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9화 (555/930)

흑의에 복면까지 써 어둠 속에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감춘 한 인영이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 부분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는 것을 보면 여인임에 분명한 흑의복면인. 건물이 만드는 짙은 그림자를 적절히 이용하며 움직였기에 아무도 그녀의 은밀한 움직임을 파악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바로 정진사태(靜眞師太)의 애제자 지선이었다. 그녀가 이런 괴이한 복장을 하고 황궁을 누비고 있는 것은 무슨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그녀가 황궁의 경비를 점검할 차례였기에 이런 괴상한 복장을 하고 황궁 내부를 은밀히 순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각 요소요소에 매복하고 있는 아미파 제자들이 근무를 제대로 서고 있는지 점검하고, 나아가 황병들의 근무 상태까지 관찰했다. 만약 이상이 있다면 제자들의 경우 다음 날 아침 호된 기합을 가할 것이고, 황병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황군 지휘부에 연락하여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자신들이 농땡이를 부린 것을 귀신처럼 파악해 내는 상관의 행동이 놀랍기 그지없다고 느꼈겠지만, 그것도 다 아미파의 1대제자들이 은밀히 암행을 해 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날 있었던 암행의 시작은 예전에 행해졌던 그것들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정에도 없었던 손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녀가 적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상대에게 혈도가 제압당한 후였다. 자신이 지닌 무공에 은근히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그 순간 그녀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 근처에 동문들이 있건만 혈도가 막혀 버린 그녀는 그 어떤 신호도 보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공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음도 보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녀를 제압한 괴한은 그녀를 끌고 좀 더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상대가 뭘 하려는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지선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침착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저자가 나를 죽이지 않고 제압한 것을 보면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일 거야. 그게 뭘까? 만약 황궁 내부의 정보를 원한 것이었다면, 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다른 자매들을 제압하는 것이 훨씬 편했을 텐데……. 왜 내가 순찰 나온 것을 노려 나를 제압한 거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선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있던 지선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상대 또한 나와 똑같은 임무를 띤 황궁 소속의 비밀무사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지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곳이 바로 황궁이기 때문이다. 황병 5만에 무수한 고수들이 철통처럼 경비를 서고 있는 황궁에 어느 미친놈이 잠입해 들어오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지금 이 사황이 이해가 된다. 그가 봤을 때, 지선은 황궁에 침입한 괴한일 테니 말이다.

그러자 자신이 황병들의 경비 상태를 알려 줄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궁의 세부적인 경비 상태를 총책임자인 그보다도 아미파의 여승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아마도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상대는 황궁의 경비 상태를 알아 보기 위해 파견된 관부의 비밀 고수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상대에게 자신이 적이 아님을 최대한 빨리 밝혀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혈도를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라 한 올의 공력도 일으킬 수 없는 상태라서, 상대에게 전음조차 날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상대가 이쪽의 대답을 들어 보겠다며 기회를 주기 전에는, 그녀는 그 어떤 의사표시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갑자기 상대의 전음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상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정중한 것이었다.

<네가 무슨 일로 황궁에 침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알바 아니고. 지금부터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말을 채 끝맺지는 않았지만 죽이겠다는 소리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상대가 같은 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선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대는 자신도 황궁에 어떤 목적을 지니고 침입한 동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다.

‘내가 침입자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는 내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침입자인 내가 주위에 도움을 청할 리 없으니까. 발각되면 둘 다 죽은 목숨. 나를 동지라고 생각하면 했지 적이라고 생각하며 경계할 이유가 없잖아.’

괴한은 지선의 대답을 듣기 위해 목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혈도 몇 군데를 풀어 주며 덧붙였다.

<거절할 텐가?>

부탁하는 말투였지만 자신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면 곧장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뚜렷이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놀랍게도 상대는 그녀의 혈도를 모두 풀어 줬다. 아마 괴한도 지선이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똑같이 황궁에 침투한 처지인데, 설마 황궁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는 무사들에게 신호를 보낼 리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혈도가 풀리자 지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비록 방심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는데 혈도를 제압당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월등한 고수라는 소리다. 지선은 섣불리 주위에 잠복해 있는 동문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보다는, 최대한 이자를 안심시킨 뒤 포위망을 구축하여 제압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자칫 어설프게 잡으려 들다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뭘…, 도와 드리면 되죠?>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나?>

일단 웬만한 곳은 다 알고 있기에 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대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내가 찾는 인물은 우상시(右常侍) 연공공이라는 환관이다. 그자의 거처를 알고 있나?>

황궁 안에는 수많은 환관들로 득실거리고 있었기에 외인인 지선이 그들의 거처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우상시 연공공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수많은 환관들 중 최고위직인 십상시(十常侍) 중 하나인 ‘우상시’라는 벼슬을 지닌 환관이 그다. 더군다나 연공공은 그녀가 이곳 황궁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만나기 싫어했던 인물들 중 하나가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또 다른…….’

