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5화 (561/930)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둘이었기에 서로 할 말도 많았다. 현천검제가 뒤에 서 있는 소연의 존재까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키는 인물이 있었다. 웬 젊은 도사 한 명이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사숙! 드디어 찾아냈답니다.”

“응?”

현천검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 헐레벌떡 달려온 젊은 도사는 턱까지 올라온 숨을 씩씩거리며 다급히 말했다.

“개방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귀주성(貴州省) 개리(凱里) 인근에서 청류(淸柳) 사조님을 뵈었다는 사람이 있답니다.”

청류라면 현천검제의 사숙으로서 정확히 말한다면, 사부의 사제(師弟)다. 만약 아직까지도 생존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90세가 넘었을 것이다.

“청류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고?”

그제서야 젊은 도사는 현천검제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사숙께 웬 손님이 찾아오셨나 했는데, 곧바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말. ‘청류 사숙’이라는 명칭은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손님이 아니라 동문 선배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도사는 실례를 무릅쓰고 뚫어져라 현천검제를 바라봤고 곧이어 상대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젊은 도사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적삼(王迪三)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허허, 어서 일어나거라. 그래, 청류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고?”

“예, 개방에서 보내온 연락에 의하면 개리 인근에서 2년 전에 사조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매우 정정하셨다고 하니, 어쩌면…….”

아마 노궁은 은거한 전대(前代)의 선배들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산파는 지금 수뇌부 고수들이 대부분 전멸당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노궁은 화산과 연이 닿아 있거나 지금은 은퇴하여 세상을 유람하며 유유자적 살고 있는 전대의 선배들을 찾으러 사방으로 제자를 보냈다. 물론 개방에도 사람을 보내 그 일에 협조해 줄 것을 잊지 않았다.

노궁은 기쁨에 찬 눈빛으로 현천검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문인, 어찌해야 할까요?”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곳으로 모시는 것도 좋겠지. 왕적삼, 너는 당장 사숙을 찾아가 본파가 처한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한다고 전하거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궁은 적삼이 제대로 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동행자를 선택해 주고 노자도 넉넉하게 주도록 해라.”

이렇게 지시를 내리던 현천검제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참, 돈은 충분히 있는지 모르겠구나?”

“예, 마교도들은 무공서나 보물 같은 비교적 부피가 작은 것들만 약탈했을 뿐, 다른 것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런 뒤 노궁은 현천검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노궁과 왕적삼이 자리를 뜬 후 지금껏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서 있던 소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화산파 장문이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허허, 노부도 유백 사부님과의 인연으로, 괴팍하지만 멋있는 사형과 자네같은 아름다우면서도 현숙(賢淑)한 사질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과, 과찬이십니다, 사숙.”

감회에 젖은 눈으로 도관을 바라보던 현천검제의 입에서 소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노부의 사문을 이렇게 만드셨지만 그래도 나는 사형과의 인연을 원망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분의 행동에는 언제나 인과율(因果律)에 따른 명확한 선이 있기 때문이지.”

“인과율이라니요?”

현천검제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허허롭게 웃으며 계속 도관들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보수하며 관리해 온 고색찬연한 도관들을 말이다. 적이라 생각되면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초토화를 시켰던 지금까지의 마교의 행동으로 봤을 때 도관이 이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형의 배려였으리라.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만 하던 사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형께서는 못난 내겐 너무나도 과분하신 분일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정도 많으신 분이고 말이야.”

자신을 바라보는 소연에게 현천검제는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을 음해하긴 했지만 죽은 제자들은 명문정파 화산의 제자들이다. 이미 그들이 모두 죽은 이 마당에 그들의 치부를 들춰서 무엇 하겠는가. 그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현천검제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이다.

화산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현천검제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형의 배려는 가슴이 메이도록 감격스러웠지만, 어쨌든 자신은 화산파의 장문인이다.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되돌아온 이상, 오랜 세월 정파의 한 기둥을 담당해온 화산이 악의 무리라는 마교의 손을 대놓고 들어 주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사형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현천검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이번 일을 계기로 화산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게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연의 질문에 현천검제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미소를 지으며 할 소리는 아니었다.

“봉문을 할 것일세. 10년이든 20년이든 혼탁해진 화산의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사형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말이야.”

“그, 그게 무슨……?”

“허허, 무량수불.”

결심을 굳히고 나자 마음이 평온해진 듯 현천검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호를 외웠다. 바람이 그의 수염을 살랑이며 지나갔다.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도관은 세사와는 동떨어진 듯 마냥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정적을 깼다. 주위에 있는 새들도 놀랐는지 한순간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노궁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그를 뒤따라 온 여러 명의 도사들도 모두 다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노궁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마교도들이 나타났습니다.”

