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1화 (557/930)

* * *

황궁과 무림맹의 협정에 따라 웬만한 문파들은 다 남경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꽤나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불리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에 남아 있는 문파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무영문이다. 정보를 취급하는 무영문이 이곳 남경을 포기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무영문의 남경 분타는 부호의 저택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저택이 왕 노야(老爺)라는 사람 좋은 은퇴상인의 집으로만 알고 있었다. 왕 노야는 오랑캐들과 국경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지금은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 황도에 자리 잡은 뒤 만년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이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아무리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정했기에 음으로 양으로 아들이 하는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택의 주인으로 알려진 왕 노야는 후덕한 인상에 살집이 넉넉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저택 안 깊숙이에 위치한 별채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쪽으로 다가가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노야.”

왕 노야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별채의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한 번 주위를 쓱 둘러봤다. 그의 타고난 조심성 때문에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는 문 앞에 입을 가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왕 타주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운 음성이 안에서 가늘게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쌓여 있는 문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왕 타주답지 않게 꽤나 서두르는 것 같던데…….”

별채 근처에서 왕 노야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별채 밖에서 서둘러 이쪽으로 걸어 들어온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겉보기와 달리 중년 여인은 상당한 고수였던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문주님.”

큰일이라는 말에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 왕 노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군을 찾아냈나요?”

“그게 아니라 교주가 사고를 쳤습니다.”

“사고라니…, 그가 연공공을 죽여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왕 노야는 방금 전까지 개방 분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 내용은 너무나도 정확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 노야가 바로 중원 최고의 정보 조직이라고 불리는 무영문의 남경 분타주였던 것이다.

왕 노야는 묵향이 이곳 남경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아무리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묵향의 뒤를 밟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경이다. 숨기 좋은 엄폐물도 많았고, 뭣하면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들기만 해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묵향이 추격당할 가능성을 없앤답시고 장거리를 전력 질주할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연공공이 탈출했단 말인가요?”

“예, 교주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갇혀있던 창고에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를 살려 둔다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으니 없애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주님.”

왕 노야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이 생각에 잠기는 아름다운 여인. 이 중년 여인이 바로 옥화무제의 딸이며, 현 무영문의 문주인 매설란(梅雪蘭)이었다. 매설란의 딸이 이미 중년의 여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상당한 고수임에 확실했다.

한참 고심을 한 후, 결론을 내렸는지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연공공은 황실을 수호하는 비밀 세력인 친황대의 수장이에요. 가뜩이나 황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만큼 지독하게 당했으니 교주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뽑아들겠죠.”

“그렇게 되면 교주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왕 노야의 말에 매설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황실에 그만한 힘이 있을까요? 교주를 없애는 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어떻게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가 살아서 황궁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명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매설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와줄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방 분타에 있는 모든 개방도들이 지금 연공공을 척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매설란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며 명령했다.

“사람들을 보내 연공공이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개방과의 충돌은…….”

“연공공 같은 인물을 이런 일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문주님.”

왕 노야는 서둘러 별채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분타원들 중 한 명에게 뭐라 지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10여 명의 인물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아마 연공공의 탈출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리라.

왕 노야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자, 매설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교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고가 들어왔나요?”

“꼬리를 붙여 놓았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이때 밖에서 약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 노야가 문을 열어 주자, 문사 차림의 사내 하나가 뭔가 보고를 한 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교주가 추밀사의 저택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입니다.”

사내의 보고가 매설란에게는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추밀사? 그렇다면 추밀사가 대장군을 납치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최대의 군벌을 구축하고 있는 악비 대장군만 없어진다면, 지금의 군벌 체제를 타파하고 다시 한 번 과거와 같이 추밀원이 군권을 움켜쥘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했었던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만약 악비 대장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현재 추밀원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군권을 재편할 수 없어요. 오히려 대장군을 추밀원이 없앴다는 걸 군벌들이 안다면, 위협을 느낀 그들이 일제히 금나라로 넘어가 버릴 우려마저 있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추밀원에서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왕 노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매설란도 왕 노야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마 연공공은 추밀사를 의심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매설란은 이번 악비 대장군 납치 사건을 황궁 쪽에서 일으킨 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하지만 추측만 했을 뿐, 본격적인 조사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황궁에는 황성사라는 첩보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무영문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이다 황성사에 포착이라도 당한다면, 황궁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묵향이 황성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내 온 황성 내를 휘저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무영문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껄끄러운 황성사의 시선은 묵향에게로 집중될 것이 틀림없으니 그 틈에 악비 대장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덕분에 무영문은 꽤나 많은 정보를 끌어 모아 놓은 상태였다. 매설란이 내린 결론도 그런 정보들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악비 대장군의 행방, 그리고 혈전