급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지선이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순간 상대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그녀의 멱줄을 틀어쥐었다. 또다시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게 상대에게 붙잡히다니, 지선이 절망감에 고개를 떨굴 때였다. 멱줄을 틀어쥐고 있던 상대의 손에 힘이 주어지며 나지막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헛수고를 했군.”

아마도 이렇게 그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기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혈도를 풀어 줬던 것이리라. 단숨에 그녀를 제압한 고수답게 그 손아귀가 가하는 힘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순식간에 목구멍이 틀어막혔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공력을 끌어 모아 상대에게 전음을 보냈다.

<끄끅… 아, 알아요.>

상대는 곧 힘을 풀며 당황한 어조로 전음을 날렸다.

<이런, 알아? 대답이 없기에, 그런 줄도 모르고…….>

채 하지 않은 뒤의 말은 듣지 않았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죽여 버리려고 했다는 말일 것이다. 지선은 일단 연공공의 거처를 가르쳐 준다는 말로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숨결을 가다듬은 후에야 지선은 상대에게 물었다.

<연공공의 위치만 알려 주면 저를 살려 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도움을 준 사람을 없앨 이유가 없잖아.>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지선이 아니었지만, 현재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금 전 귀하의 행동으로 봤을 때,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조금 튕겨 봤는데 상대는 의외로 삐딱하게 나왔다.

<그렇다면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각서라도 쓸까? 지금 당장 네년을 죽여 없앨 수도 있음을 너도 잘 알 거 아니냐? 나는 내가 한 말은 철저하게 지켜. 그러니 헛소리 그만 하고 얼른 연공공의 거처나 말해.>

계속 떠들어 봐야 의견차가 좁혀질 리 없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지선은 더 이상 뻗대기를 포기하고 재빨리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성격이 그가 지닌 무공만큼이나 성급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좋아요. 안내하죠. 자, 나를 따라오세요.>

지선은 천천히, 하지만 결코 멈춤 없이 궁궐 깊은 곳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상대는 그녀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기에, 만약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려 하다가는 먼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컸다. 상대는 그녀가 그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딱히 괜찮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동은 계속되었고, 연공공의 거처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지선은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이자가 연공공의 거처에 도착한다면 그의 관심은 당연히 연공공에게 쏠릴 것이다. 그때를 이용하여 동문들과 힘을 합해 이 괴한을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연공공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럼 어떤가? 안 그래도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연공공인데 말이다.

마음을 정한 지선은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던 제자들 중 한 명에게 비밀리에 전음을 보냈다.

<침입자가 있다. 지금 나는 괴한에게 제압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사부님께 연락드리고, 비밀리에 연공공의 숙소 쪽으로 제자들을 집결시켜라. 그자의 목표는 우상시 연공공이다.>

잠시 후, 지선은 아직까지 희미한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창문 하나를 가리키며 괴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바로 저 방이에요. 주변에 경비가 삼엄하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가 봐도 될까요?>

하지만 괴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기에 있는 놈이 연공공임을 확인한 후에. 자, 앞장 서라.>

예상대로 상대는 그녀의 잔꾀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생각해도 저 괴한처럼 엄청난 고수로 성장하려면 강호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아 왔을 것이다. 그런 노회한 고수에게 잔꾀가 통할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도 않았기에 지선은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고 앞장 서서 연공공의 침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연공공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열심히 붓을 놀리며 뭔가를 한참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선으로서도 의외였던 것이 갑자기 창문이 덜컥 열리면서 복면을 뒤집어쓴 자신이 출현했음에도 연공공이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공공은 붓놀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지선을 향해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고음의 느끼한 음성으로 물었다.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요?”

그제서야 지선은 1대제자들이 밤마다 황궁을 암행한다는 사실을 연공공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그런 생각을 지선이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음침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돼지 말대로 아주 독특한 음성을 지니고 있군.”

그 순간 연공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쭉 찢어진 눈매에 감춰진 매서운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괴한의 말 한마디로 그 정체를 단숨에 간파해 버렸기 때문이다.

“크크큭, 과연 배짱이 있는 놈이로구나. 추린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서 감히 황궁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다니.”

“너한테는 안 됐다만, 돼지가 기억하는 놈이 너밖에 없어서 말이야.”

괴한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연공공의 몸이 쭉 늘어나듯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너무나도 손쉽게 책상을 건너뛰었기에, 마치 처음부터 그의 앞에 책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공공의 손에는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얇은 연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연검은 그의 허리띠 뒤쪽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기에 그가 뽑아 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무장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연공공과 지선의 거리는 거의 1장 반(약 4.5미터)이나 되었지만, 그의 검은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에 당도했다. 놀랍게도 연공공은 엄청난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그의 연검에서는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고, 푸른 강기마저 아련하게 맺혀 있었다.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는 그 공격에 휩쓸리면 뼈도 추리기 힘들 게 분명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지선은 어떻게 해서든지 연공공의 공격권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연공공의 연검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도저히 피할 여유가 없었다. 엄청난 공력을 내포한 검격으로 봐서 연공공은 처음부터 지선과 괴한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깨달은 지선의 눈동자는 절망감에 물들었고,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캉!

