평에게 지시를 내려놨네. 류태청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풀어 주도록 하라고 말일세. 나는 나중에 돌아가서 둘을 화해시키기만 하면 될 게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게 아님을 박 교령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송에서 가장 강대한 병권을 쥐고 있는 대 군벌이다. 그런 자를 감옥에 처박아 놨으니 그게 보통 일이겠는가.

“대인,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자를 없애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하지만 진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얕은 소견이라 탓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대인께서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한 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이옵니다. 더군다나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시에는 대인께 크나큰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음이옵니다. 그가 병사를 이끌고 황도로 진격한다면…….”

하지만 진회는 박 교령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노부는 그를 믿는다. 그는 그렇게 속 좁은 인물이 아니야.”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다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송제국에 대한 충성심이다. 비록 사사건건 부딪치고는 있어도 진회에게 있어 이런 혼란한 시국에 악비만큼 듬직한 장수가 없었다. 그런 유능한 장수의 목을 벤다니……. 인재를 아끼는 그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 묵향은 풍광이 수려한 만현에 자리 잡고, 모든 일을 잊은 듯 만통음제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통음제의 몸이 썩 좋지 못한 상황이라 그와 마음 편히 유람을 다닐 형편은 아니었기에, 이곳 만현 주위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과 음(音)을 즐기면서 의형제 간의 정을 흠뻑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묵향의 앞에 갑자기 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온몸에 먼지투성이인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어? 마화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마화는 묵향에게 인사한 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만통음제에게도 인사했다. 만통음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은 듯 약간 핼쑥해 보였다.

“본교에서 온 급전입니다, 교주님.”

마화는 만통음제라는 존재 때문에 직접 보고를 올리는 대신, 서찰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 만통음제는 화경급의 고수, 그가 자신의 보고를 엿들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설혹 전음을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도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아무 말 없이 서찰을 받아든 묵향은 서찰의 내용을 읽자마자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만통음제를 바라봤다. 그도 황도에 만통음제를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동생. 표정이 많이 굳었구먼.”

묵향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교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만대산에 말인가?”

“예, 이렇게 헤어지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겠습니다.”

십만대산까지는 만 리도 넘는 너무나도 먼 거리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아는 만통음제는 십만대산이라는 말 한마디에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급한 일이라면 내 걱정은 말고 빨리 가 보게. 아직 몸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을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라네.”

“죄송합니다, 형님.”

만통음제를 속인 것이 조금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화로 하여금 양양성까지 형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닐세. 오랜만에 경치 좋은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나. 한동안 이곳에서 유유자적 지내다 돌아갈 생각이네.”

“제가 모시고 왔는데, 급하게 일이 생기다 보니 너무 죄송해서…….”

만통음제는 이럴 때 도움이 되지 못해 더 미안한 모양이다. 그는 묵향이 부담을 가지고 떠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허허, 별말을 다 하네 그려. 그보다 내 제자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 주게나. 말을 안 하고 와서 걱정할 게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일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묵향은 만통음제와 헤어진 후 마화와 함께 최대한 빨리 황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미파 여승들과 흑풍대 무사

과거 무림맹의 장로, 맹호검군 백량이 금나라 황제의 목을 베겠다며 부하들을 이끌고 금나라 황궁을 급습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일은 실패였다. 금나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장인걸이 치밀한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였기에,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기습 작전이 실패한 후, 무림맹에서는 금나라에서 보복으로 이쪽 황제의 목을 베기 위해 암살자들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만약 상대가 천마혈검대원들 중 일부를 투입해 온다면, 현재 황궁에 배치된 전력으로 그들을 막아 낼 수가 있을까? 개방에 의뢰해서 알아본 결과, 결론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만큼 황병들의 무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것이다.

무림맹이 이렇게 부산을 떠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황제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전황이 일시에 뒤바뀔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무림맹의 지도부는 황궁에 고수들을 투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곳에 누구를 파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한다고는 하지만, 황궁은 금남(禁男)의 구역이 아닌가. 그렇다고 맹의 고수들을 거세(去勢)해 환관으로 만들어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여승들로 이뤄진 문파인 아미파(峨嵋派)의 투입이었다. 아미파는 9파1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의 명문이다. 불교에 심취한 아미파의 고승들은 무림의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고, 덕분에 요 근래 다른 문파들이 환란을 겪을 때도 그것을 피해 갈 수가 있었다.

여승이라 황궁에 투입하기도 좋았고, 타 문파에 비해 고수들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무림맹의 제안을 아미파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했다. 만약 이 제의를 거절한다면, 다른 문파들처럼 양양성에 대규모의 고수들을 파견해야만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미파가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진사태(靜眞師太)다. 예순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도를 닦는 이들의 모범이 된다고 세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비구니였다.

“사부님, 제자 지선(智宣)이옵니다.”

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경전을 외우며 염주를 굴리고 있던 정진사태는 애제자의 목소리에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들어오너라.”

문이 살며시 열린 후, 궁녀의 복장을 차려입은 지선이 들어왔다. 아미파의 승복을 입고 움직이면, 혹 다른 이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취한 조치였다. 황실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여고수들은 정교하게 만든 가발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얼핏 봐서는 일반 궁녀들과의 구분이 불가능했다. 지선은 1대제자였기에 꽤나 나이가 많았지만, 고강한 내공으로 인해 약간 나이든 궁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선은 방금 끓인 향긋한 차를 스승에게 건넨 후,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연공공(燕公公)께서 스승님을 뵙자고 청해 오셨습니다.”

그 말에 정진사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천천히 돌고 있던 염주 알이 그 움직임을 딱 멈췄던 것이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 둘러져 있는 염주는 적동(赤銅)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푸른빛의 녹이 끼어 있어 유서 깊은 물건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는지 정진사태가 입을 열었다.

“연공공이?”

그렇게 말하는 정진사태의 표정만 봐도, 내심 그녀가 얼마나 연공공이라는 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공공은 황궁 내에서 꽤나 높은 직위의 환관인 데다가, 황궁을 경호하는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자의 청을 쉽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정진사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만큼 싫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진사태는 느릿느릿 말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 오늘 아침부터 연공에 들어가 만나 뵙기 힘들겠다고 전하거라.”

그 말에 지선은 환히 웃으며 납죽 고개를 숙인 뒤 외쳤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넘치고 있었다. 정진사태 정도 되는 고수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화경의 벽을 깨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강호무림에 또 다른 무(武)의 절대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사부님.”

하지만 정진사태는 고개를 흔들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경하는 무슨. 그를 만나기 싫어 둘러대는 것이지. 아쉽게도 깨달음과는 관계없는 일이로구나.”

“그, 그렇다면…….”

여기까지 말한 지선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불자의 신분임에도 거짓을 말할 정도로 사부가 연공공을 만나기 꺼려하는 마음이 전해 왔기 때문이다.

“연공공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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