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의 방을 나선 지선은 연공공의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연공공과 대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다른 사람을 보내 청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행위였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요. 그래, 사태(師太)님의 답을 가져오셨나요?”
환관 특유의 찢어지는 듯한 고성.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속이 메슥거리도록 만드는 오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 환관이었지만, 연공공의 목소리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더군다나 위로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 매부리코가 합쳐지자 아무리 좋게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는 인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속살을 훑는 듯한 뱀과도 같은 저 음침한 시선을 받으면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선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였으므로.
“사부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으신 모양입니다. 그 후로 계속 명상을 하고 계시기에, 아무래도 한동안 밖으로 나오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깨달음이라면…, 바로 그 깨달음을 말씀하시는 거요?”
음침한 시선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자, 지선은 상대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선은 애써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연공공.”
“크흠,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조석지간에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많은 깨달음 중에서 하나를 더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소이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지선은 실례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시간을 끈 뒤 서둘러서 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계속 대화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연공공.”
“바쁘신 와중에 저와 사태님의 심부름까지 하시게 하여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그럼…….”
서로 간에 오고 간 주된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연공공이 한 말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상대의 기분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방금 전에 오간 대화도 그렇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그때 지선이 받은 느낌은 ‘알고 있는 것도 실천하지 않는 주제에, 무슨 얼어 죽을 깨달음?’ 이런 식으로 비웃는 듯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녀는 다급히 ‘아미타불’을 연호했다. 안 그러면 무심결에 욕설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오랜 시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그녀의 심기를 단 몇 마디의 말로 이토록 뒤집어 놓은 것을 보면 연공공이란 인물도 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현재 궁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고수는 책임자인 정진사태(靜眞師太)를 포함하여 총 245명. 그중 50명 정도가 자신이 맡은 지점에 매복하여 침입자에 대비하고, 나머지는 교대로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경비를 하고 있다.
그중 지선과 같은 1대제자들이 맡은 일이 가장 중요했다. 정진사태를 보좌하며 2대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황궁 전체의 방어선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한다. 그리고 황제에 대한 근접 경호 또한 1대제자들이 맡은 임무였다. 그녀들 중에서 두 명이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황제를 경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선은 연공공의 방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맡은 지역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방어 상태를 점검했다. 처음 그녀가 황궁에 왔을 때는 곧잘 길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황궁은 대단히 넓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규모의 황궁조차도 옛 황도인 개봉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초라하다 할 정도라고 하니, 지선으로서는 옛 황궁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귀에 작지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같은 내가고수가 아니라면 듣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의외로 그 소리는 멀리 퍼져 황궁 전체에까지 울렸다.
“침입자?”
지선은 지체 없이 호각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2대제자 다섯 명을 중심으로 3, 4대제자 20여 명이 여덟 명의 사내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비무장인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독이나 암기를 품속에 숨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쌍방 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지선의 물음에 2대제자인 혜인(惠仁)은 사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채 재빨리 대답했다.
“몇 시진째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황궁 내부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관찰해 보니 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에…….”
지선이 사내들을 바라보니 과연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불쑥 솟은 것이, 혜인의 말대로 상당한 무공을 연마했음이 분명했다. 지선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외쳤다.
“시주들의 정체를 밝혀 주시지요.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후에 벌어질 사태에 대한 책임은 시주들께서 지셔야 할 겁니다.”
사내들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지 전음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지를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선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전음을 날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제자들의 긴장감이 온몸에 느껴질 만큼 장내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결론이 났는지 사내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천마신교의 흑풍대 소속 무사들이오.”
마교라는 말에 아미파 여승들의 안색이 조금 더 굳어졌다. 정파의 한 축으로서 마교와 오랜 세월 원수처럼 싸워 왔던 그녀들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리라.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 마교의 무사들이 왜 왔단 말인가. 사내들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매가 실쭉 가늘어지는 순간이다.
