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르티어스는 보이지 않았고, 두 명의 기녀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리고 어르신은 어디 계시냐?”
급하게 묻는 왕지륜의 질문에 한 기녀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갑자기 잘 안 들린다고 하시더니 소첩의 따귀를 때린 뒤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뭐야! 잘 안 들려?”
왕지륜은 아르티어스를 교주가 의부로 삼았을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지닌 선배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늙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아르티어스가 한번 힘을 쓰자 철영 부교주가 묵사발이 나지 않았던가? 그가 마음먹고 신법을 전개한다면 일반인들의 눈에는 귀신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보일게 분명했다. 문제는 기녀의 대답 중에 ‘잘 안 들렸다’고 한 점이다.
“누군가가 어르신을 불러낸 것일까?”
천하에 그 누가 아르티어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왕지륜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교주의 아버지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아마 자신은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잠시 방 안을 서성거리던 왕지륜은 불안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마을 주위를 빠르게 수색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종적을 찾지 못한 그는 점차 수색 범위를 더욱 넓혀 나갔다. 그러다가 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정상쪽에서 뭔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번쩍 빛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왕지륜은 죽을힘을 다해 산 정상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신 어디 계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증거 인멸을 하려면 저놈까지 죽여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시중을 들던 호비트 계집아이들까지 죽여야 할 것이다. 아니, 자신이 왕지륜이라는 놈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놈들을 없애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호비트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죽여 없애는 것도 문제였고, 그냥 놔두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들놈의 의형이라는 놈을 증거 인멸이라는 이유로 그냥 죽이는 것도 좀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처럼 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이 아니던가.
아르티어스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왕지륜의 구슬픈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시간 여유마저도 없어지자 아르티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만통음제를 둘러메고 허공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지륜이 도착했다. 아르티어스와 수석장로에게 쥐어터지며 사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그도 마교 내에서 한가락 하는 실력자다. 그런 그에게 이런 어둠 따위는 수색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왕지륜은 산 정상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 혈투를 벌였음이 분명한 수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 설마 어르신에게 뭔가 변고가?”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던 왕지륜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산 아래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양성에 있는 교주에게 이번 일을 아뢰고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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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이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고 정신이 없을 때, 그 범인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추린 대인의 주리를 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추린이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강골이라고 해도 악독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고문을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크으윽! 나, 날 죽여라, 죽여.”
“쯧쯧,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 텐데?”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한 추린이 혀를 길게 내밀고 이로 꽉 깨물려고 했다.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이 번쩍하는 순간 그의 턱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크으으윽.”
추린이 절망감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묵향은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나는 자네에게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자네 혀가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대답을 들을 수 있겠나? 그리고 그깟 혓바닥 따위 없어진다고 자네가 자살할 수 있을 것 같나? 다 헛수고야.”
퉁명스럽게 말한 뒤 한참 동안 몇 가지 고문을 더 한 후, 묵향은 추린의 아혈을 풀어 주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 대답할 생각이 들었나? 안 그러면 좀 더 하고…….”
“으윽! 허억, 허억!”
아혈이 집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추린은 혈도가 풀리자 숨을 연신 헐떡거리며 그 비대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묵향이 가한 고문은 극악하리만큼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추린은 대답을 안 하면 더 고문을 하겠다는 말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워, 원하는 게 도대체 뭐냐?”
“황성사에서 악비 대장군을 왜 납치했나?”
그 말에 추린은 고통과는 또 다른 의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황성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르는 극비였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이 황성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납치까지 했다. 결론은 이 일에 황성사와 적대할 만한 거대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추린은 더 이상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온 상대이니만큼 순순히 말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의 질문 내용이었다. 악비 대장군을 황성사가 왜 납치를 했냐고 묻다니? 추린은 그런 정보는 알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건 아니다. 우리가 그를 납치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황권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일가 친족들까지도 목을 베야 하는 게 너희들의 일이잖아?”
“다른 자들이 그 일을 실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노부는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참, 황성사에 다른 두목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했군.”
악비 대장군을 왜 납치했냐며 슬쩍 넘겨 집어 추린의 반응을 본 묵향은 더 이상 이자를 쥐어짜도 나올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던 묵향은 추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알고 있는 다른 두목들의 정체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설마 나보고 동료들을 팔라는 말인가? 사람 잘못 봤다.”