괴이한 소리에 지선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가 들려오다니 이상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공공의 검은 놀랍게도 괴한의 손에 막혀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은 적수공권에 말이다. 괴한의 손은 투명하게 빛나며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환상과도 같은 무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지선이었기에 한순간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지선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뒤로 날아가 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괴한이 방해가 되는 그녀를 붙잡아 뒤로 집어 던져 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괴한은 연공공이 자신과 괴한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지선을 황궁과는 관계없는 진짜 침입자로 단정한 모양이다.

연공공의 무공도 놀라웠지만 괴한의 무공은 더욱 놀라웠다. 방해물인 지선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연공공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선은 느긋하게 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괴한의 눈치를 힐끗 본 후, 그가 연공공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렸음을 깨닫자마자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예상대로 아미파의 제자 50여 명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복면을 벗어 던지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침입자가 있다. 침입자의 무공이 고강하니 정면 대결은 절대 피해야 한다. 모두들 항마연환검진(抗魔連環劍陣)을 펼쳐라.”

항마연환검진은 비교적 무공이 약한 다수가 강한 소수를 압박하는 데 최적화된 아미파 고유의 검진이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진법을 보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항마연환검진처럼 강한 무공을 보유한 소수의 침입자를 다수로써 대적하기 위해 최적화된 진법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소수로써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진법이다.

아미파의 여승들은 지선을 중심으로 검진의 묘리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이치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항마연환진법을 펼치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움직임은 마치 무희(舞姬)들의 검무(劍舞)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진법을 펼친 채로 그녀들이 조금씩 연공공의 처소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꽈꽝!

갑자기 연공공의 서재 쪽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쪽 벽이 터져 나갔다. 채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 그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지선은 금방 그게 복면괴한이 만든 음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복면괴한은 마지막에 보였던 그 격돌에서 이미 연공공을 제압해 버렸는지, 그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괴한은 밖으로 나오다가 아미파의 고수들이 검진을 펼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다. 그녀들을 지휘하고 있는 지선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바로 그 여인임을 알아본 복면괴한의 눈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 묻어 나왔다.

지선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동문들에게 외쳤다.

“침입자가 절대 도주하지 못하도록 해라!”

이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2대제자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자가 연공공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자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지선은 순간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괴한과 함께 자신까지도 베어 버리려고 하던 연공공의 표독스런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지선은 동문들에게 외쳤다.

“침입자를 저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황궁이다. 멀지 않은 곳에 황상 폐하께서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연공공의 안위 따위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모두들 알겠느냐?”

불도를 닦은 제자들이기에 몇몇은 그녀의 명령에 내심 반발을 했을지 모르지만, 감히 1대제자인 지선에게 대놓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선의 말대로 이곳은 황궁 안이다. 그녀들이 맡은 최우선적인 임무는 황상 폐하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음인지, 항마연환검진은 강한 살기를 내뿜으며 복면괴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비검(飛劍)!”

지선의 지시가 떨어지자 네 명의 여승들이 경공을 전개하며 몸을 날렸다. 항마연환검진은 소수의 적을 향해 전후좌우를 압박함과 동시에, 뒤쪽에 위치한 제자들 중 네 명씩 하늘로 날아올라 십자 형태로 교차하며 쉴 새 없이 공중공격까지 가하는 매우 무서운 검진이다. 일단 검진이 발동한 이상 저자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복면괴한이 연공공을 어깨에 짊어진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하늘. 언뜻 보면 네 명밖에 공격자가 없는 공중이 약점으로 느껴지겠지만, 그게 항마연환검진의 가장 큰 함정이었다. 도주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모든 공격이 사방에서 집중되는 것이다. 공중으로 몸을 날리느라 행동의 제약이 큰 적은 그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야말로 하늘은 필사(必死)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복면괴한이 하늘로 몸을 띄우자, 지선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침입자를 포획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순간 아미파 여승들의 공격이 괴한을 향해 집중되었고, 곧이어 복면괴한의 가공할 무공이 펼쳐졌다. 괴한은 자신이 필사의 관문으로 들어섰음을 깨닫자마자, 후퇴하거나 하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복면괴한의 손이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아미파 여승들의 공격에 그대로 맞부딪쳐 갔다.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로 몸을 띄웠던 20여 명의 여승들이 돌진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튕겨져 나왔다. 그녀들은 복면인과의 격돌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땅에 착지하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럴 수가!”

괴한의 경공술은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어서, 연공공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돌의 반발을 이용해 순식간에 밤하늘 속으로 까마득히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에 녹아들어가듯 그 종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괴한을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갔던 지선 이하 모든 여승들은 그런 괴한의 뒷모습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괴한의 걸출한 무공에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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