“마교의 무사들이 이곳 황궁에는 무슨 일인가요?”
“우리들은 양양성에서부터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여 이곳 황도로 왔소. 그런데 그분께서 어제 입궁하신 후 행방불명되셨소.”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지선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장군이 황궁 안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 있느냐?”
물론 그녀의 이런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1대제자인 그녀가 모르는 일을 그녀보다 낮은 위치의 제자들이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제자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 지선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금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무림맹이 마교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저 마교도들이 진짜 마교도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녀가 상대해 온 마교도들은 하나같이 마기라고 불리는 아주 기분 나쁜 음습한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냈었다. 그런데 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지선은 냉소를 지으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빈니는 시주들의 말씀을 믿기 힘들군요. 먼저 귀하들이 천마신교 소속의 무사들이라는 증거부터 보여 주세요. 빈니는 시주들이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믿기 힘드니 말이에요.”
사내는 어쩔 수 없는지 품속을 뒤져 명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흑풍대 소속 제111십인대장 조창(趙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내 수하들이지요.”
하지만 지선은 명패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이 마교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명패라고 던져 준 사각형의 길쭉한 나무 전반에 걸쳐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黑風隊 一一一 (흑풍대 일일일)’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글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나무의 재질이 귀한 흑단목이었고, 문양이나 글자를 새긴 장인의 솜씨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마교의 명패라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지선은 명패를 조창에게 돌려주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군요.”
“그렇다면 천인장께…….”
여기까지 말하던 조창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도 믿어 주지 않는데, 임충의 말이라고 믿어 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괜히 임충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가, 이들이 임충까지 체포하겠다고 덤비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
“양양성에 알아보도록 하시오. 아니, 전쟁이 한참이니 이곳에도 양양성 쪽과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 있을 거요. 그곳에 알아보면 본교에서 흑풍대를 양양성에 투입했음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물론 그렇게 하겠어요. 대신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귀하들을 구속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미파 여승들의 긴장감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높아졌다. 반항하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순간 조창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다. 괜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은 겨우 여덟 명.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대의 수가 네 배가 넘는다는 것도 불리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은 지금 비무장이라는 사실이다. 황궁에 들어오기 위해 무장을 해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투를 통해 여승들인 것으로 생각되는 상대편의 무공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창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 나왔다.
“어쩔 수 없구려.”
기묘한 동거
참회동(懺悔洞).
소림승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면벽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장소다. 물론 아무나 이곳에서 참회를 하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1개월 이상의 참회를 필요로 하는 중죄를 저지른 승려들만 보내진다.
참회동은 깊게 파여진 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벽면이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 흔적마저도 없다. 있다면 참회동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불빛뿐이다.
적막만이 감도는 참회동 앞에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하듯 수라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라도제는 잠시 참회동 안을 바라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후, 동굴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시구려.”
수라도제가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안쪽에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노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낡은 장삼 위쪽으로 손으로 잡고 살짝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 드러나 있다. 3황(三皇)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대사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이것은 수라도제가 지금껏 상상해 왔던 공공대사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었다.
“험험, 불도를 닦으시는 데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대사를 뵙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공공대사는 면벽을 하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문 시주.”
공공대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자 수라도제의 얼굴에는 가벼운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저를…, 대사를 뵌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오래전, 시주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기운을 지니신 분과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분의 이름은 서문종(西門宗)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빈승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분의 후예라면 서문 씨가 아니겠소이까?”
“아버지를 만나셨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런데 서문 시주께서 빈승을 찾으신 까닭은 무엇이오?”
공공대사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초라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와 인연(因緣)이 닿아 있는 무림의 선배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이리로 찾아온 마교 교주를 만나셨을 겁니다. 어쩌면 그자가 자신을 마교 교주라고 소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수라도제가 묵향의 생김새를 설명하려 하는데,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를 만나 봤소.”
“아, 그자가 자신의 소개를 제대로 했었던 모양이군요.”