추린은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외쳤지만 묵향은 전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이죽거렸다.
“잘못 봤는지 제대로 봤는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으, 으아악!”
그 후 차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문들이 행해졌고, 결국 추린은 진저리를 치며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마, 말하겠다.”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면 지금까지 받은 고문이 그리워질 정도로 네놈을 어루만져 주마.”
묵향의 엄포에 추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더 심한 고문을 하겠다니. 동료를 판다면 자신은 더 이상 조직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고문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연, 연공공이야.”
“연공공?”
과거 묵향도 관부에서 일했던 적이 잠시나마 있었기에, 고위직에 앉아 있는 환관을 ‘공공’이라 부르며 존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놈을 잡기 위해서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황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고 싶었던 묵향이었기에 곧바로 되물었다.
“그놈 말고 딴놈은 없어?”
한 번 열린 추린의 입은 묵향의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부가 알고 있는 건 연공공 한 사람뿐이다. 정기적으로 하는 회의에 참석할 때조차도 우리들은 모두 다 복면을 쓴 채 신분을 숨기고 만났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연공공은… 독특한 목소리로 인해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황궁을 건드리는 것은 좀 찝찝했지만, 기왕에 내친걸음이다. 한 놈 잡아들이나 두 놈 잡아들이나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결심을 굳힌 묵향의 눈초리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흠, 연공공이라……. 어쩔 수 없지. 일단 그놈을 잡아들인 후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군.”
소부경 추린을 납치한 다음 날 밤, 묵향은 황궁의 높은 담을 넘었다. 연공공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으로 꽤나 막강한 권세를 지니고 있는 자인 모양이었다. 거기에다가 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황성사의 간부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황실에서 최고위에 속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놈만 잡아서 족친다면 어쩌면 악비 대장군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묵향이 황궁의 담을 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궁 내부로 접근해 들어갈수록 짜증이 슬슬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경비 상태가 엄중해서가 아니라 황궁의 구조가 너무 넓고 복잡한 탓이었다. 일단 황궁 안으로 들어서고 나니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로 인해 당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잠입해 들어오기 전에 독두개를 닦달하여 황궁 지도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복잡하기 그지없는 황궁 내부를 겨우 지도 한 장에 의지해서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한다?’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묵향으로서도 결국 방법은 하나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를 붙잡아 그놈을 이용해서 목적지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한밤중인 만큼 홀로 나다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있다면 두 명씩 조를 짜서 여기저기에 매복하고 있는 놈들뿐이었다.
이때, 묵향의 눈에 순찰을 돌고 있는 황병들이 보였다.
‘저놈들 중 하나를 붙잡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10여 명씩 조를 짜서 순시를 도는 황병들 중 하나를 납치할 수는 없다. 그자들은 언제나 일정한 간격으로 정해진 통로를 순찰한다. 그런 그들이 사라진다면 곧이어 주위에 퍼져 있는 경계병들이 눈치 챌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놈들 중 하나를 붙잡는 수밖에 없겠군.’
묵향이 관심을 돌린 것은 여기저기에 두 명씩 조를 짜서 매복하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으로 보아 꽤나 무공을 수련한 실력자들이었다. 아마도 무림의 어떤 문파에서 파견한 고수들인 듯싶었다.
그들 중 한 조를 제압할 요량으로 묵향은 약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압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이 그냥 가만히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신호를 보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상이 있는지 혹은 제대로 경계를 서고 있는지 서로 확인하기 위한 행동인 모양이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놈들은 1각(약 15분) 단위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어. 그렇다면 저놈들을 제압했다손 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된다는 말이잖아. 젠장,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하려니 저게 걸리고, 저렇게 하려니 이게 걸리고…….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궁리만 하고 있는 동안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뭘 발견했는지 묵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해 오고 있는 시커먼 인영(人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건물이 만들고 있는 짙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민첩하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자 또한 흑의를 입고 있었고 복면까지 쓰고 있었기에 묵향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 존재를 눈치 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묵향은 삼엄하기로 소문난 황궁에 복면인이 출현하여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자 잠시 이곳이 정말 황궁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 복면인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던 묵향의 입가에 뭔가 야릇한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