“마교도가?”

“예, 장문인.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10여 명씩이나 보낸 걸 보면, 아예 여기를 끝장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 말에 현천검제와 소연은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노궁이 말하는 것은 바로 여문기가 이끌고 있는 호법원의 고수들일 것이다. 순간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마교의 고수들이 왜 이곳 화산에 왔는지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소연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나 화산파에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현천검제는 중후한 어조로 제자들을 꾸짖었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대화산파의 제자들이다. 그런 너희들이 마교도들이 두려워 우왕좌왕한다면, 지금까지 협의를 행하기 위해 수많은 악도들과 싸우다 산화하신 선대의 조사님들께 면목이 서겠느냐?”

현천검제의 질책에 모두들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설마 극마급에 이르는 고수들이겠느냐? 저들을 대적하는 데는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하던 일에나 전념하도록 하거라.”

“존명!”

그제서야 자신들의 장문인이 화경급의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셨다. 하지만 장문인 혼자 마교도들과 대적하겠다는 말에 제자들은 도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현천검제는 엄한 어조로 어서 도관으로 돌아가 일을 하되 항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현천검제는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노궁을 불러세웠다.

“궁아, 잠깐 얘기할 것이 있구나.”

“하명하십시오, 장문인.”

다른 문하제자들이 모두 도관으로 돌아간 후에야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마교도들을 처리한 뒤, 이 처자를 양양성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마.”

“예? 하지만 어찌 장문인 혼자서 저 흉악한 마교도들을…….”

“허허, 그건 노부에게 따로 복안이 있으니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설마 노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현천검제의 말에 노궁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감히 하늘같은 장문인의 실력을 의심하겠는가?

“아, 아니옵니다. 제자, 장문인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자신과 마교도들과의 관계를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때론 진실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지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그럼 노부가 양양성에 다녀올 때까지 네가 제자들을 잘 통솔하도록 해라.”

“제자 노궁, 장문 어르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겠나이다.”

남경 탈출

황군에는 총사령관이 없다. 만약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황제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황군은 다섯 명의 중랑장(中郞將)들에 의해 통제된다. 그중 네 명이 황도로 통하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선을 지키고, 나머지 한 명인 호분중랑장이 황궁을 수비했다. 이렇게 다섯 명에게 병력을 분산시킴으로 인해 효율성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만큼은 최소화해 놓은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중랑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동중랑장은 황도의 동쪽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연공공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휘하 병력 중 보병 4천을 동원하여 악비 대장군이 기거하던 관사를 덮쳤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간발의 차이로 목표물을 놓쳤음을 알았다. 관사를 관리하는 총관의 말에 따르면, 대장군의 호위대는 1각쯤 전에 양양성으로 돌아간다며 떠났다는 거였다.

“호위대의 수가 얼마나 되나?”

총관은 그들의 수가 모두 1백 기라고 알려 줬다. 모두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중 활을 휴대한 자는 5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크흐흣. 예상외로 규모가 작군. 겨우 1백 기쯤 포획하는 건 일도 아니지.”

1각(15분) 정도밖에 안 됐다면 아직 황도의 외곽 방어선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그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도망을 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수많은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관도 위를 1기도 아닌 1백 여 기가 전력질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황도는 주요 통로마다 검문소들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그곳들을 하나하나 통과하자면 꽤나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동중랑장은 급히 전령에게 명령했다.

“양양성으로 가려면 서쪽 관도를 이용할 테지. 너는 즉시 서중랑장(西中郞將)께 달려가 놈들을 포획하라 전하거라. 한시가 급하다. 빨리 가라!”

“옛, 장군.”

전령은 서쪽 관문에 위치한 서중랑장의 사령부를 향해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전령을 보낸 뒤 그도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전령의 뒤를 따라갔다.

동중랑장은 병사들을 다그쳐 최대한 빨리 서중랑장의 사령부로 달려갔지만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애석하게도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이끌고 간 병사들이 강행군의 여파로 땀을 비 흘리듯 흘려대며 헐떡거리고 있을 때, 동중랑장은 서중랑장의 사령부가 위치한 토성 아래쪽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군관들 중 한 명이 그런 동중랑장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군관의 군례를 받으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부터 던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놈들은 잡았느냐?”

“실패했사옵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겨우 1백 여 기에 불과한 놈들을 잡지 못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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