“허허, 아미타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불호가 들리자 참회동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공공대사는 바짝 마른 손가락 사이로 커다란 염주를 습관적으로 돌리고 있을 뿐,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 마음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다시 한 번 공공대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자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그 내용을 시주께서 관심을 가지실 이유가 있소이까?”
“물론 제가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겠지만…….”
수라도제는 갈등하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대사께서는 연배도 높으실 뿐 아니라, 3황 중에서 으뜸에 놓이셨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보셨을 때, 그 교주라는 자는 어떤 것 같던가요?”
하지만 공공대사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수라도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허허, 3황의 으뜸이라니 별 말씀을…….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빈승이 어찌 그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단지 인연이 있어 마교의 교주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지금껏 빈승이 알고 있던 마교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심성을 지니신 시주였소이다.”
“제가 대사께 그자의 심성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무공입니다. 혹자는 그가 탈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하는 그의 무공 말입니다. 대사께서 보시기에 그가 어느 경지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말을 하던 수라도제는 묵향과 마주쳤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모든 설명을 다 듣고도 공공대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염주알만 굴리고 있던 공공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시주께서 너무 큰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저어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시주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화경과 현경 사이의 간격은 넓다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주께서는 화경에 못 미친 자와 화경을 이룩한 자의 무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시오?”
수라도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무사라면 모르겠지만 어찌 그런 것을 모르겠는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대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검합일에 든 자가 화경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의식의 틀을 깨야 하죠. 그것이 얼마나 힘들면 모두들 그것을 화경의 벽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습니까.”
가만히 수라도제의 말을 듣던 공공대사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경 또한 마찬가지외다. 화경의 무공을 지닌 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본적인 관념까지 뒤집어 버려야 할 정도로 높은 벽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그 차이는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소.”
이건 수라도제로서도 전혀 기대를 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같은 화경급 고수로서 묵향과 있었던 일에 대해 토론하고, 상대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공공대사의 대답은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것이 아닌 한 차원 높은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라도제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는 현경의 벽을 넘으셨다는 말입니까?”
“면벽수련을 하다가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경험했지요.”
두 번째 환골탈태.
그것은 곧 현경의 벽을 뚫었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던 것을 이 비쩍 마른 노승이 이루어 냈다는 사실에 수라도제는 강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축하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겨, 경하드립니다, 대사.”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짓. 시주께 축하받을 이유는 없소이다, 아미타불.”
부러운 눈빛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문 뒤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 결례인 줄은 알지만 현경의 벽을 어찌 깨야 합니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공공대사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수라도제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 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고련을 했었던가.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에는 죽음보다 더한 혼란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평생을 진리처럼 믿어 왔던 관념을 깨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물론 세속의 명리를 초월한 공공대사였기에 자신이 겪었던 깨달음의 조언을 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오히려 상대에게 더욱 큰 혼란만 안겨 줄 것 같아 망설이는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나 성품이 다른 것처럼 나타나는 현경의 벽이 같을 리 없다. 그 말은 벽을 깨기 위한 실마리는 스스로가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빈승이 무슨 길을 알려 드릴 수 있겠소. 오히려 시주의 깨달음에 방해만 될 뿐일 게요.”
공공대사의 거절에 수라도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조언 몇 마디 듣는다고 화경의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무림에 존재하는 화경급 고수의 제자들은 모두 다 화경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례로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아들마저도 화경으로 만들지 못했다. 벽은 스스로 깨야만 하는 것이다. 누가 대신 깨 줄 수는 없다. 대신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스승의 작은 조언이라도 듣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라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라도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넉살좋게 웃으며 들고 있던 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대사의 조언을 듣기 전에는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해 주실 때까지 한동안 여기서 기거해야겠군요.”
“허허, 나무아미타불.”
능글맞은 모습으로 빙글거리는 수라도제를 바라보던 공공대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불호를 외울 뿐이었다. 그날부터 수라도제와 공공대사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