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2화 (55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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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공공의 서신을 찬찬히 읽은 후, 비호검 이평 장로는 그것을 가지고 온 전령에게 물었다.

“서신을 읽어 보니 아미파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라고 쓰여 있는데…, 그쪽은 황궁에 매인 상태인데 과연 지원 나올 여력이 있겠나?”

“우상시 공공의 청인데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나올 것입니다.”

전령의 말에 그제서야 이평 장로는 연공공이 십상시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라면 설사 황제를 호위하는 무사라도 빼올 것이다. 그만큼 십상시가 휘두르는 권력의 힘은 엄청났다.

“알겠네. 정해진 시간에 그쪽에 도착할 것이라고 공공께 전해주게나.”

“예,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이평 장로의 말에 전령은 군례를 올린 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돌아가자마자, 이평 장로는 1대제자들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최대한 빨리 출동 준비를 갖춰라. 상대는 소수인 만큼 검과 암기 몇 가지 정도만 가져가도 충분하다.”

믿고 존경하는 장로의 명령이니 의문을 제시하는 제자는 당연히 없었다. 1대제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옛, 장로님!”

이평 장로의 명령에 제자들이 무장을 갖추기 위해 밖으로 모두 달려 나갔지만 그의 적전제자인 허진산(許珍山)은 남았다. 허진산은 검대에 놓여 있는 사부의 애검을 꺼내, 두 손으로 사부께 바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 무슨 일이신데 그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노부가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이평 장로는 서신을 허진산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이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 연공공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게다. 그는 황궁의 실세다. 그가 본문을 밀어주기만 한다면, 본문이 다시 한 번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 게야.”

공동파는 과거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무림맹주로 있을 때 최고의 성세를 달렸었다. 하지만 그가 행방불명된 후 거듭되는 불상사로 인해 지금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공동파는 다시 한 번 재도약의 발판을 황실에서 마련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너무나도 빨리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급히 서신을 다 읽어 본 허진산은 조심스럽게 사부에게 의문나는 점을 물었다.

“서신에 따르면 적도(敵徒)를 잡는 데 본문만이 아니라 아미파와 황군까지 투입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면 놈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칠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설혹 놈들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공이 그만큼 희석될 것이 뻔합니다, 사부님.”

그 말에 이평 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다.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서두르는 게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놈들을 친다. 알겠느냐?”

“옛, 사부님.”

이때, 밖에서 1대제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출동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평 장로는 검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자, 가자.”

이평 장로가 거느린 공동파 제자들은 순식간에 목표 지점인 추밀사의 저택에 도착했다. 목적지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기에, 경공술을 사용해서 내달리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평 장로는 도착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적도들을 찾아라. 설혹 낌새를 챘다고 하더라도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옛!”

1대제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후, 각기 자신들을 따르는 2, 3대제자들을 거느리고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큭, 겨우 적도 몇 놈 잡는데 아미파와 힘을 합치라니. 연공공은 본문의 능력을 너무나도 무시하는군.”

그렇게 투덜거리며 이평 장로는 주위를 둘러봤다. 연공공의 말대로 적도들 중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림인이 있다면, 자신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파악하고 벌써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봐도 누군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듯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깊숙이 숨어 버렸다면 골치깨나 아프겠는데…….”

지금 그가 우려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놈들이 어딘가로 숨어 들어갔을 경우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수색해 나간다면 결국 잡아낼 수 있겠지만, 이평 장로는 적도들을 잡는 공을 아미파와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면 결국 적도들을 최단시간 내에 포착하여 격멸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때 갑자기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던 문하제자들이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암행복(暗行服)을 입은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흐흣, 잡았구나.”

흐뭇하게 미소 짓는 이평 장로였지만, 그 미소는 얼마가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얼마나 놀라운 광경을 봤는지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면인은 공동파의 제자들이 포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순간 번쩍하고 신형을 움직였다.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이평 장로조차도 그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놓쳤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퍼퍼퍽!

놀랍게도 그 괴한은 순식간에 세 명의 문하제자들을 때려눕히더니, 곧바로 그들 중 한 명의 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복면인을 중심으로 은빛 곡선의 파도가 화려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문하제자들 십수 명이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나뒹군 것도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 젠장, 고수로구나. 모두들 비켜라. 노부가 상대하겠다.”

이평 장로는 상승의 신법을 발휘하여 공중에서 아홉 바퀴나 곡예를 하듯 화려하게 돌며 문하제자들 앞에 착지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앞으로 튕겨 나가듯 복면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과연 일문의 장로다운 절정의 경공신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문하제자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게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복면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이평 장로는 복면인의 검격이 자신에게 날아온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상대를 얕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얼핏 봤을 때 복면인의 무공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인은 쓸데없는 공력의 낭비를 최대한 자제하며, 상대를 해치우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공력만을 쓰고 있었다. 그 말은 복면인이 정말 엄청난 고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지금껏 제자들을 상대할 때는 그리 대단한 검식을 사용하지 않았었지만, 이평 장로를 향해 날아온 것은 그 파괴력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극도로 응축된 내공을 담고 있는 강력한 초식. 공동파의 장로답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순간, 이평 장로는 사력을 다해 자신이 익힌 무공 중 최강의 초식으로 강력한 검막(劍膜)을 구축했다.

콰콰쾅!