우상시 연공공은 중상을 당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황군 진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무영문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었지만, 그들이 워낙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연공공은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황군 진지에 겨우 도착한 연공공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뭔가 큰 환난을 당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황군 진지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연공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 나왔다.

연공공은 궁내의 환관들이 입는 관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경계를 서고 있던 황군 병사들이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들은 연공공을 부축하여 병영 안으로 들어갔고, 그중 한 명은 당직을 서고 있는 장수에게 이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황군 교령이 한눈에 연공공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우상시 공공이 아니십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십니까?”

그 말에 묵향에게 납치돼 온갖 고문을 당했던 것이 떠오르자 연공공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잡혀 갔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도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네.”

“대인께 무례를 저지른 놈들의 거처를 알려 주십시오. 소장이 달려가 그놈들을 당장!”

“그렇게 섣불리 건드릴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황군 교령을 만류하는 연공공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여기까지 탈출해 오는 동안 틈만 나면 복수를 생각했었다. 지독할 만큼 강렬한 복수심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상대는 이 시대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문파들 중 하나인 마교(魔敎)의 수괴(首魁)다.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놈의 무공은 엄청났다. 그런 만큼 조심에 조심을 기하지 않는 한 놈을 놓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개방의 거지들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납치하고 극악한 고문을 행했던 그 빌어먹을 마교 교주 놈을 잡는 게 먼저였다. 잡아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수십 배를 돌려줘야 했다.

교주 놈을 잡기 위해 그가 생각해 둔 한 가지 계책이 있었다. 그 계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놈이 뭘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기에 가능했다.

“몇 가지 도와줄 일이 있네.”

“하명만 하십시오, 공공.”

“날래고 믿을 만한 녀석들을 다섯만 뽑아 주게. 서신을 보낼 게 있네.”

“예, 즉시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교령이 자신의 심복들 중에서 기마술에 뛰어난 자들을 부르러 나간 사이, 연공공은 그들에게 맡길 서신을 작성했다. 가장 먼저 그가 쓴 서신은 황궁에 있는 자신의 심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아무래도 실력 있는 고수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작성한 것은 황성사로 보낼 서신이었다. 자신이 당한 일을 다른 간부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공동파와 아미파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오랜 세월 황궁에서 일해 온 때문인지 우아한 서체로 쭉쭉 써 내려가던 그는 갑자기 붓을 멈추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런! 이렇게 쓰면 안 되잖아.”

황성사에 보내는 서신이야 이번에 그가 당한 불미스런 일들을 사실대로 기록한다고 해도 아미파와 공동파에 보낼 것들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기록한다면 저들이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마교 교주의 무공이 워낙 강한 만큼 그를 없애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만약 교주를 없앴다는 게 마교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전면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양양성에서는 마교와 정파라는 것들이 힘을 합쳐 오랑캐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교주라는 것을 알면 공동파와 아미파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힘을 빌려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까?”

잠시 궁리하던 연공공은 일단 자신을 납치한 괴한이 마교 교주라는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괴한은 마교 교주가 아니라 강력한 무공을 지닌 ‘정체불명의 고수’로 바뀌었다.

자신의 서신을 소지한 다섯 명의 전령들이 전력질주하며 만들어 낸 경쾌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이미 마교 교주 놈이 붙잡혀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놈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한 이상, 생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미파와 공동파는 물론이고, 중무장한 황군 5천까지 동원된다면 그 누가 도망칠 수 있겠는가.

“놈을 어떻게 죽여 줄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연공공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래! 놈이 말했던 대로 육시를 해서 그 잡것들에게 존엄한 황실의 권위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이 되는지 알려 줘야겠어. 그래, 바로 그거야. 케케케케케!”

나름대로 통쾌하게 소리 내어 웃는 연공공이었지만 그 기괴한 고음의 목소리 탓에, 주변에서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 나쁜 경험을 해야만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