검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고막이 멍멍해 질 정도의 굉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평 장로의 검막이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상대는 상상 이상의 고수였다. 이평 장로가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검막이 깨져 나간 순간, 이평 장로는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목을 쓸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촌각의 시간이 흘렀어도 적의 공격은 없었다. 어쩌면 적도 자신의 검막을 무너뜨리면서 충격을 받아, 연속 공격을 가할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평 장로는 정신없이 뒤로 빠졌다.

이평 장로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잡을 때까지도 복면인의 공격은 없었다. 아니 복면인은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의아한 시선으로 이평 장로가 복면괴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괴한의 입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 그걸 익힌 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너는 그 검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복면인의 물음에 이평 장로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저자는 어떻게 제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이 무공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말인가? 공동파 수뇌부 몇몇을 제외하면 무림에서 이 무공을 알아볼 사람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 저자가 과거 공동파에서 파문당한 선배였다는 말인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이평 장로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귀, 귀하는 누구시길래 그걸……?”

“젠장! 그녀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군.”

마치 살인에 재미라도 들린 듯 닥치는 대로 공동파 제자들을 죽여 대던 괴한은 갑자기 모든 흥이 사라진 듯했다. 그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긴 채 그 장소를 이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궁 쪽 방향에서 수십이 넘는 인영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인영들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던 아미파의 지원세력이었다. 아미파 고수들은 도착하자마자 피바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복면인을 향해 다짜고짜 공격을 개시했다. 수많은 공동파 제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복면인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미파 제자들은 복면인에게 접근하며 저마다 품속에서 아미파 고유의 암기인 조핵정(棗核釘)을 꺼내 던졌다. 무림인들의 경우 같은 문파의 소속이라 할지라도 각자 지닌 암기는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달랐지만, 아미파는 모두 조핵정만을 사용했다. 대추씨와 비슷하게 생긴 조핵정은 통짜쇠로 만들어져 제법 묵직했기에 장거리의 적도 공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한쪽은 뾰족하게 또 다른 쪽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어, 살상은 물론이고 적의 혈도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수백 발의 조핵정이 발출되어 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 황궁 경호를 위해 뽑은 아미파의 내로라할 만한 실력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암기들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갔다. 그녀들은 복면인이 벌집이 되어 쓰러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티티팅.

일순 복면인의 검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그의 주위로 두터운 벽을 쌓았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조핵정들은 콩 볶는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무위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녀들은 그와 똑같은 한 수를 사용해서 조핵정을 찢어발기던 인물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이 저마다 경악성을 질러 댔다.

“악! 바로 그자에욧!”

“모두들 조심해!”

어젯밤 황궁에서 만난 괴한을 그녀들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그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절감해야만 했다. 괴한과 아미파의 충돌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게 끝났지만, 그녀들이 강자에 대한 경외(敬畏)와 공포(恐怖)를 가슴속 깊이 새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고수가 황궁에 둘씩이나 잠입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 서 있는 복면인은 어젯밤 만났던 바로 그놈이 분명했다.

정진사태의 명에 따라 동문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지선은 있는 힘껏 외쳤다.

“모두 피햇!”

순간 복면인의 앞을 가로막았던 아미파 여승들은 마치 대나무가 쪼개지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복면인은 미처 옆으로 비키지 못한 여승들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베어 버리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승 셋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지만, 누구 하나 복면인을 향해 달려드는 자는 없었다. 달려들어 봐야 아예 상대가 안 됨을 그녀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서 복면인의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돌려 지선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상대는 공동파의 장로였기에 지선은 예의를 갖춰 정중히 대답했다.

“소승도 잘 모릅니다.”

“방금 전에 보니 모두들 저자를 아는 듯하던데……?”

이평 장로의 눈에 의심의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자 지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평 장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법을 사용했다면…, 혹 항마연환검진을 말하시는 거요?”

“그렇습니다. 비호검 대협.”

“그, 그럴 리가…….”

“아미타불,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입니다.”

지선의 솔직한 대답에 이평 장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평 장로는 아미파의 항마연환검진이 얼마나 뛰어난 검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 문파의 최고의 무공이나 검진은 다른 문파들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검진을, 그것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발동시킨 걸 혼자서 단숨에 뭉개 버렸다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믿기 힘든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지만 이평 장로는 지선의 말이 사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직접 복면인과 검을 나누지 않았던가. 상대의 무시무시한 검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이번 사건에 뭔가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간파했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의 고수라면 필히 무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 복면인은 자신의 검법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런 실력자가 뭣 때문에 연공공의 납치에 관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 실내로 들어갔던 제자들 중 하나가 이평 장로에게 보고했다.

“추밀사 대인을 찾았습니다, 장로님. 지독한 고문을 받은 듯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 보입니다.”

“그래? 빨리 의생에게 모시도록 해라.”

“옛, 장로님.”

이평 장로는 자신의 애제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진산아.”

“옛, 사부님!”

“일은 거의 끝난 듯하니 뒤처리를 네게 맡기겠다. 노부는 잠시 어디 들렀다가 돌아가마.”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평 장로가 제자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을 옆에 서 있던 지선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다니, 필시 뭔가를 알아챈 것이 분명하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지선은 재빨리 자신의 사매에게 같은 지시를 내린 후 어디론가 달려가는 이평 장로의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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